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1 산신령님의 은밀한 사생활(1) : 소확행을 지켜라
윤기 나는 갈색 털, 꼭 사람의 그것처럼 생긴 작은 손.
풍성한 수염과 통통한 볼살, 긴 허리와 짧은 팔다리.
겉보기에는 한없이 귀여운 수달이지만, 그 정체는 지리산의 산신령.
그 이름도 수다르 8세.
그 천부적인 의술과 영민한 머리는 천하제일 의원으로 명망이 높은 수다르 가문에서도 역대 최고의 인재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허허,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
그의 하루는 언제나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과 등산객들의 삶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약초꾼에 농사꾼, 예전보다는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나무를 하러 다니는 나무꾼부터 마음을 비우기 위해 산을 오르는 등산객, 건강을 위해 산을 찾는 사람, 외로운 산의 밤을 지키는 산장지기까지.
거기에 고라니, 사슴, 토끼, 반달곰 같은 산짐승을 비롯해 쉬리, 메기에 퉁사리, 쏘가리 같은 민물고기들도.
지리산과 그 인근에 사는 모든 생명이 그의 보살핌의 대상이었다.
“허허, 윤구네 집에 곧 손주가 태어나겠구나······.”
오늘 살피고 있는 것은 지리산 인근에 사는 한 심마니의 집이었다.
예순도 되지 않아 벌써 손주를 보다니, 요즘 같이 아이 낳는 사람이 적은 세상에 이런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지리산의 신령으로서, 당연히 축하 선물이라도 보내야 했다.
“내일은 윤구네 집에 산삼이라도 한뿌리 내려줘야겠구나.”
박윤구.
병든 노모를 위해 약초를 캐다 그 길로 심마니가 되어버린 한 효자의 이름이었다.
심마니는 문자 그대로 산에 기대어 사는 직업이니, 먹고 살기 위해서는 제법 운이 따라야 했다.
산신령에게 미움을 사면 일 년을 꼬박 산을 헤매도 제대로 된 삼 하나 못 건지고, 반대로 산신령의 가호를 받으면 윤구처럼 평생 심마니로 살아도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괜히 어부들이 해신제를 지내듯 심마니들이 산신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
「신령님, 신령님, 우리 병든 어매 한 번만 살려주소. 」
처음 윤구에게 삼을 내려주었을 때, 그는 아직 뺨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어린 것이 어찌나 지극 정성으로 빌며 밤낮으로 산을 헤맸는지,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윤구가 벌써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를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윤구야, 내일 늘 가던 그 길로 산을 오르다 왼쪽에 커다란 바위 틈으로 자란 밤나무가 보이거든 그 뒤로 백 걸음 정도를 가보거라.」
아들일 때는 효자로, 총각일 때는 정 많고 주위 사람 잘 챙기는 사람 바른 청년으로, 아버지일 때는 책임감 있고 인자한 가장으로, 그렇게 착하게만 살아왔으니 100년산(産) 산삼 한두 뿌리 내려주는 것은 그 삶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리라.
윤구의 꿈속에 들어가 100년 산 산삼 두 뿌리를 점지해준 수다르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윤구의 아들놈을 훑어보았다.
“허허, 오늘도 보고 있군······.”
사실 지리산의 신령이 윤구네 집을 자주 훑어보는 데는,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윤구의 아들놈은······. 자신과 취향이 비슷했다.
무슨 취향이냐고?
드라마든, 영화든, 예능이든, 재미 포인트가 비슷했다.
이건 수다르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어허허, 거참 군침이 도는구만.”
오늘 그 아들의 눈을 빌어 수다르가 시청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최근 인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자, 포인트는 이렇게 토치로 마무리를 해주는 것인데요.”
오늘의 경연 메뉴는 초밥.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장인과 초보자 사이의 차이가 가장 크게 드러나는 요리다.
입맛이 까다로운 수다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허허, 참으로 맛있겠구먼.”
‘최근에 초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하고 짚어보니, 숲속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도미 코스 요리와 복어 코스 요리가 생각났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횟감들과 보글보글 끓던 뜨끈한 매운탕에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진 초밥들을 생각하니, 절로 군침이 넘어갔다.
‘허허, 나이가 들수록 이놈의 식탐은 줄어들지를 않는구먼.’
수다르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신령치고는 식탐이 조금 많다는 것이었다.
기실 몇 백년 전부터 지리산에서 나는 것들은 죄다 맛을 보았고, 인간들이 산신제에 올리는 음식들도 산신령의 항아리에 보관해 두고두고 먹곤 했다.
‘윤구가 작년에 올렸던 음식이 참 맛이 좋았는데 말이야.’
사실 산신령의 항아리는 약효만 증진 시켜주지, 음식의 맛을 돋우는 효과는 없었다.
지금처럼 음식을 숙성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수다르의 피땀어린 연구의 성과였다.
대균열의 수호자에게 내어준 항아리와 약재를 담아둔 것 몇 개를 제외하면, 나머지 항아리에는 아직도 인간들이 올린 맛난 음식들이 그득그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산신령이 윤구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사소하지만 몇 가지가 더 있었다.
「 아니, 박씨는 재주도 좋아. 남들은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삼을 어찌 그리 턱턱 캐낸대?」
「 허허, 다 산신령님이 보살펴 주셔서 그런거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비결을 물을 때마다, 윤구는 그렇게만 답했다.
하지만 그의 영업비결(?)은 사실 다른 데 있었다.
「 석우야, 꿈에 신령님이 나오시거든, 꼭 드시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어보거라.」
「 네? 그게 무슨······」
「 어허, 우리 심마니들이 심을 보는 건 다 신령님이 보살펴 주셔서가 아니겠느냐. 당연히 심을 봤으면 신령님께 보답을 해야지. 」
윤구는 아들에게만 최고의 심마니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바로, 신령님에게 제때제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 신령님, 덕분에 우리 어매가 살았소.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소? 」
「 허허······. 」
윤구가 열일곱 살 때 일이었다.
뭣 모르는 어린아이가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어 던진 말에, 산신령은 갓 담근 김치에 돼지고기 수육을 요구했다.
산신령이 돼지고기 수육에 갓 담근 김치라니?
그것도 수육은 적당히 지방이 섞여 있고, 김치는 젓갈을 너무 많이 쓰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상당히 까다로운 요구사항이 곁들어졌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냥 개꿈이거니 하고 넘겨도 될 일이었고.
‘그래도 신령님이 우리 어매 살려줬는데······’
하지만 순진한 윤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며칠간 꼬박 막일을 해서 번 돈으로 장에 나가 돼지고기를 샀고, 그것을 산신에게 올렸다.
「 허허, 참으로 마음이 곱구나.」
그날, 산신령이 또다시 꿈에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또 심을 봤다.
무려 50년이나 산의 정기를 머금은, 제법 굵직한 산삼이었다.
「 신령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그 삼을 판 돈으로 굶주린 동생들을 든든히 먹일 수 있었다.
이에 윤구는 또다시 산신령에게 음식을 올렸다.
그 후로 평생, 윤윤구는 단 한 번도 보은(?)을 거르지 않았다.
신령님이 삼을 점지해주면, 반드시 먹을 것을 대접할 것.
신령님이 점지해준 삼이나 약초가 아니라도, 귀한 물건을 얻은 날에는 반드시 맛있는 것을 올릴 것.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윤구가 금세 지리산 최고의 심마니가 된 비결이었다.
“스승님, 오늘도 산을 살피고 계십니까?”
그렇게 윤구의 아들인 석우의 눈을 빌어 장인들의 초밥대결을 바라보며 꼴딱꼴딱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토생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허허, 토생원, 일어나셨습니까?”
토생원은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침에는 사랑이와 삼돌이, 흑암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함께 농사를 짓는다.
강의가 있는 날이면 용왕의 헌터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저녁이면 단약을 만든다.
이렇게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스승은 도통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휴······. 강의가 없는 날에도 가만히 있지를 않으시고 매번 산에 사는 생명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으시니, 스승님은 참으로 존경스럽구나.’
하지만 저렇게 무리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탈이 날 텐데······.
“스승님, 이러다 정말 몸 상하십니다.”
“허허, 아닙니다. 산을 보는 일은 아주 즐겁습니다.”
물론, 수다르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산과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여가’였다.
조난당한 사람이 있거나, 다친 사람이 있거나, 특별히 아끼는 사람의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경사가 있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딱히 해 줄 일도 없었다.
신령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도 인간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요즘 말로 하면 ‘워라밸’을 갖춘 삶, 그것이 산신령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허, 조금 난처하군.’
그런 유유자적한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대균열의 수호자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부터 였다.
「 오오, 수다르!」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대균열의 수호자를 만난 날.
조용한 산신령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아기곰과, 세상을 지키겠다며 고군분투하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은, 산신령에게도 퍽 의미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여태 이렇게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역시 즐거웠다.
이제는 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스승님?”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이미지가 잘못 잡혔다는 점이었다.
제자인 토생원도, 갱생 중인 흑암도, 수하도, 고미도, 너무 자신을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뒹굴거리며 TV를 보고 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 이미지랄까.
“자, 그럼 나가 보시지요.”
이에 수다르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대웅전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워라밸 라이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대로 뒀다가는 자신의 소확행인 드라마 시청과 요리 방송 시청도 어려워질지 몰랐다.
토생원이 자꾸만 말을 걸고, 심지어 흑암도 자신을 걱정하는 눈치니, 산에 사는 사람들의 눈을 빌어 TV를 보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흐음······.’
화원 생활을 시작한 뒤로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있으니, 요리 방송이야 조금 미룰 수 있다.
수하네 부모님이 종종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요리가 취미인 흑룡 셰프는 매일 같이 먹을 것을 가져다 나르니까.
하지만 드라마만큼은 본방을 사수하고 싶었다.
적어도 다음 날 오전이나 오후 재방은 보고 싶었다.
일단 한 화를 보면 다음 화가 궁금하고, 그렇게 다음 화를 보면 다음 날이 기다려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일 드라마야 취향이 아니라 괜찮지만,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드라마까지 모두 챙겨보는 드라마 마니아, 수다르로서는 도저히 그 즐거움을 놓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이에 수다르는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멍, 멍멍!”
수다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삼돌이와 사랑이가 꼬리를 휘휘 저으며 달려왔다
“허허, 이리 오십시오.”
수다르는 속으로 어떻게 하면 이 소확행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는 정성껏 조제한 약재와 밭에서 직접 기른 과일들을 섞어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에게 아침밥을 주었다.
“멍! 멍멍!”
“멍멍멍!”
신나게 꼬리를 휘저으며 아침 식사를 하는 강아지들의 모습에, 산신령의 입가에는 인자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도 일찍부터 일어나있군. 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거지?”
흑암의 물음에 수다르는 가벼운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역시나, 흑암도 토생원과 비슷한 반응이다.
요즘들어 유독 더 자신을 챙기는 것 같았다.
사실은 드라마를 보고 싶은 것 뿐인데, 이미지가 단단히 잘못 잡혔다.
‘흐으음······.’
이에 수다르는 가만히 화원을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아!’
그때, 사회생활 만렙 수달의 머릿속에 번득 기가 막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