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_피난길(1)
강문이 주위를 둘러보자 촌장과 노인들이 아직 죽은 김정운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한 강문이 깊게 한숨을 쉬며 손뼉을 마주쳤다.
짝!
강문을 중심으로 파동이 퍼져나가며 리호진과 노인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털썩. 털썩.
모두가 쓰러지자 강문은 미련 없이 회의실을 떠났다.
강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호진을 시작으로 죽은 김정운을 빼고 모두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호진과 노인들의 눈빛이 다시 총명하게 빛을 내뿜었다.
“뭐···뭐네?”
한 노인이 김정운의 시체를 발견했고, 회의실은 한동안 소란에 휩싸였다.
회의실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한 채 강문이 유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을 때 리수진이 갑자기 나타나 강문의 앞을 막았다.
“부탁이 있슴네다.”
강문은 리수진이 어떻게 떠들든 투명인간 취급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말이라도 들어보시면 안 되는 겁네까?”
리수진의 끈덕짐에 강문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리수진을 바라봤다.
“초면인 사람한테 부탁이라? 내가 왜 그 부탁을 듣고 있어야 하지?”
“영웅이지 안슴네까?”
“영웅이라··· 아니 나는 영웅이라 불리는 호구가 아니야. 그리고 이 정도 했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입네까?”
“김정운인가? 김정은인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찐 놈을 없애줬다고. 더 이상의 호의는 호구 짓이니 알아서 해~”
말을 끝낸 강문이 리수진을 지나쳐 가려고 하는데, 리수진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네다.”
리수진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강문이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이거 유신이 데리고 빨리 떠야겠는데, 안 그러면 완전 코 꿰이겠어.”
강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종국에는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급하게 움직인 강문은 유신이 머물고 있는 집에 도착해서는 벌컥 문을 열었다.
“유신아 이러다가 정말 작전에 늦겠다. 빨리 가···자.”
강문은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유신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 호구가 또 호구 짓을 하기 위해 예열을 하고 있다고···
“강문 선배···”
“안 돼!”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휴우~ 뻔하지, 마을 사람들 도와주자고?”
유신은 강문의 독심술에 깜짝 놀랐다.
“선배 어떻게 아셨어요?”
강문은 처음으로 자신이 이 호구 후배를 13기동 타격대에 데리고 온 걸 후회했다.
***
강문은 솔직히 유신을 데리고 빨리 떠나고 싶었다.
평소라면 유신의 간절한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유신이 비행기에서 추락하게 됐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 엮이게 돼서 마냥 거절하기에는 마뜩잖았다.
강문은 어쩔 수 없이 빠르게 마을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식량은?”
리수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껴 먹으면 1주일 정도 먹을 수 있슴네다.”
“어제 잡은 돼지 X끼 집 뒤져봐.”
“네? 그게 무슨 말입네까?”
“모두가 비쩍 말라가고 있을 때 혼자 비대해. 그게 뭘 뜻하겠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 의도를 깨달은 리수진이 거칠게 고개를 끄떡였다.
“하루 준다. 하루 안에 모든 사람이 떠난 준비를 끝내야 할 거야.”
“너무 급박합네다.”
“급박이고 자시고, 1분이라도 늦으면 난 유신을 데리고 그냥 떠날 거야 알았어?”
강문의 협박에 가까운 재촉에 리수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문 선배 그래도 하루는 좀··· 삼 일 아니 넉넉하게 일주일은 줘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유신이 계속 말할수록, 강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흘끔흘끔 강문의 표정을 살펴보던 리수진은 눈치 없는 유신의 말을 끊었다.
“24시간 안에 준비 끝내겠슴네다.”
“말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알겠슴네다.”
리수진이 방을 나가자, 강문이 유신을 돌아봤다.
“왜요 선배?”
“휴우~”
유신의 해맑음에 강문은 깊게 한숨을 쉬다가 기습적으로 유신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넌 어떻게 눈치가 없냐?”
“서···선배 아파요. 아파 아악~”
“아프라고 하는 거야!”
“으아악~”
강문은 한껏 유신을 괴롭힌 후에야 헤드락을 풀어줬고, 유신은 처량하게 쪼그려 앉아 붙잡혔던 머리를 문질렀다.
“유신아.”
“선배! 이상한 약 먹은 거보다 더 아파요!”
“2차전 할까?”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유신이 정신을 차리며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존경하는 선배님.”
강문은 유신의 과장된 모습을 보며,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정의감 넘치고, 착하다는 것은 정말 좋은 거야.”
“저를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
“네?”
“넌 딱 호구가 될 상이거든.”
“왕이 될 상···아니 영웅이 될 상이 아니고요?”
“전혀~ 넌 호구상이야.”
“에이~ 제가 그 정도는 아니죠.”
유신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부정하자, 강문이 진지하게 말했다.
“넌 호구의 모든 조건을 갖췄거든.”
“강문 선배··· 그렇게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하면 제 가슴이 아픈데요?”
유신이 가슴을 살짝 부여잡으며, 슬픈 표정을 짓자, 강문이 한심한 듯 쳐다봤다.
“응 그래서 이제부터 육체 단련 외에 정신 교육도 들어가야겠다.”
“아··· 사양해도 될까요?”
“우리 13기동 타격대에 두 명의 호구는 필요 없어!”
강문의 말에 유신은 생각했다.
‘대체 다른 한 명의 호구는 누구일까?’
***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마을 사람들은 다들 등에 커다란 봇짐을 졌다.
사람들 중심에는 큰 수레 두 대가 놓여 있고, 자경 단원들은 죽창이 아닌 도검류로 제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리수진도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들고, 자경단원과 마을 사람들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유신과 강문이 집에서 나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는 중앙으로 걸어왔다.
뒤늦게 유신과 강문을 발견한 리수진이 다른 일은 다 내팽개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장비가 좋아졌네?”
강문의 의문을 리수진이 재빠르게 풀어줬다.
“간나 새끼의 집에서 다 나온 겁네다. 이걸 진작에 풀었으면 사람들이 그렇지 죽지 않았을 텐데···”
“감성은 다른 데서 팔고, 뭘 얼마나 꽁쳐 뒀던 거야?”
“마을 사람들 전원이 일주일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자경단 전원이 착용할 무기가 나왔슴네다.”
리수진과 강문이 대화하는 동안 유신은 저 멀리 자경단원들의 새로운 장비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리수진은 뒤늦게 유신의 눈빛을 보고 자경단을 호출했고, 자경단 중 한 명이 꽤 괜찮아 보이는 검을 들고 와 유신에게 조용히 건넸다.
“뭐···뭔가요?”
“하유신 동무 겁네다.”
“정말요? 제 거에요?”
“그렇슴네다.”
리수진은 유신이 검을 받고,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자 살짝 마음이 놓였다.
하유신이라는 사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검사의 생명과도 같은 검도 잃었다.
그런 그에게 약간이라도 보답하려는 생각에 가장 좋은 검을 골라 빼두었는데···
“리진수 동무 와보라요.”
냉랭한 리수진에 말에 리진수는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느긋하게 걸어왔다.
“누나 왜 불ㄹ···”
짝!
리수진이 하나뿐인 동생의 뺨을 올려 쳤다.
갑작스러운 리수진의 행동에 리진수를 포함한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내가 뭘 잘못 했슴네까?!”
리진수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따지듯이 크게 외쳤다.
“이 간나새끼! 아직도 잘못을 모르네?”
“난 잘못한 거 없슴네다!”
“내래 분명 네가 가지고 있는 검 하유신 동무 주라 하지 않았네?”
“······”
리수진의 말에 유신은 리진수의 허리에 패용된 검과 자신의 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네랑 죽은 돼지 동무랑 뭐가 다르네? 욕심만 많아가지고.”
“하유신 동무가 제 검을 부러뜨려슴네다.”
“그걸 뚫린 주둥이라고!!”
화가 난 리수진이 지팡이를 들어 리진수에게 휘두르려고 했다.
그때 유신이 리수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시라요!”
“말로 해요, 말로.”
“저 간나 새끼가···”
“제가 잘 타이를게요.”
내 말에도 리수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리수진에게 찡긋 웃어 보이고 리진수에게 몸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뭡네까?”
“내놔!”
“네?”
“내 검.”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무서운 눈빛으로 리진수를 압박했다.
리진수는 내 눈빛에 살짝 기가 죽었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실···싫습네다.”
좋게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나는 리진수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내놔!!”
리진수는 정말 주기 싫은지 몸을 틀며 검을 감싸 안았다.
나는 리진수의 행동에 짧게 한숨을 쉰 후에 몸 주위로 포스를 이글이글 불타오르게 뿜어내서 리진수에게 시각적 압박을 가했다.
“끄응~”
“검 내놔!!”
목소리에도 약간의 포스를 실었다.
거기까지 더해지자, 리진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허리에 검대를 풀어, 내게 건네줬다.
나는 낚아채듯 리진수의 검을 뺏고는 자경단원에게 받은 검을 리진수의 손 위에 올려줬다.
“이건 부셔 먹은 검 값.”
리진수는 검도 뺏기고, 당연히 받을 무기를 이런 식으로 받으니 억울해하며 유신을 째려보다가 기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유신의 뒤에서 리수진이 두 눈을 부릅뜨며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드득! 알겠슴네다.”
리진수는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화병에 걸릴 것 같아서 몸을 돌렸다.
“내래 출발 준비 때문에 이만 가보겠슴네다.”
리수진과 리진수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떠날 때도 유신은 새로운 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강문은 유신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랬냐?”
“제가 뭘요?”
강문은 저 멀리 떨어져서도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리진수를 가리켰다.
“저 친구한테 검 뺏었잖아.”
“에이~ 선배님도 참! 뺏다니요. 원래 제가 받기로 한 거잖아요.”
유신이 당당한 말에 강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어제는?”
“뭐가요?”
“어제는 사람들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것 같더니.”
“사람들을 위하고 사람을 구하는 게 우리 13기동 타격대의 일이잖아요. 그리고 검은 그거랑 별개고요.”
자신만의 신조에 맞게 움직이는 유신을 보며 강문은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
“서걱~ 휘리릭 촤악! 이 소리는 유신이 몬스터들을 베어내는 소리입니다.”
강문의 목소리에 맞게 유신이 행렬의 최선두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유신의 뒤로는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방진형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방진형 바깥에는 자경 단원들이 간격을 벌리고 서서 다가오는 몬스터를 저지했다.
“허억~ 허억~ 강문 선배 조금만 허억~ 도와주시면 안 될 허억~ 까요?”
“유신이 네가 말했잖아. 13기동 타격대의 업무는 사람을 구하는 거라고.”
“그런데 허억~ 왜 저만 허억~”
“나는 여기서 사람들 지키잖아.”
온몸에 피칠갑을 한 유신과는 대비되게, 강문은 방진형 정중앙에 있는 식량 수레에 앉아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유신은 그 모습이 참 얄밉다고 생각하며 강문을 쏘아봤다.
“그럼 저는요?”
“넌 길을 뚫어야지. 원래 짬 안되면 궂은 일하는 거야.”
“그럼 수진씨는요?”
유신의 말에 강문 옆에 앉아 있던 리수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자잖아.”
“강문 동무 이제 내래 길을 열겠슴네다.”
“가만히 있어!”
강문의 강압적인 어투에 리수진의 몸이 굳었다.
“강문 선배. 제가 선배의 사랑스러운 후배 아닌가요?”
유신이 강문에게 성토하고 있을 때 정찰을 나갔던 리진수가 돌아왔다.
“앞에 고블린 무리가 나타났슴네다.”
리진수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올린 채 보고를 하고선 유신을 바라봤다.
유신은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거친 호흡을 정리했다.
“쉴 만큼 쉬었지? 빨리 가서 사람들을 지켜야지.”
“······”
“대답이 없다?”
“네에···”
어쩔 수 없이 유신은 힘없이 대답한 후, 몸을 돌려 고블린 무리에게 뛰어갔다.
그때 장난기 가득한 강문의 목소리가 유신의 두 귀에 제대로 꽂혔다.
“포스몬! 너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