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_환골탈태(3)
한 달 만에 마주친 쟌은 나에게 진 것이 분했던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대로 표출된 건지, 더욱 무대포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쟌을 무시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는 이자벨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 인사에 이자벨이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인사를 끝낸 나는 다시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자세를 잡으며, 노사를 바라봤다.
노사가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반가운 손님이 왔구나.”
그 말에 나는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노사도 우리 13기동 타격대에 온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노사 훈련을 계속해도 될까요?”
“허허~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나는 노사의 말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나와 노사의 대화에 가장 놀란 건 쟌이었다.
“노사 할아버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쟌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건 이자벨이었다.
“저분이 노사란다.”
“네? 단장님 노사 할아버지는 흰수염을 길게 기르신···”
아무리 자신의 단장이자, 스승님의 말이라고 해도 젊게 변한 노사의 모습을 쟌은 믿지 못했다.
“최근에 환골탈태를 한 번 더 하셔서 젊어지셨단다.”
“그럴 수가···앗!”
쟌은 뒤늦게 젊은 노사의 모습이 자신이 알고 있는 늙은 노사와 이목구비가 같은 걸 확인하고는 놀랐다.
그리고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노사를 바라보며 어설프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할아··· 아니 노사가 계신 걸 몰랐습니다.”
“허허~ 우리 말괄량이 쟌이 바로 못 알아먹을 정도로 내가 젊어졌군.”
“말···말괄량이라니요!!”
쟌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어···어렸을 때 그러니까 철없을 적 일인 걸요.”
“내 눈에는 언제나 어리게만 보인단다. 자 이리 오거라.”
노사가 양팔을 벌려 쟌을 환영했지만, 쟌은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이제 어린아이 아니에요.”
“그래. 그래.”
계속 양팔을 벌려 쟌이 다가오기를 노사는 기다렸고, 쟌은 마지못해 노사에게 다가가 품에 안겼다.
“아이고~ 내 강아지.”
“이게 마지막이에요. 할아버지.”
“허허~”
오랜만에 만나 노사와 쟌의 해우를 바라보던 유신은 뻘줌함을 느끼며 이자벨에게 다가갔다.
“노사와 저 여자···아니 제자분이 친분이 있어요?”
“쟌은 노사의 증손녀거든.”
“네??”
나는 노사와 쟌을 번갈아 바라봤다.
쟌은 누가 봐도 백인의 모습이었고, 노사는 전 세계인이 다 아는 황인으로 중국인이다.
그런데 어떻게 증손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입양이라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확신은 금물이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이자벨에게 물어봤다.
“입양인가요?”
“무슨 소리야? 쟌은 정말 노사의 핏줄이야.”
“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저 여···아니 쟌은 백인이고, 노사는 누가 봐도 토종 중국사람인데?”
내 당연한 의문을 이자벨은 손쉽게 답해줬다.
“노사의 아들이 프랑스로 이민 가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고 그 아들이 또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서 태어난 게 쟌이야. 그래서 쟌의 외모만 보면 전혀 동양인의 핏줄이 섞인 것 같지가 않지.”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방법에 내가 벙쩌 있는 동안 노사와 쟌은 해우를 마치고, 내게 다가왔다.
“쟌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다는데, 한 번 들어보겠나?”
저 다혈질의 쟌이 내게 할 부탁은 알고 있다.
분명 대결일 거다.
나는 쟌과의 대결보다는 빨리 노사에게 배운 이화접목의 숙련도를 올리고 싶기에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쟌은 노사의 증손녀다.
지금 보니까 그냥 증손녀도 아니고, 꽤 아끼는 것 같았다.
“뭡니까?”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다시 한번 붙어.”
역시나 예상하던 대답이 들려왔다.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고요?”
“붙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대결을 하다가 한 달 전에 나한테 죽을 뻔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 자신만만했다.
나는 혹시나 대결을 막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사. 이 대결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대련일 뿐인데 뭐가 위험하다는 건가?”
“전 아직···”
도발이라면 도발일 수도 있는 말이기에 나는 흘끔 쟌을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힘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노사의 증손녀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노사와 이자벨은 고개를 끄떡였고, 쟌은 역시나 비명을 지르듯 화를 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한 달 전에 날 한 번 이겼다고 너무 오만한 거 아니야? 좋아. 죽어도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붙어보자! 내가 네놈의 콧대를 뭉개 버릴 테니까!!”
“쟌.”
이자벨은 내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쟌을 말렸다.
하지만, 다혈질의 그녀는 스승의 말도 듣지 않았다.
“스승님! 말리지 마세요. 내가 오늘 저놈을···”
“그만!!”
이자벨이 무차별적으로 기운을 발산했다.
노사는 손짓 한 번에 이자벨의 기운을 흐트러뜨렸고, 나는 어깨에 약간의 중압감만 느껴져서 그냥 몸으로 때웠다.
하지만, 쟌은 순간 비틀거렸고, 서 있는 것도 힘든지 연신 땀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쟌은 얌전해졌다.
그제야, 이자벨은 발산하던 기운을 거두었다.
“스승님. 아무리 말리셔도 전 이 대결을 꼭 해야겠습니다.”
오만인 건지 아니면 독기가 있는 건지 쟌은 나와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력으로도 쟌의 고집을 꺾지 못한 이자벨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휴우~ 쟌. 아직 모르겠니? 네가 내 기운에 저항하기 위해 땀을 흘릴 때, 하유신은 아무렇지 않아 했어.”
이자벨은 그 말을 끝내고 쟌과 함께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봤다.
평상시라면 미녀가 나를 바라보는 게 기분이 좋았을 거다.
하지만,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나를 관찰하니,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한 달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지?”
이자벨의 말에 나는 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사의 도움으로 기연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기연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달라진다고?”
“환골탈태하게 됐습니다.”
숨기려고 한다면 충분히 숨길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앞에 서 있는 노사가 한마디만 해도 밝혀질 사실이었고, 진실을 말함으로써 쟌이 대결 의지를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쓸데없는 대결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쟌의 의지가 그렇게 약한 게 아니라는 것과 노사의 호기심이었다.
“허허~ 유신이 자네가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걸 알겠는데, 그래도 한 번 붙어 보는 건 어떻겠나?”
“대결을 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혹여나 제 실수로 노사의 증손녀가 심하게 다치는 게 염려돼서 그렇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 피를 이어받은 아이야. 그 정도의 각오와 고난도 없이 어떻게 강해지겠나. 쟌아 안 그러느냐?”
의지가 꺾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건 내 착각이었다.
쟌의 두 눈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무인이자, 한 명의 기사로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충분히 감내해야 하는 겁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한 판 붙자.”
나는 이 어이없는 조손(?)지간 때문에 두통이 오려고 했다.
그래도 최후의 보류로 이자벨을 바라봤지만, 이자벨은 고개를 저으며 포기한 눈빛이었다.
내 훈련 시간이 방해받는 게 싫지만, 계속 이대로 두면 오늘치 훈련도 못 할 것 같았다.
나는 의지를 다지면 쟌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다.
“빨리 끝내자.”
쟌은 눈에 뜨거운 불꽃을 피워올리며 곱씹듯 내게 말했다.
“네가 아무리 환골탈태했다고 해도 난 질 생각이 1도 없어. 기대해!”
그렇게 쟌과 내 대결이 성사됐다.
우리는 훈련장 중앙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며 대결 준비를 했다.
그때 나는 이 무의미한 대련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쟌에게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그냥 하는 건 그렇고, 내기 어때요?”
“내기?”
쟌이 반문하며 호기심을 자아냈다.
호기심을 자극했으니 반쯤은 넘어왔다.
이제 도발할 차례다.
“내가 이기는 건 당연한 거니까. 흠···그래 딱 열 번.”
“열 번?”
“네. 내가 칼질 10번 할 동안 당신을 이기지 못하면 내가 진 걸로 할게요.”
이렇게 내기를 걸면 싸움이 길어져도 내가 빠르게 열 번만 칼을 휘둘러도 대결은 끝나게 된다.
그러면 내가 이기든 지든 대결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쟌과의 대결을 소홀히 할 생각은 아니다.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기에 이렇게 판을 짰다.
“제 9 수호 기사인 내가 네놈한테 얼마나 약하게 보였으면, 그딴 내기를 하는 거지?! 좋다. 내가 네 놈의 검을 열 번 견디지 못하면, 수호 기사 직위를 반납하겠다.”
“아···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절대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쟌이 더욱 쎄게 나가자, 나는 져줘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때 이자벨이 대결을 준비하는 쟌에게 호통을 쳤다.
“쟌! 그게 무슨 말이지. 감히 수호 기사 지위를 가지고 내기를 해?”
“아니 그게 아니라 스승님.”
“네게는 수호 기사 지위가 그렇게 쉬운 거였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쟌이 이자벨에게 고개 숙여 사과한 후에,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하겠다.”
내 꼼수가 쟌을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생각해보면, 본인의 입에서 스스로 생각해서 나온 말이기에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말을 할 때는 생각나는 데로 막 내뱉는 게 아니에요. 3번 생각하고 말을 하는 거죠.”
바드득!
“빨리 준비해라.”
이를 갈던 쟌이 자신의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챙!
나는 발검 기수식이 아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쟌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쟌은 설마 내가 같은 방식으로 싸울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전투는 언제나 변수를 생각해야 하고, 이미 상대에게 한 번 보여준 것을 두 번 보여주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멍청한 짓을 하기로 했다.
위이이잉~
내 검에서 포스가 솟아 나와서, 크고 아름다운 포스 대검을 만들었다.
포스 대검을 본 쟌이 더욱 방패 뒤로 몸을 숨기며 마법을 발동했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디펜스, 윈드 커터, 에너지 볼트···”
쟌은 자신의 몸에 버프를 걸고, 원거리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쟌의 방패가 실드 차지의 전조 현상인 빛을 뿜어냈고, 나는 쟌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럼 갑니다.”
“와라!!”
내 포스 대검에 대해서 쟌은 알고 있다.
당연히 포스 대검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블레이드 샷 때도 그랬지만, 어떤 작전과 꼼수도 무식할 정도로 강한 일격에는 소용없다.
“실드 차지!”
쟌은 대련이 아니라 대결인데도 기술명을 외치며 달려왔다.
나는 발바닥에 응축된 포스를 터트려서 빠르게 다가오는 쟌의 실드 차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실드 차지가 가까워지자, 나는 있는 힘껏 포스 대검을 휘둘렀다.
쿠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