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6 숲속 친구들의 평화로운 일상(4) : 놀았으면 먹어야지.
의식주(衣食住)란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살 곳을 뜻한다.
수다르는 이 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식의주가 아니라 의식주인가?
당연히 식(食)이 가장 앞에 와야 마땅했다.
‘집이야 비만 피하면 그만이고, 옷이야 남루해도 남의 시선만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먹는 것은 다르다.’
그것이 수다르의 철학이었다.
먹는 즐거움을 격이 낮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지만, 수다르의 생각은 달랐다.
먹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기쁨이다.
그것을 어찌 격이 낮다 할 수 있겠는가?
먹보 아기곰 역시 이 철학을 듣는다면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일 터였다.
- 꼬르륵······.
본론으로 돌아가, 실컷 눈밭을 구르며 신명나게 놀고 나니, 남은 것은 추억과 허기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고픔이 느껴지는 상태.
노는 것과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아기곰에게는 최적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루에 다섯 끼, 아니 열 끼를 먹어도 세상의 맛있는 것을 모두 맛보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애석하게도 아기곰의 위는 너무 작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자니 음식의 맛이 줄었고, 반대로 맛을 잘 느끼기 위해 한 끼를 건너뛰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후훗,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실컷 놀아서 소화를 시키고, 또다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지!’
현세에 나온지 1년 남짓, 마침내 아기곰은 확고부동한 인생 철학을 확립했다.
마음껏 먹고, 진이 빠질 때까지 논다, 그러면 또다시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수 있다. 그것도 더 맛있게!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허허, 오늘은 이 수다르가 한 턱 내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무려 숲속 친구들 최고의 미식가, 수다르가 주최하는 회식이니, 먹보 아기곰의 심장은 식전부터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설렘, 기대감, 즐거움, 온갖 좋은 감정들이 아기곰의 가슴 속을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메, 메뉴는 무엇이냐!”
기대에 찬 고미의 눈빛에 수다르는 살짝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보시면 알 것입니다.”
“우, 우웃!?”
기대감을 한껏 부추겨 놓은 뒤 이어지는 능숙한 밀당에, 고미는 물론이고 그 뒤를 따라오던 아기곰 셋까지 덩달아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먹는 것을 좋아하기로 따지면 그 중 누구 하나 원조 아기곰에게 밀리지 않았으니까.
‘으음, 굉장하군.’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수하는 ‘역시, 수다르님은 연애를 잘하실 거야’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동굴 속에 틀어박혀 살던 양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완벽한 완급 조절.
물론 그 완급 조절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영원히 비밀로 남을 테지만.
진실은 화원에 놓인 와이파이 수신기만이 알고 있었다.
“자, 그럼 가보시지요. 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 * *
이후 수하와 숲속 친구들은 검은콩 호와 딸기 호에 올라 어디론가 날아갔다.
상공에는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었지만, 마법의 힘으로 인해 드래곤의 등 위는 춥기는커녕 훈훈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우웃!”
음식점에 도착하는 순간, 원조 아기곰은 솜방망이를 바르쥐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 어서 가보자, 수다르! 맛있는 것이 이 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새하얀 식탁보가 펼쳐진 기다란 테이블이 숲속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깔끔한 브라운톤의 인테리어.
식사를 하면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통유리로 된 벽면까지······.
수다르가 숲속 친구들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중식당이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숲속 친구들이 입장하자, 가게의 점원이 몸에 벤 듯 예의 바른 태도로 안내를 해주었다.
“허허, 사실 저도 조금 기대가 되는군요.”
평소답지 않게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수다르의 표정에서는 약간 긴장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오늘 미식 수달, 수다르 8세의 강의 주제는 ‘식감’이었다.
그리고 수다르가 생각하기에 이 ‘식감’이라는 주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 바로 중화요리였다.
물론 오늘, 이곳으로 강의 장소를 정한 것에는 몇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요리는 이미 제가 골라두었으니, 천천히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말을 마친 미식 수달은 경건한 표정으로 차를 따라 천천히 한 모금 들이켰다.
“호오······.”
차를 마신 수다르가 눈썹을 추켜 올리자, 숲속 친구들은 모두 말없이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간만에 함께 하는 먹방, 수다르의 시식평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설령 차 한잔이라도.
“훌륭하군요. 식전 차는 어디까지나 차의 맛을 느끼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맛을 더욱 잘 느끼기 위해 마시는 것. 무조건 좋은 것을 써서도 안 되고, 너무 나쁜 것을 써서도 안 되지요. 그리고 차의 향이 너무 강해서도 안 됩니다. 기본을 잘 지킨 차군요.”
미식 수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속 시식단은 약속이나 한 듯 차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지만, 수다르의 말을 듣고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으, 으음······.”
“아웅······.”
“다우웅······.”
“흐으으음······.”
물론 단맛 중독자인 아기곰 사형제의 입맛에는 조금, 아니, 많이 맞지 않는 차였다.
하지만 앞으로 나올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준다고 하니, 이 정도 맛없는 차 – 적어도 아기곰들의 기준에서는 –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첫 번째 메뉴입니다.”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번째 메뉴가 나왔다.
코스요리의 첫 번째는 늘 그렇듯 흔히 맛볼 수 있는 수프였다.
다만 그 생김새가 적잖이 아기곰 사형제의 호기심을 끌었다.
“호오······. 상당히 특이한 국이로구나, 그런데 어째서 국에 과자가 올려져 있는 것이냐?”
아기곰 사형제는 아직 수프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대충 국물이 있는 음식은 탕이나 국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국치고는 국물이 조금 진하고 걸쭉한 데다가, 이상할 정도로 자잘한 건더기가 많았다.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그 기묘한 국 위에 올려진 노란색의 ‘과자’였다.
“그것은 누룽지라는 것입니다.”
다소 생소한 이름에, 고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누룽지라······. 제법 멋진 이름이구나. 내 친히 맛을 보겠노라.”
“본래는 수프에 넣어 먹는 것이지만, 한번 조금만 떼어먹어 보시지요.”
말을 마친 미식 교수, 수다르 선생은 능숙하게 젓가락을 놀려 작은 누룽지 조각을 초보 미식가, 초코 아기곰의 입에 넣어주었다.
- 바삭!
그 순간, 맛깔난 효과음이 숲속 시식단의 귀를 자극했다.
“오, 오오!”
과자와 비슷한 식감에 아기곰의 두 귀와 꼬리가 곧장 반응을 보였다.
“과자와 비슷하지요?”
“그, 그렇구나!”
수다르의 작은 입에는 어느새 촉촉하게 침이 고여 있었다.
중식 누룽지와 누룽지탕.
요즘은 동네 중국집에서도 제법 맛볼 수 있는 메뉴이지만, 제대로 하는 집은 드물었다.
게다가 식감을 제대로 즐기려면 배달로는 안 된다는 것이 수다르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수다르도 제대로 된 찹쌀 누룽지의 맛을 본 지가 언젠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자, 그럼 이제 누룽지를 수프에 넣어 보시지요.”
하지만 그의 목적은 단순히 누룽지의 맛을 보여주거나, 고미를 핑계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대충 강의 주제에도 맞으면서 자신이 먹고 싶기도 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고 하자.
여하튼, 오늘 강의의 주제는 바로 ‘식감’이었다.
수다르는 미식가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이 즐거움을 반드시 고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으음······.”
하지만 고미는 잠시 망설이며 선뜻 누룽지를 수프에 담그지 못했다.
초보 미식가인 아기곰이 보기에, 무려 ‘과자’를 이 정체불명의 국물에 빠뜨리는 것은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과자를 국물에 담그라고 지시한 것은 다름 아닌 숲속 친구들 최고의 미식가이자, 수하 다음으로 믿을 수 있는 인물인 수다르가 아니던가.
“알겠다, 수다르. 너를 믿겠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원조 아기곰은 마침내 용단을 내렸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오직 그 말을 한 사람이 수다르이기에 가능한, 용기있는 결정이었다.
찹쌀 누룽지를 수프에 넣고 잠시 기다리자, 바삭하던 누룽지가 적당히 눅눅해지며 풀어지는 감촉이 젓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국물에 밥을 넣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그 감촉에, 아기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 오오오오······!”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예민한 촉감이 아기곰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이건 맛있다’ 그러니 ‘어서 먹어보라’고.
그리고 대망의 첫입.
“우, 우웃!”
“아웅!”
“다, 다웅!?”
“오, 오오!”
아기곰 사형제의 입에서 나란히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음, 확실히 차이가 있네.’
수하 역시 겉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삭한 누룽지를 먼저 먹고 그것을 수프에 넣어 다시 먹어보니, 식감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끈기가 있으면서도 고소하며,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씹는 맛이 느껴진다.
단순히 바삭하기만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풍미였다.
그리고 또 하나······. 게살과 누룽지 사이로 씹히는 묘하게 부드러운 젤리 같은 무언가가 절묘하게 밸런스를 잡아주고 있었다.
“허허, 어떠십니까, 고미님?”
수다르의 질문에, 고미는 대답을 하는 것조차 잊고 홀린 듯 숟가락을 놀려댔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괴, 굉장하구나. 고작 국물에 빠뜨린 것만으로 이렇게 맛이 달라진단 말이더냐?”
정신을 차린 아기곰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허, 바삭함이냐, 부드러움이냐. 사실 부먹과 찍먹 논쟁의 핵심은 식감의 차이에서 온다고 할 수 있지요.”
같은 소스에 같은 조리법. 같은 재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먹파와 찍먹파가 갈리는 것은 식감이 그만큼 ‘맛있다’는 감각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게 수다르의 분석이었다.
“허허, 제가 왜 식감을 오늘 회식의 주제로 잡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십니까?”
누룽지라는 새로운 음식으로 포문을 열어, 부먹과 찍먹이라는 현대 미식 문화 최대의 난제로 자연스레 화제를 옮겨가는 노련함, 그것을 통해 다시 ‘바삭함’과 ‘부드러움’이라는 식감의 중요성에 대한 문제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수다르의 모습에, 수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굳이 직접 강의를 듣지 않아도 용왕에서 진행 중인 수다르의 특별 커리큘럼이 왜 매번 미어터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식감이 맛에 미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들 조금 감이 잡히셨을 듯 하니, 이제 다음 요리로 넘어가 볼까요?”
미식 1타 강사, 수다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두 번째 음식이 테이블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음식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기곰 사형제의 코가 일제히 반응을 보였다.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웅이와 다웅이였다.
“아, 아웅!”
“다웅!”
두 번째 메뉴를 바라보는 둘의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재료가 상당히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바로 그때······.
“허허, 고미님, 수하님. 오랜만입니다.”
“웅노사.”
식당의 문이 열리며 드라고니아에 있던 숲속 친구의 나머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오오! 동이! 작은 살쾡이!”
현세에 있지 않던 두 사람(?)의 뒤늦은 합류에, 줄곧 테이블에 고정되어 있던 아기곰의 커다란 두 눈이 처음으로 먹을 것을 떠났다.
그러나 그 둘 사이를 가르고 나온 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고미의 두 귀가 쫑긋, 하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