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9 함께, 또 따로 (1) :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간다.
회식이 끝난 후, 숲속 친구들은 한가지 약속을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매월 월급일 전후로 한 번씩 모여 맛있는 것을 먹거나 소풍을 가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벼운 친목 도모를 겸해 연맹 내의 크고 작은 일들의 방향을 결정하고, 악몽의 지배자처럼 다시 한 번 거대한 적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살피고, 최대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한 모임이기도 했다.
“으음······.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다음 달에 뵙죠. 아참, 그리고 이거······.”
한편, 관리자는 떠나기 전 달곰이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었다.
“달곰이의 몸에서 중요한 걸 하나 빼갔으니, 보상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이걸 드리고 가겠습니다. 아마 어느 정도는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손 위에 들린 것은······. 선과였다.
“선과는 모두 사라진 게 아니었나요?”
수하가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물었다.
고북 대왕은 물론이고 고미조차 모두 사라졌다고 말한 보물을 대체 어디서 가져왔단 말인가.
“그냥 어쩌다 보니 하나 구했습니다. 세상은 넓으니, 어딘가에는 몇 개쯤 남아있지 않았겠습니까? 여하튼, 제가 가지고 있어 봐야 별 쓸모도 없으니까요. 맛있게 드세요.”
관리자는 그 말만을 남겨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조급함이 느껴졌다.
아직 그의 뇌리에는 고미가 깨어나던 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 * *
식사를 마친 숲속 친구들은 간만에 만난 동이와 무신과 함께 디저트 카페로 이동했다.
현세로 돌아오지 않고 드라고니아에 남아있던 두 사람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했고, 이대로 돌려보내기에는 서운하기도 했으니까.
“후후, 위대한 이 몸이 언제나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지! 오늘은 이 몸이 맛있는 것을 사주마!”
첫 월급을 받은 아기곰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줄도 모르면서 일단 골드 바를 꺼내 들었다.
“음······. 고미, 그걸 돈으로 바꾸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텐데.”
수하가 웃으며 금을 그대로 쓸 수는 없다고 말해주자, 초콜릿색 솜뭉치의 두 귀가 쫑긋 일어섰다.
“어, 어째서 그런 것이냐? 그, 금자는 받지 않는 것이냐?”
고미가 예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금자 하나면 어딜 가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고미는 자신의 첫 월급으로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려 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금자를 써 본 적도 없고, 워낙 옛날 이야기라 지금 세상에서는 금을 내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따위는 없지만.
“하하, 곰 선생님, 마침 저도 곰 선생님에게 드릴 게 있습니다. 맛있는 것은 이걸로 사주시죠.”
그때, 이강혁이 웃으며 꿀색 카드 한 장과 헌터 등록증 하나를 내밀었다.
“어? 그게 뭐예요?”
“고미 님도 이제 정식으로 저스티스에 등록된 헌터인데, 월급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월급을 드리려면 통장이 있어야 할 테고요.”
순간 수하는 이강혁이 내민 것이 대포 통장은 아닌가, 고미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범죄에 가까운 행위에 손을 댄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어, 그······. 이강혁 씨, 그게 가능한가요?”
수하가 더듬거리며 질문을 던지자, 이강혁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헌터로 등록만 되면요. 뭐, 고미님의 경우에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라 절차가 복잡하기는 하지만요.”
“가능합니다. 안 그러면 저와 제르날이 어떻게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이강혁에 이어 제르보나가 간단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생각해보니 두 사람은 한유진에게 돈을 받아 쓰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도 가지고 있었다.
수하는 그제야 왜 고미의 신분 문제나 자산관리 문제를 숲속 친구들에게 상의하지 않았는지, 조금 뒤늦은 후회를 했다.
악당과 맞서느라 눈코뜰새없이 바빴다지만, 이런 문제는 조금 더 빨리 처리를 했으면 좋았을 테니까.
“아웅님과 다웅님 것도 있으니, 받아가시죠. 아참, 통장에 지금까지 파괴한 게이트나 던전 클리어에 대한 보수도 넣어뒀습니다. 원래 곰 선생님 몫으로 들어가야 할 것들이었으니까요.”
말을 마친 이강혁은 곧장 두 개의 카드와 신분증을 아웅이와 다웅이에게 건네주었다.
이 모습을 본 수하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고미야 그렇다 치고, 아웅이와 다웅이는 헌터는 커녕 웅왕 소속도 아닌데 어째서 통장을 만들어줬단 말인가?
“어, 아웅이랑 다웅이는 왜······.”
“아, 수하님 아버지께서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월급을 넣어주고 싶은데, 두 분께서 통장도 없고 신분도 없으니 어떻게 좀 안 되겠냐고. 두 분께서 원하신다면 저스티스 소속을 유지하시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가게 근처에 게이트가 열리면 그걸 파괴하고 보수도 챙길 수 있을 겁니다.”
이어서 이강혁은 아웅이, 다웅이에게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아기곰 삼형제의 자산관리 문제와 현세에서의 신분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됐다.
이에 수하는 새삼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음을, 아기곰 삼형제가 다시 대균열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새롭게 가족이 된 달곰이는 여전히 신분도, 통장도 없는 상태였다.
“우, 우웅······.”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지만, 조금 소외감을 느낀 달곰이의 꼬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달곰님, 죄송하지만 절차가 복잡해서 그러니,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달곰이님의 신분증과 통장도 신청을 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강혁의 다정한 말에, 달곰이는 다시 씩씩한 반달곰으로 돌아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 우웅! 알겠느니라! 위대한 이 몸은 인내심이 있으니, 조금 더 걸려도 상관이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달곰이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이강혁의 모습에, 원조 아기곰은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허수아비, 참으로 훌륭하구나. 역시 수하 다음으로 이 몸의 부하가 된 녀석답다.”
“아닙니다, 곰 선생님.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하 1호라는 사실을 공인받자, 이강혁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유진에게로 향했다.
약간의 승리감, 오만함이 섞인 그 눈빛에 한유진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치켜떴다.
“뭐요, 뭐! 왜 그렇게 보는데요.”
“아닙니다.”
피식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올리는 제스쳐에, 수하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저 두 사람은 언제까지 저런 걸 가지고 승부욕을 불태울 건지······.
처음에는 단순히 사이가 나빠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이제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뭐예요, 수하 씨. 그 표정은? 어차피 1위는 나다, 뭐 그런 거예요?”
그때, 한유진이 갑자기 공격의 화살을 수하에게로 돌렸다.
“음······. 승자의 여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이강혁마저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어느새 손을 잡고 수하를 몰아세웠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물론 가끔 고미가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걸 보면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은 저렇게 유치하게 굴지는 않는다는 게 수하의 생각이었다.
“자! 다들 위대한 이 몸과의 친분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어서 주문을 하거라! 이 몸은 달콤한 것이 마시고 싶다!”
그렇게 숲속 친구들이 시답잖은 말장난을 치고 있을 때,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은 아기곰 선생이 나서서 어서 주문을 하라고 재촉했다.
“그럼 고미, 오늘은 네가 주문해 볼래?”
이에 수하는 고미에게 오늘은 직접 주문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이제 신분증도 생겼고, 카드도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기곰은 아직 돈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데다가, 셈에 너무 약하다.
이래서야 얼마를 벌든 이상한 곳에 재산을 모두 탕진할지도 몰랐다.
이제부터는 아기곰에게 기본적인 소비 습관과 돈에 대한 개념을 잡아주어야 했다.
‘으음······.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 녀석들한테 정말 그런 걸 가르칠 수 있을까?’
아웅이 다웅이에 달곰이까지, 순진무구한 아기곰 사형제에게 올바른 경제 관념과 소비 습관을 심어주기.
수하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였다.
“자! 어서 먹고 싶은 것을 말해보거라! 위대한 이 몸이 직접 너희들이 먹을 음식을 주문해 주겠노라!”
한편, 수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미는 친구들에게 먹을 것을 사줄 생각에 벌써부터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럼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
“저는 바닐라 라떼요.”
“저는 카페라떼입니다.”
“흐, 흐흠! 이 몸은 달콤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아, 아웅!”
“다웅!”
“난 카페모카.”
“허허, 나는 카푸치노로 하지.”
“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하지. 그런데 고미, 정말로 네가 이걸 외워서 주문을 할 수 있는 건가?”
마지막 주문을 한 흑암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 이, 이 몸을 누구라고 새,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나 다를까, 고미의 동공이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음, 첫 주문부터 너무들 하는군.’
수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없이 핸드폰 메모장에 그 메뉴들을 받아적었다.
마실 것 열 댓개에 케잌이나 디저트까지 더해지니, 주문은 한없이 길어졌다.
적어도 처음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아기곰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은 아니었다.
[ 고미, 걱정하지 마. 가자, 내가 다 써놨어. ]
친구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아기곰에게 살포시 전음을 보내자,
[ 우, 우웃! 여, 역시 수하 너는 최고다! ]
초콜릿색 솜뭉치의 짤막한 꼬리에 다시 바짝 힘이 들어갔다.
“흠흠······. 주, 주문을 하겠다!”
그리고 잠시 후, 위대한 아기곰의 생에 첫 주문이 시작됐다.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네 잔, 카, 카페모카 한 잔······.”
초콜릿색 솜뭉치는 수하의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천천히 메뉴를 읽어내려갔다.
쪼꼬미 아기곰에게는 카운터가 너무 높아, 주문은 수하의 어깨에 올라탄 채 해야 했다.
“네, 네?”
말하는 아기곰이 더듬더듬 메뉴를 읊어대자, 점원은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빡이며 고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 어깨에 올라탄 아기곰이 커피를 주문하다니,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알바생이 어디 있겠는가.
“후훗,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물론 위대한 이 몸을 만난다면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주문을 마친 친절한 아기곰 선생은 허둥대는 알바생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
[ 후후, 수하! 해냈다! 위대한 이 몸이 해냈느니라! ]
[ 자, 고미. 아직 안 끝났어. 돈 내야지. ]
[ 아, 아차! 기, 기다리거라! 이 몸의 꿀 카드로······. ]
그리고는 한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꿀색 카드를 내밀었다.
“후훗, 받거라! 사실 이것은 이 몸의 친구가 만들어 준 카드이니라! 색깔이 아주 멋지지 않느냐?”
그 와중에 친구가 카드를 만들어줬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고미의 모습에, 수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아기라서요.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너무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주문에 결제까지 마친 후, 수하는 웃으며 점원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표정으로 보아 이미 고미에게 홀딱 빠져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조 아기곰의 말투가 불쾌할지도 모르니까.
‘으음, 그나저나 가격은 확인도 안 하고 일단 카드를 긁는군.’
테이블로 돌아오는 길, 수하는 고미에게 핸드폰 계산기를 쓰는 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제를 하기 전에는 꼭 금액을 확인하라는 조언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가 모두 나오자, 숲속 친구들의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드라고니아의 일은 대충 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한두달만 있으면 완전히 뒷정리가 끝날 것 같습니다.”
동이의 말을 들은 고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무신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데 작은 살쾡이, 너는 어째서 드라고니아에 남았던 것이냐?”
“용족에는 강한 전사들이 많으니, 그들과 겨루며 제 무공을 조금 더 갈고 닦아 보고 싶었습니다.”
무신의 근황을 들은 숲속 친구들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마지막 싸움에서 그렇게 큰 부상을 입어놓고 또다시 무공 수련이라니, 정말이지 말릴 도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무신은 당분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수하를 돕다가 다친 것이라고는 하나, 이번 싸움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고.
“우웅······. 꼭 그래야 하겠느냐?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에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철학을 가진 원조 아기곰은 아쉽다는 듯 현세에 남을 것을 권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웅 노사만큼 좋은 스승은 어딜가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저의 길이 있고, 그 길은 저 스스로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신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자신의 거취를 정했다.
그리고 무신의 그 말은, 달곰이의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를 강렬하게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