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_빌리지 디펜스(1)
유신이 다 찢어진 전투복을 입은 채 낡은 방안에 홀로 누워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앓는 소리를 내던 유신이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선배님 그만 때리···세??”
방금까지 선배들과 대련했던 게 꿈이라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려고 하는데, 뒤늦게 격통이 따라왔다.
“끄응!”
나는 격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이를 앙다물고는 포스를 사지 백해로 돌렸다.
포스는 약해진 내 몸을 생각해서인지 평소보다 천천히 몸을 돌기 시작했다.
한동안 포스가 몸속을 계속 돌았고, 격통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휴~”
포스로 인해 고통이 많이 가신 나는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때 칠이 다 벗겨진 문이 조심히 열리며 9세 정도 되는 소녀가 들어왔다.
“깨났소?”
“응?”
“오마니~ 여기 깨났소!”
“저기 누구니?”
소녀는 내 질문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다시 문을 닫으며 나가버렸다.
그제야 나는 깨어난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얼키설키 판자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전투복은 다 찢어져 있고, 오른손은 그나마 반듯해 보이는 나무로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다행히, 한쪽에는 메고 있던 가방이 놓여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열고선 GPS를 찾은 다음에 켰다.
띠 띠 띠 삐!
“됐어. 고장은 안 났네.”
안도의 한숨을 쉰 후에 방금까지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다급한 느낌의 아날로그 종소리가 들려왔다.
뎅뎅뎅뎅뎅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서둘러 검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분명 기절하기 전에 검이 내 허리춤에 있었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검과 의료 키트가 보이지 않았다.
이불 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 작은방에 계속 있어봤자 사라진 검이 솟아나지는 않는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귀에 거슬리는 급박한 종소리에 배낭을 메고선 방을 나섰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아까 그 소녀와 그 소녀의 엄마처럼 보이는 여인과 마주 보게 됐다.
“앓는 사람이 벌써 일어났습네까?”
“네?”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어여 들어가시라요.”
예전 TV프로그램에서 보던 북한말이다.
북한도 분명 세계평화를 이루는데, 도움을 줬다.
전쟁을 멈추고, 각국과의 외교 문을 열었다. 하지만, 마왕 침략 시 마족이 북한에 강림한 걸로 알고 있다.
세계정부에서는 꽤 오랜 기간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였지만, 북한 땅이 완벽한 몬스터 화가 된 후에는 모두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뎅뎅뎅뎅뎅
끊임없이 비상종이 울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일 없소.”
“네?”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건가?
그때 여인의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놓고 있던 소녀가 말했다.
“괴생물이 쳐들어 왔습네다.”
“괴생물? 그 괴생물이라는 건 몬스터를 말하는 거니?”
“그렇습네다.”
겁에 질린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나는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름이 뭐야?”
“김라령입네다.”
“걱정하지 말고 여기 있어. 오빠가 도와줄게.”
나는 왼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
그때 여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몸으로 뭘 어떻게 하겠슴네까?”
“괜찮습니다.”
“개도 닷새가 되면 주인을 안다 했슴네다. 작은 은공도 아니고, 우리 라령이의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어찌 그냥 보냅니까?”
“네?”
“우리 라령이 구하려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슴네까?”
어이가 없다.
지금 앞에 있는 여인이 아니 아줌마가 하는 말이 정말 어이없다.
“하~ 참 정말 애 핑계 대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입네까?”
“저 쓰러져 있을 때 제 물건이 딱 두 개가 없더라고요.”
내 말에 여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나는 제 의료 파츠입니다. 허리에 둘러져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네요. 아~ 물론 저한테 사용한 흔적도 없고요.”
“고조 그건···그러니까···”
내 눈을 피하려는 여인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제 검은 어디 있습니까?”
“이···잃어 버렸슴네다.”
여인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개도 닷새면 주인을 안다고 했죠. 사소한 은혜도 꼭 갚는다는 말인데, 이건 뭐 은인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원숭이군요.”
“죄송합네다. 하지만 지금··· 업슴네다.”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겠습니다.”
내가 여인을 스쳐 지나가며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라령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오마니한테 뭐라 하지 마시라요. 김정운 동무가···”
여인은 급하게 라령이의 입을 막았다.
나는 나가려는 몸을 돌려 여인과 라령이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내가 자신의 딸을 해코지한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몸으로 라령이를 감싸 안았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넘어가 주기로 한 나는 모녀가 안심할 수 있게 최대한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검과 의료 파츠를 가져간 건 화가 나지만, 생각해보면 당신들이 날 보살펴 준 것도 사실이죠.”
나는 손을 들어 겁에 질린 라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걸로 더는 문제 안 삼을 거야. 잠깐만.”
배낭을 뒤져서 선배들 몰래 챙긴 사탕 봉지를 꺼내 라령이에게 건네줬다.
“힘들 땐 레몬 사탕이지.”
“······.”
라령이는 레몬 사탕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억지로 건네주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환한 햇살이 비추는 밖에는 약 서른 명의 사람들이 긴장한 채, 나무로 얼키설키 지어놓은 목책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금까지 훈련용 검만 쓰다가 임무 때문에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 산 이천만 원짜리 검이 어디 있나 찾아봤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다.
“크르르르”
비상종이 멈추고, 숲에 숨어 있던 고블린들이 경계선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키키키킥”
귀에 거슬리는 고블린의 소리가 들렸고, 고블린들이 숲의 경계선을 벗어나 마을로 뛰어왔다.
고블린들이 공터의 중간쯤 왔을 때 한 여성이 마법을 사용했다.
“디그··· 워터 월··· 바인드”
한두 번 몬스터의 공격을 막을 게 아닌지 연계 마법을 잘 이어나갔다.
디그로 땅을 파고, 워터 월로 파인 땅에 물을 채워서 진흙으로 만든다.
고블린들이 진흙을 건널 때 넝쿨을 자라게 해서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근력 강화”
“다중 조준”
“다중 명중”
멈춘 고블린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스킬을 사용해서 죽창을 던졌다.
나는 다중 능력 부여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헌터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레어한 스킬을 화전민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날아간 죽창의 대부분은 고블린을 꿰었지만, 죽창의 수보다 고블린이 많았다.
고블린들은 죽창의 숲을 헤쳐 목책으로 다가오려고 할 때 맨땅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길을 뚫고 몇몇 고블린들이 마을로 다가왔지만, 화상을 입은 고블린은 마을 사람들의 죽창에 쉽게 당할 뿐이었다.
불길이 가라앉자, 대부분의 고블린이 죽거나 다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몇몇의 마을 사람들이 목책을 넘어 고블린에게 다가가 확인 사살을 하면서 죽창을 다시 회수했다.
“찾았다.”
고블린을 확인 사살하는 남성 중 한 명이 내 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목책을 넘어 그 남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어떤 중년 남성이 내 어깨를 잡았다.
“누굽네까?”
나는 대답 대신에 왼손을 뻗어 내 검을 사용하는 남성을 가리켰다.
“저 검의 주인이요!”
“키키키킥!”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자, 모든 사람이 다시 숲 쪽을 바라보자 아까보다 더 많은 수의 고블린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을 밖에 나가 있던 사람들은 챙기던 죽창을 버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반 고블린뿐만 아니라 상위 개체도 끼어있었다.
고블린 주술사의 주술에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넝쿨에 잡혀서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사···살려주시라요”
나는 목책을 뛰어넘어 내 검을 쥐고 도망가는 남성의 손을 걷어차서 검을 하늘 위로 띄웠다.
“내··· 내 검!”
내 검을 자기 검으로 오해(?)하는 남성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지나쳤다.
검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왼손으로 정확히 받은 후, 넝쿨에 잡혀 있는 사람들의 넝쿨만 잘라냈다.
“고맙습네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그 상태에서 고블린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고블린을 마주하니 일 년 전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졸업시험 때 상위 개체 고블린들에게 죽을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위 개체가 문제가 아니라 숫자가 문제였다.
셀 수도 없는 숫자가 다가오니 기가 질릴 만도 하지만, 몇 달간 이것보다 더 많은 숫자도 상대했던 나다.
나는 다가오는 고블린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어김없이 한 마리의 고블린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여러 방향에서 달려드는 고블린들은 꼭 검만을 사용하지 않고, 간간이 발차기도 사용했다.
고블린 주술사가 내게 불덩이를 던지면, 나는 일반 고블린을 잡아서 그 불덩이에 고블린을 던져 버렸다.
그렇게 앞에서 일반 고블린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키키킥킥”
고블린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러난 고블린들 뒤에서 스무 마리의 홉고블린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뒤에 있는 우두머리 홉고블린의 몸에서 검은 아우라가 이글거렸다.
검은 아우라에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니 이글거리던 아우라가 언제 그랬냐는 둥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키킥키킥”
홉고블린의 명령에 얼마 남지 않은 고블린들이 나를 무시하고 마을로 쳐들어가려고 달렸다.
나는 일반 고블린과 일직선상에 있는 홉고블린 무리를 보며 무심하게 왼손에 든 검을 휘두르며 탄검기를 날렸다.
탄검기는 일반 고블린들을 스치고 지나가서 홉고블린 무리에게까지 닿았다.
“······”
고블린들과 내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검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털어냈다.
몇 방울의 피가 멈춰있는 고블린들에게 닿았고, 그걸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앞에 있던 고블린들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돼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고블린이 쓰러지자, 홉고블린들도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홉고블린들보다 내구성이 좋았던 건지 검은 아우라를 뿜어냈던 우두머리 홉고블린은 가슴에서 피만 약간 뿜을 뿐이었다.
“왼손이라서 그런가? 아냐 아직 수련이 부족한 거야.”
다시 한번 검기를 날리려고 하는데, 고블린 주술사들이 내게 바인드를 걸었다.
넝쿨이 내 몸을 꽁꽁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상처 입은 우두머리 홉고블린이 날 빠진 단검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단검이 내 목을 찌르려는 순간 포스 막을 뿜어냈다.
“흡!!”
포스 막은 넝쿨을 소멸시키고 단검을 막아냈으며, 우두머리 홉고블린을 뒤로 튕겨냈다.
뒤로 넘어진 우두머리 홉고블린은 상황 파악이 빠른지 도망가려고 몸을 돌렸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발바닥에 포스를 뿜어내서 우두머리 홉고블린에게 달려들었다.
홉고블린에게 내 검이 닿으려는 순간 토벽이 올라와 내 검을 막았다.
토벽을 없애고, 홉고블린을 찾아보니 이미 숲 안으로 도망쳤다.
지금이라도 쫓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고블린 주술사들의 캐스팅 소리가 들려왔다.
“꿩 대신 닭이다!”
나는 홉고블린의 미련을 날려버리고, 고블린 주술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고블린 주술사들을 해치우고, 마을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귀···귀신입네까? 사람입네까?”
내가 목책까지 다가가자 마을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자! 하유신 이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줄 때다.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땅에 박아넣고, 왼손 엄지와 검지를 쫙 핀 다음, 턱을 괴며,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잘생기고 멋진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