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92화 (292/300)

EP.292 산신령님의 은밀한 사생활(2)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다.

화원을 지키는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에게 아침을 준 후, 수다르는 흑암의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흑암과 함께 지낸 이래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으음······. 몸 안의 사기(邪氣)가 많이 빠져 나갔군요. 다행입니다.”

수다르는 또다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토생원, 오늘치 야채는 모두 준비되었습니까?”

진료를 마치기 무섭게 또다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승의 모습에, 토생원의 마음에는 걱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이제 막 흑암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랑이들에게 밥을 준 참인데, 벌써 횟집에 가져다 줄 야채를 걱정하신단 말인가.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항상 잘 챙기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스승님도 조금 쉬시지요.”

야채 이야기가 나오자, 흑암이 애써 미소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또 뭘 키워볼까?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밥값은 해야지.”

최근 흑암은 화원의 리모델링과 농사를 돕는 것으로 진료비(?)를 대신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요즘 그는 무언가를 ‘기르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화원 생활은 오랜 세월 땅굴에 숨어 복수만을 꿈꾸던 두더지에게 생명을 기르는 것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수다르의 말로는, 이것 역시 치료의 일환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죽음의 기운에 침잠되어 있었으니, 생명의 기운으로 그것을 중화시켜야 한다고.

‘내가 이런 걸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군.’

흑암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치료와는 별개로, 생명을 보살피고 키워나간다는 일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마음속에서 보드라운 솜털이 천천히 자라나,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슴속이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차는 느낌이랄까.

“흐음······. 글쎄요, 혹 키워보고 싶은 작물이 있으십니까?”

한편, 수다르는 짐짓 별다른 생각이 없는 척 마음속으로 다음 작물을 고르고 있었다.

마침 겨울이다.

얼마 전에는 첫눈도 내렸고, 밖에는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에는······.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줄 작물이 자란다.

아, 위대한 자연의 순리여.

계절마저 자신에게 드라마를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벌써 겨울이니, 귤을 키워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오, 귤이라. 그것 참 좋군요. 친구분들과 함께 대웅전 바닥에 누워 다 같이 귤이라도 까먹으면 참으로 즐거울 것 같습니다.”

수다르의 제안에 토생원은 새하얀 털이 보송보송 돋아난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겨울은 귤이다.

미끼만 던졌을 뿐인데, 영민한 제자는 스스로 정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과연 괜히 연금술로 초월자가 된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제자라니, 이런 것을 가르치는 즐거움이라고 하던가?

“흠······. 나도 인국에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흑암 역시 토생원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노인국의 말에 따르면, 겨울에는 뜨끈한 이불 속에 들어가 티비를 보며 아무 생각없이 귤을 까먹는 게 제 맛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해 겨울이면 인터넷에 귤 한 박스를 다 먹어버렸다는 글들이 올라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수다르는 알고 있었다.

“음, 좋다. 새로운 작물이라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흑암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자신의 기다란 손톱을 손질했다.

그새 농사일에 익숙해져, 이제 그의 손은 거의 우주 제일의 농기구나 다름이 없었다.

“안되면 또 어떻습니까, 그러면 어디 시장에 가서 좋은 귤이라도 사서 저희가 농사를 지었다고 말하고 나눠 먹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수다르······.”

수다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흑암은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물론, 수다르는 진심이었다.

직접 키운 귤이든, 마트에서 사온 귤이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보는 일이었다.

「 야! 나 좀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가라 쫌! 」

「 해미야, 제발······. 」

또다시 엇갈려버린 남녀가 과연 재회할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다시 사랑을 키워나갈지, 너무나 궁금해서 밤잠까지 설치는 수다르였다.

더는 하루라도 미룰 수 없다.

“진심이냐, 수다르?”

“어차피 가볍게 쉬엄쉬엄 하는 일,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하시지요.”

야채에서 농사로, 농사에서 귤로, 귤에서 티비로.

실로 자연스럽고, 또 완벽한 흐름이다.

겨울 농사하면 귤이고, 귤이면 티비 아니겠는가?

다른 이야기로 빠지는 게 되려 이상한 일이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수다르는 슬쩍 운을 띄워보았다.

“허허, 제가 듣기로 인간들은 겨울마다 귤을 까먹으면서 티비를 본다고 하던데······. 귤을 잘 키워 고미님과 함께 티비를 보면, 겨울철의 즐거움을 알려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쯧, 또 고미 이야기군. 고미에게만 그런 것을 알려줄 게 아니라, 너도 조금 쉬는 게 좋지 않겠나?”

“허허,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의원이 아파서야 어디 환자나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흑암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이 둘은 지금 어떻게든 자신을 쉬려 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고작 드라마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수다르의 생각은 달랐다.

‘드라마와 영화에는 인생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그는 글 꽤나 읽은 선비라고 할 수 있었다.

의학 서적은 물론이고, 사대부들이 읽은 어지간한 유학 경전들도 모조리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었다.

「 이, 이것이구나! 」

그리고 ‘허생전’이니 ‘홍길동전’이니 하는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그는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깨달았다.

「 그래, 공맹의 도에는 생생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빠져 있었던 것이야! 」

심오한 도(道)보다, 생생한 삶의 이야기.

때로는 사람을 울고, 웃고, 분노하고, 슬프게 만드는, 생동감 넘치는 생에 대한 찬사!

그렇게 소설에 대한 애정은 최근 들어 드라마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달달한 로맨스부터 살인마를 추격하는 스릴러, 통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정치극, 때로는 평범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드라마에는 그야말로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있지 않은가!

늘그막에 주어진 그 유일한 즐거움을, 수다르는 포기할 수 없었다.

“수다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게 속으로 드라마 예찬론을 늘어놓고 있을 때, 흑암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지금, 그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잃는 게 체면 뿐이라면, 드라마를 위해 까짓 체면 따위는 어째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산신령의 눈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토생원과 흑암이 이런저런 일로 바쁜 사이에 혼자 드러누워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재미난 이야기들을 혼자 즐긴다면, 너무 염치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지금껏 혼자서 드라마를 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두 사람(?)도 적잖이 서운해할 터였다.

해답은 하나였다.

‘와이파이!’

그래,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다 같이 본다면, 더 이상 미안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니 이점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눈을 빌어 드라마를 볼 수는 있지만, 그에게는 채널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다시 보기를 통해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한 모든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을 터!

심지어 요즘 인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웹플릭스도 즐길 수 있을지 모른다.

“스승님?”

이어지는 토생원의 물음에, 수다르는 짐짓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데 인간들의 물건은 이 안에서는 사용할 수 없지 않습니까? 수하님의 집은 너무 작고, 그렇다고 매일 신세를 지는 한유진님 댁에서 다 같이 모여 귤을 까 먹으면서 티비를 보자니······. 그것도 너무 염치가 없는 일 아닙니까?”

사실 토생원과 흑암이 말한 것은 ‘모여서 귤을 먹는다’까지였다.

티비 이야기는 수다르가 은근슬쩍 섞어 넣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대화에서 발화자가 누구였으며,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까지는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큰 흐름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흐름에 맞춰 슬쩍 이야기를 끼워넣으면, 그것을 전제로 사고하게 되어있다.

‘방에 누워 귤이나 먹자’는 이야기가, 어느새 ‘방에 누워 티비나 보며 귤이나 먹자’라는 이야기로 기억되는 것이다.

수다르는 이러한 기법을 드라마를 통해 배웠다.

‘고맙소, 패트릭 제인.’

금발에 쓰리피스 정장을 즐겨 입지만 넥타이는 하지 않는 심리학자.

수다르는 속으로 그에게 나지막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다면 대웅전에 티비를 설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군. 우리끼리 있을 때도 편하게 귤을 까먹을 수 있으니, 너도 편히 쉴 수 있겠지. 쉴 때마다 남의 집에 찾아가는 것도 어려우니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든 산신령을 쉬게 해주려는 두 초월자는 곧장 해결책을 내놓았다.

가끔 날을 잡아 남의 집에서 티비를 보며 귤을 까먹는다고, 이 워커홀릭 산신령에게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신 스승님, 귤 농사가 끝나고 티비가 설치되면, 저녁 정도는 편히 쉬면서 보내시지요.”

“그래, 그런 조건이라면 나도 기꺼이 도와주도록 하지.”

“멍! 멍멍!”

사랑이와 삼돌이까지 동의를 표하자, 수다르의 입꼬리가 낚싯바늘처럼 휘어 올라갔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곳은 던전과 다름없는 이공간······.”

이어지는 수다르의 말에, 토생원과 흑암은 그가 또다시 일을 하려고 구실을 찾는다고 생각했다.

“스승님! 그것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마침 나도 인간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느라 공간 마법에는 조금 조예가 있으니, 토생원을 도와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보지.”

“제르보나님 역시 마법에 조예가 깊으니,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군요.”

“그렇군, 그 드래곤도 마법사였지.”

“필요한 재료는 제가 조달하겠습니다.”

다시 보기 결제비용이 얼마였더라······.

수다르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 정도는 용왕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포션 제작법을 알려주며 받은 돈으로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으리라.

‘허허, 와이파이가 설치된다면 그 돈으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도 되겠구나.’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풀렸다.

처음에는 그저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인데, 웹플릭스에 배달 음식이 서비스로 붙었다.

초월자가 셋에, 심연을 기는 자의 사도까지.

이 정도 구성이라면 고정된 이공간 내에 통신장비를 설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심지어 그 자 중 하나는 연금술로 초월자가 된 토생원이 아니던가.

* * *

“과연 토생원님······. 정말 대단하시군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제르보나님의 도움 덕분입니다. 마력 파장을 맞추기 위해서는 약간의 아이템이 필요한데, 혹 구해주실 수 있을런지요?”

“걱정 마십시오. 저도 흥미가 생기는군요. 제 사비를 들여서라도 반드시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그 장치를 설치하는 건 내가 하지. 땅을 파는 건 내가 전문이니 말이야.”

세 명의 초월자, 한 명의 드래곤, 그리고 용왕의 제작자들과 마법사들.

그들이 던전 내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든 위대한 마도 공학자로 기록된 것은, 조금 더 미래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제작한 던전용 와이파이 수신기의 원천 기술은 무료로 공개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던전 공략을 용이하게 만드는 위대한 발명품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그 위대한 발명의 시작점은 웹플릭스와 드라마 다시 보기였다는 것을, 후세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허허, 웹소설이라는 것도 꽤 재미있구먼.”

그리고 여기, 웹소설이라는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버린 수달이 있다는 것 역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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