80화_세계평화 컨퍼런스(1)
나도 9병 밖에 없는 붉은 포션을 다 쓸 생각은 아니었다.
치료보다는 고통이 목적이기 때문에 붉은 포션 1병을 한 명에게 다 먹인 게 아니라 1병으로 세 명에게 나누어서 주었다.
다행히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악당들의 상태를 보니 치료는 더디고, 고통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한 놈은 포션을 마시고 손톱이 다 깨지도록 시멘트 바닥을 쥐어뜯었다.
다른 한 놈은 피눈물까지 흘리는데, 솔직히 저 정도는 약간 오바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맞아서 왼쪽 치아가 없는 놈은 얼마 남지 않는 이를 갈아대고 있었다.
나는 놈들이 고통이 가실 때쯤 웃으며 외쳤다.
“자 주마등으로 찾았어요? 아 못 찾았다고요. 그럼 다시 갈게요.”
퍽퍽퍽
퐁!
다시 한번 악당들을 작살내고 포션을 넣어주었다.
“크아아악!!!”
“미췬!! 그냥 죽여!!!”
비명을 지르는 악당들을 향해 나는 느긋하게 그러면서 귀에 꽂히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어허~ 말하지 마요. 그러다가 혀 깨물어요. 자 생각을 하세요. 생각을.”
솔직히 아무리 악당이라지만 미안한 감도 들기는 했다.
나도 몇 번이나 저 고통을 당해봤다.
그래서 고통을 알고 있고, 나는 당할 때마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었다.
“자 비명만 지르다가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지나가는 주마등에서 레이지라는 여성을 찾아보세요. 정화 능력자입니다. 정화 능력자. 그것도 꽤 능력 있는 사람이고, 의사가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닦달을 했고, 2번째 약효가 끝나고, 3번째 약병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놈들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나마 힌트가 되는 답변을 내뱉고는 기절했다.
“그래도 선배.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도 나왔잖아요.”
내 말에 앞서 걷던 라이언 선배가 우뚝 멈춰 섰다.
“가능성··· 그건 확률일 뿐이잖아.”
라이언 선배 말대로 확률일 뿐이다.
하지만, 0%가 아니라 정말 0.0001%라는 가능성이 생겼다.
“우리 13기동 타격대는 아주 적은 확률에도 움직이는 사람들 아니에요?”
“···그렇지. 맞아.”
“그러니까 이제부터 작전을 바꿔야죠.”
“작전을 바꾼다고?”
“네. 복수가 아니라, 보물찾기로!!”
라이언 선배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바라보다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다짐을 읊조렸다.
“그 보물 내가 꼭 다시 손에 넣겠어.”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라이언 선배를 바라보던 나도 같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웃었다.
근데? 별이 너무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근데 선배 여기 어디예요?”
“여기? 강원도 인제 원통.”
나는 한탄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하~ 집에는 언제 어떻게 가지?’
***
프랑스와 중국으로 돌아갔던 이자벨과 노사의 재입국을 시작으로 호주의 크리스, 미국의 리암과 벨라 남매 순으로 한국 지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설을 시작으로 속속들이 영웅들과 컨퍼런스 관계자들이 한국으로 입국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세계평화 컨퍼런스 시작 전날 세계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하게 됐다.
세계평화 컨퍼런스는 매년 다른 지부(나라)에서 5일간 진행된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는 첫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세계평화 컨퍼런스의 진행을 맡은 래플스입니다.”
세계국가 소속의 싱가포르 출신인 래플스의 사회로 컨퍼런스는 시작됐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회의실을 지키고 있어야 할 전설 중 이자벨과 노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크리스, 리암, 벨라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각 지부의 대표들은 다섯 명의 전설이 입국했는데, 단 2명만 자리를 지키고 다른 3명이 자리에 없자 소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옆 사람에게 의문을 표하던 사람들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점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회의 중인데도 설명 중인 래플스의 말을 자르고 스페인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페인 대표 호킨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왜 모두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회의가 시작되는 거죠?”
“맞습니다. 거인 크리스님과, 불의 용사 리암, 물의 여신 벨라님이 자리에 없습니다.”
“다른 분들이 회의 참석 거부를 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진행을 맡은 래플스라고해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른다고 말한다면 오늘은 아무런 안건도 진행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에둘러 말했다.
“크리스님과 리암 그리고 벨라님께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오늘 회의는 불참하신다고 연락하였습니다.”
“그럼 내일? 내일은 오시는 건가요?”
“그건···”
아무리 진행을 맡은 래플스라고 해도 전설들이 빠진 이유는 알지 못했다.
세계국가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일개 사회자인 래플스는 전설들의 행보를 가로막지도 그렇다고 개인 스케줄을 알 리도 없었다.
당연히 중재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원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쾅!!
약 천여 명이 참석한 회의실에 책상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이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에는 박살 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자벨이 앉아 있었다.
“각 지부의 대표로 온 사람들이 뭐 하는 겁니까?”
“이자벨님 그게 아니라···”
“호킨스 조용히 하세요.”
“······”
이자벨의 역정에 지금까지 앞장서서 래플스를 압박하던 스페인 대표 호킨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신들은 이 지구를 이끌어가는 경영자도 있고, 정치인도 있습니다. 하물며 인류를 구한 영웅들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몇 명 빠졌다고 사리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니까?”
“몇 명이라니요. 한국에 오셨는데, 전설들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호킨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여러분!”
대중을 부른 후 말을 끊자, 천여 명의 사람이 모두 이자벨에게 집중을 하게 됐다.
이자벨은 이 상태에서 목소리 증폭 마법을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 걸고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허명으로만 불릴 뿐 겨우 상징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이 지구를 평화롭게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입니다. 그러니 제발 체통을 지키시고, 이 세계를 위해 노력하세요. 호시탐탐 남을 내리깔고 끌어내려서 그 위에 설 생각을 하지 말고, 사명감을 가지세요!”
이자벨의 말은 끝났지만, 회의장은 적막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때 앉아 있던 노사와 세계 대통령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가장 높은 사람 3명 중 2명이 박수를 치자, 다른 사람들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크리스, 리암, 벨라가 참석하지 않아 생긴 일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고, 다시 회의가 재개되었다.
***
크리스, 리암, 벨라는 기자들과 관계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현재 기동대 본부에 도착했다.
세계평화 컨퍼런스를 주최하면서 지금까지 그 일에 신경 써왔던 그들의 개인 사정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행선지는 13기동 타격대가 머무는 훈련장이었다.
“크리스 제발 사고 치지 말아요.”
“크하하핫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벨라 뿐이야. 그런데 나보다 리암을 단속해야 하는 거 아니야?”
크리스의 말에 벨라는 자신의 쌍둥이 오빠인 리암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리암이었다.
그런데, 입만 열지 않았을 뿐이지, 두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벨라의 한숨만 깊어질 뿐이었다.
“나중에 따로 오고, 오늘은 그냥 회의 참석할걸.”
“하하하! 빨리 보고 싶다고 했던 건 벨라였어.”
“크리스와 리암만 올 줄 알았으면 절대 오늘 안 왔을 거예요.”
“크하하핫.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지겨운 회의에 참석해도 되네.”
“됐어요.”
크리스는 벨라의 반응에 기동대 본부가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훈련장 문을 열려고 다가갔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끼이익
열린 문 사이로 유신이 정령초를 든 채 밖으로 나오다가 크리스의 거대한 덩치에 화들짝 놀란다.
“누···누구세요?”
“그럼 넌 누구냐?”
“네?”
크리스에 반문에 유신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여길 찾아온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인데, 반대로 나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크리스에 가려져 있던 리암이 유신에게 다가가며 지금까지 어떻게 말을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쏟아내듯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여기서 나왔지? 지금 뭘 하고 있지? 왜 이렇게 못생겼지?”
“저기요. 여길 찾아온 사람은 당신들이에요. 그런데 마지막 질문은 뭡니까? 왜 남에 얼굴을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그건 미안하군. 마지막은 속마음이었는데, 실수로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군.”
유신은 리암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경계심을 부쩍 올렸다.
앞에 있는 세 사람은 캡 모자에 썬글라스 그리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진짜 누가 봐도 나 수상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벨라는 크리스와 리암 때문에 앞에 있는 유신의 경계심이 올랐다는 것을 순식간에 캐치해서는 정중히 말했다.
“저기···죄송한데, 여기가 13기동 타격대가 있는 곳입니까?”
이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 그나마 정중히 나왔지만, 경계심을 풀지 않은 유신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드···들어가서 말해도 될까요?”
벨라가 서둘러 훈련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열린 문틈을 유신이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렇게 수상한 모습으로 남의 사무실에 들어가겠다고요?”
유신의 말은 ‘당신들은 수상하니 못 들어가.’ 라는 말이었고, 그걸 이해한 사람은 유일하게 벨라뿐이었다.
원래 눈치 없는 크리스와 다른데 정신 팔린 리암은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만 싶어 했다.
“휴~ 알았어요.”
벨라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다음 마지막으로 썬글라스를 벗어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유신은 앞에 있는 벨라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고는 순간 손에 힘이 풀려서 정령초를 놓쳤다.
정령초 화분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벨라는 물의 권능을 이용해 정령초 화분을 받아서는 한 곳에 조심히 놔뒀다.
“베···벨라?”
유신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벨라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 물의 여신 벨라님이시군요. 그럼 뒤에 있는 두 분은?”
벨라가 자신의 정체를 손쉽게 밝히자, 리암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 재꼈다.
“헉~ 불의 용사 리암님이요?”
“크하하핫! 이제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거군.”
큰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신은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덩치, 호탕한 웃음소리.
거기다가 자신의 정체를 서슴없이 밝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거인 크리스님이시군요.”
“크하하핫. 나도 단번에 알아보는군. 아주 마음에 들어 크하하핫!”
유신은 갑자기 등장한 전설들 때문에 너무 기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벨라의 목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우리가 선약은 잡지 않았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네! 당연히 됩니다. 그런데···누구를 찾으세요?”
“뇌신이요.”
“뇌신···? 아!! 우리 대장 찾으세요?”
벨라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떡이자, 유신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대장은 안에 있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요?”
“팬입니다. 사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