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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먼치킨-72화 (72/300)

72화_인간은 언제나 망각한다.(2)

요즘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지 정령초들이 시무룩해 보였다.

나는 정령초들을 들어서 훈련장 바깥으로 이동해 햇볕을 쬐어주고, 물을 주었다.

착시현상이겠지만, 정령초들은 기분이 좋은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기침에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잔기침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기침은 진정됐고, 나는 조심히 손을 뗐다.

이틀 전 쟌과의 대결로 인해 생긴 내상 때문에 손바닥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나왔다.

“휴우~”

길게 한숨을 쉰 나는 정령초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차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자벨의 공격에 내가 내상을 입고 기절했을 때, 강문 선배와 이자벨이 한판 붙을 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철호 선배의 중재와 이자벨이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기에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상념을 멈추게 했다.

“여기 있었구나.”

나는 누워 있던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이자벨 로메가 환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온몸이 아파왔다.

“아고고···”

“몸은 좀 괜찮아?”

정말 나를 걱정해서 물어보는 말일까?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이자벨 로메 본인이면서 말이다.

“아직은 좀 많이 아프네요.”

“이런 미안해. 내 손속이 과했지.”

‘네 과했습니다.’ 이렇게 당장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자벨은 자신의 제자인 쟌을 한 방에 녹다운 시킨 내 모습을 보고, 견제한다는 생각으로 공격했다고 했다.

즉, 그 정도는 손쉽게 막거나 맞아도 그렇게 큰 피해는 받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는 소리였다.

“아닙니다. 저도 대련 중에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철호 선배는 사무실 안에 있습니다.”

내 말에 이자벨의 백옥같은 하얀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오늘은 너 때문에 온 거야.”

“저 때문에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이자벨 로메의 사인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에 포마드로 머리를 깨끗하게 정돈할걸.

“자 이거 받아.”

이자벨 로메가 내게 준 것은 사인이 아니라, 투명한 액체가 든 병이었다.

“이게 뭔가요?”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이야.”

“네?!”

“받아.”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자벨에게서 포션을 받았다.

이자벨 로메가 거짓말은 하지 않을 테지만, 이 포션이 진짜라면 이자벨 로메의 사인 100장으로도 살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이 포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돈 많은 사람도, 권력가도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도 쉽게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나 때문에 생긴 내상이니까. 구해왔어. 빨리 마셔봐. 한결 나아질 거야.”

이자벨의 재촉에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포션을 바라봤다.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은 유리병 안에 액체가 들어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나 깨끗하고 투명했다.

그렇게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포션을 이자벨에게 내밀었다.

“받을 수 없어요.”

“왜? 부담돼서?”

“네. 이 포션의 가치를 알고 있어서 더욱더 부담돼요.”

“가치를 알고 있어서? 넌 이 포션이 욕심나지 않니?”

나는 아직 내 손에 들려있는 포션을 바라봤다.

이자벨의 말처럼 욕심나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지금 당장 뚜껑을 열어서 먹으면, 이자벨 때문에 얻은 내상이 치유될 것이고, 가지고 있다가 팔기만 해도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 돈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자벨이 아무리 날 죽일뻔했다지만, 이건 너무 과했다.

“가져가세요.”

계속 포션을 들고 있으면, 더더욱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자벨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이자벨은 내가 넘긴 포션을 받아 들고는 한동안 나와 포션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넌 욕심이 없는 거니?”

“저 욕심 많아요.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공짜라니? 이건 내가 널 다치게 만들어서 사과의 의미로 주는 건데.”

“제 내상은 상급 포션만 있어도 웬만큼 치유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포션으로 제 내상을 치유하기에는 너무나 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 의심이 많은 아이구나.”

“상황이 그렇다는 거죠.”

내 말뜻을 정확히 이해한 이자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숨을 크게 뱉어냈다.

“좋아.”

“예?”

“몇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내가 이 포션 줄게.”

이자벨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그냥 원래 저한테 주셔야 하는 사인만 해주세요.”

“넌 고작 사인이 중요해?”

“네! 콜록 콜록···”

내가 크게 대답하자, 가슴과 배가 아파와서 한참 기침을 했다.

기침에서는 약간의 피도 나왔다.

“너 지금 몸 상태가 이런데··· 병원은 가봤어?”

“괜찮아요.”

“그러면 포션이나 다른 건?”

“포스 호흡법으로 자가 치유하는 중이에요. 이만 들어가세요. 아 가시기 전에 사인 꼭 부탁드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자벨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왜요?”

“말도 안 듣고 가는 거야?”

“무슨 말이요?”

“내가 할 부탁.”

유럽 최고의 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들어보기만 하는 건 그렇게 큰 부담이 안 될 것 같기에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첫 번째 부탁은 이거야.”

이자벨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예쁘게 포장된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뭐예요?”

“철호씨한테 대신 좀 줄 수 있을까?”

“전 들어본다고만 했는데요?”

이자벨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선물을 서글픈 미소로 바라봤다.

나는 잠깐 기다렸지만,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이거 하나 때문에 저한테 포션을 주신다는 거예요?”

이자벨은 선물을 다시 품에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쟌과 대련을 부탁해.”

“네?”

“길게는 안 바랄 게 세계평화 컨퍼런스 때까지만. 그리고···”

“잠깐만요.”

손을 들어서 이자벨의 말을 끊었다.

“왜?”

“부탁이 많네요. 역시 숫자 제한이 없으니 계속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저한테 하실 것 같은데, 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단호히 이자벨에게 더는 말을 못 하게 하고선 훈련장으로 걸어갔다.

단 몇 걸음 만에 도착한 훈련장은 조용했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가부좌를 틀며 포스 호흡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대장이 알려준 순서대로 포스 호흡법을 운용하니, 아파왔던 가슴과 복부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예전처럼 빠르게 포스를 돌릴 수가 없었다.

포스의 회전이 조금만 빨라져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아파왔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포스를 천천히 회전시키며 내상을 회복시켜 나갔다.

“후우~”

포스 호흡을 끝내고 눈을 뜨니, 내 앞에 이자벨 로메의 사인과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 그리고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쪽지를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부탁은 두 가지만 할게. 첫 번째는 아까 말했던 컨퍼런스가 시작하기 전까지 3일에 한 번꼴로 대련을 해주는 거야. 두 번째는 혹시나 나중에 쟌의 목숨이 위험하면 그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도와줬으면 좋겠어.]

쪽지를 읽고 나자 갑자기 의문점이 들었다.

이자벨이 놓고 간 이 쪽지는 불어로 적혀있다. 그리고 난 방금 불어를 읽었다.

생각해보면 쟌과 이자벨은 줄곧 불어로 말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들의 말을 한국말처럼 쉽게 받아들였고, 그들도 내 말을 쉽게 이해했다.

“불어는 봉주르 밖에 모르는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 당연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그때 내 왼쪽 손목에 착용된 은색 팔찌가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색 팔찌를 벗어봤다.

“와~ 흰색은 종이요. 검정 것은 불어구나.”

방금까지 읽혔던 불어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다시 은색 팔찌를 착용하니, 불어가 읽혔다.

“대장은 대체 내게 어떤 선물을 주신 거야.”

“어떤 선물이긴, 너한테 꼭 필요한 물건을 준 거지.”

친근하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강문 선배!”

“몸은 괜찮냐?”

“아니요. 아직도 죽겠어요. 대체 제가 뭐에 당한 거예요?”

“왜? 아까 보니까 이자벨이랑 희희낙락하면서 이야기도 잘하더구먼, 그때 물어보지.”

“헤헤~ 보셨어요? 별건 아니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거짓말하지 마. 그녀가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딱히,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다.

“헤헤~ 그런 뉘앙스였어요. 그런데 저 정말 뭐에 당한 거예요?”

“에너지 볼트에 당했어.”

“네?!! 에너지 볼트요? 겨우 에너지 볼트에 제가 내상까지 입었다고요?”

당황스러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살아있는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에너지 볼트다.

쟌의 에너지 볼트의 경우에도 전투 슈트와 포스 막에 막혀서 실질적인 충격은 겨우 주먹으로 한 대 맞은 정도가 다였다.

“이자벨의 에너지 볼트는 독특해.”

“독특하다고요? 그래도 기본 마법인데요?”

“아니 전혀 기본 마법이 아니야. 뭐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보고. 이게 여기 왜 있어?”

강문 선배가 집어 든 것은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이었다.

“이자벨이 두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에 저 먹으라고 두고 갔어요. 역시 부탁도 부탁이지만, 돌려줘야겠죠?”

“미친!”

갑자기 강문 선배의 욕설에 깜짝 놀랐다.

강문 선배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났을까?

내가 이 포션을 돌려준다고 해서?

아니면 이자벨이 다녀가서?

‘아···모르겠다. 역시 이럴 때는···’

나는 씩씩거리는 강문 선배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조심히 질문했다.

“저기··· 강문 선배···”

“왜!”

날카롭게 대답하는 강문 선배를 보니 질문이 쏙 들어갔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왜?”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욕먹을 것 같기에 나는 저자세로 말을 내뱉었다.

“이 후배가 아주아주 미흡하고 멍청해서 그러는데, 왜 화가 나셨는지?”

“너한테 화낸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군요.”

잠깐 나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다시 평소처럼 ‘헤헤’ 웃으며 강문 선배에게 계속 질문했다.

“그럼 왜 화가 나셨어요?”

“이거 때문에.”

강문 선배가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을 들었다.

“너 이거 한 병 만드는데,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영상이랑 사진으로만 봤지, 실물은 처음인데요.”

“너도 알다시피 이건 성녀만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이거 한 병 만드는데, 하루가 걸려, 여기서 더 문제는 하나 만들고 나면 최소 일주일은 못 만들어.”

“우와~ 완전 수공예. 그런데 그거랑 화내신 거랑 무슨 연관성이 있어요?”

“내 말 제대로 듣고는 있니? 에휴~ 됐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이 포션은 여기서 사용하면 안 되는 거야.”

“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의문에 빠져 있을 때, 강문 선배가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을 자신의 아공간에 쏘옥 집어넣었다.

“어? 어? 그거 돌려줄 건데.”

“돌려주긴 왜 돌려줘. 이건 원래 우리 13기동 타격대거야.”

강문 선배가 무슨 논리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하나는 확실하다.

“선배 이건 강탈···”

“자 이거 받아.”

내가 따지기 위해 강하게 말하고 있는데, 강문 선배가 내 말을 자르며, 상자를 던져줬다.

“이건 뭐예요?”

“뭐긴 뭐야 포션이지.”

강문 선배의 말에 상자를 열어보니 붉은 액체로 된 총 10병의 포션이 예쁘게 담겨있었다.

“매번 다치고 다녀서 대장이 이참에 너한테 그 정도는 주라고 하더라. 지금 우리 13기동 타격대에 있는 예비 포션은 다 준 거니까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해.”

쿨하게 말한 강문 선배가 훈련장을 벗어나려고 하자, 나는 강문 선배를 따라갔다.

“선배···”

“빨리 마시고 내상이나 치료해.”

“그게 아니라 제 포션은 안 돌려주실 거예요?”

내 말에 이동하던 강문 선배가 멈춰서더니 눈썹을 씰룩이면서 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왜요. 선배?”

“방금 네 입으로 네꺼라고 했다.”

“네? 아 포션이요? 네.”

강문 선배는 아공간에서 다시 포션을 꺼내서는 내 손 위에 올려놨다.

“돌려줄 생각하지 말고, 가지고 있어. 이게 언젠가는 네 목숨을 살려줄 테니까. 알았어?”

“그래도 부담···”

“충분히 받아도 되고, 원래 원주인에게 돌아간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네···”

내가 미적거리며 대답하자, 강문 선배는 짧게 혀를 차고는 훈련장을 떠났다.

나는 성녀의 축복이 깃든 포션과 9개의 붉은 포션을 아공간에 넣고는 남은 포션 한 개의 뚜껑을 열었다.

뽕~

귀여운 소리와 함께 포션이 열렸고, 그대로 들이켰다.

포션의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지더니,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두근

“젠장!!”

깜박했다.

우리 13기동 타격대에서 지급하는 포션의 회복력은 최상이지만, 그 반동으로 어마어마한 아픔을 선사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유신 그렇게 당해놓고선···

“크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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