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8 갓-고미 외전 : 고미, 친구를 만나다.
“나는 곰, 영어로는 베어, 한자로는 웅! 웅웅!”
한 마리 곰이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지하로 내려간다.
“복실복실 털뭉치~♪ 방실방실 엉덩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고미는 노래를 불렀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가슴속에 남은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켜내기 위해.
고미는 알고 있었다.
육신이 살아남으려면 먹을 것이 필요하듯, 영혼이 살아남으려면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고미는 알고 있었다.
본능처럼, 그래야만 살 수 있기에.
아니, 그것을 모르는 생명은 살아있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고미는 목표를 정했다.
친구를 만들자.
“우웅······. 어떻게 해야 친구를 만들 수 있을꼬?”
문제는 방법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과 같은 생명체를 본 적이 없었다.
매일 같이 열리는 게이트나 던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 그것을 몬스터라고 칭하든, 괴수라고 칭하든– 은 대체로 자신과 비슷한 생명체와 함께 다녔다.
행동이 비슷했고, 말이 통하는 듯 했으며, 생김새도 비슷했다.
하지만 수만, 어쩌면 수억에 이를지도 모르는 몬스터를 상대해 봤건만,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난 적은 없었다.
간혹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녀석들도 있기는 했으나, 말도 통하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려고만 들었다.
“우웅······.”
이에 아기곰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이 몸처럼 위대한 존재는 그리 흔치 않은 것’이라고.
“오오!”
무언가를 깨달은 아기곰은 도톰한 젤리가 붙은 손바닥을 탁, 치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렇구나! 괴수굴 안의 괴수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녀석은 언제나 한 명 뿐이지! 생김새도 특별하고······.”
그리고 이 깨달음은 이내 엄청난 결론으로 이어졌다.
“우웃! 그, 그렇다면!”
자신 같은 존재는 여태 본 적이 없다.
즉, 자신은 세상에 하나 뿐인 존재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다.
“그, 그렇구나! 이, 이 몸은 세상에 하나 뿐인 진정한 곰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믿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우, 우웅······.”
비슷한 존재끼리만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자신에게는 영원히 친구가 생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우, 우웃!”
그러나 그 고민도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다.
“그래! 부하, 부하를 만들면 되겠구나! 후후······. 그 녀석들에게 위대한 이 몸의 권능을 가르쳐주고, 맛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친구가 되는 것이지!”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꼭 처음부터 친구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역시 위대한 이 몸은 참으로 총명하구나’라고, 고미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대균열 주위에는 맛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가끔 속세에 나가면 조금이나마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음식을 선물로 주면 되지 않겠는가.
싸움도 가르쳐주고, 맛있는 것도 준다면, 친구가 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것이다.
“후훗, 완벽하구나. 실로 완벽한 계획이다.”
모든 고민을 해결한 아기곰은 또다시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곰, 고옴~♪ 위대한 고옴~♩”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우웅······. 운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어찌하면 조금 더 멋진 노래를 만들 수 있을꼬?”
그렇게 또 외로운 하루가 저물었다.
* * *
고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가족도 없었다.
집도 없었다.
그저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과, 거대한 균열의 앞에 자리한 커다란 공터만이 이 작은 아기곰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었다.
“우웅······. 다섯 번씩 백번이면 오백······. 오백이 다시 백 개에······.”
초콜릿색 털을 가진 아기곰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헤아렸다.
지면에는 작지만 금강석보다 단단한 발톱으로 새긴 표식이 가득했다.
대각선으로 하나를 긋고, 그 위에 다시 네 개의 획을 긋는다.
하나의 표식에 다섯 개.
가끔 헷갈려 네 개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여섯 개가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대충 표식 하나에 다섯 개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 표식이 다시 가로로 백 개, 세로로 백하고 아흔 일곱줄.
셈에 약한 아기곰은 그것이 몇 개인지를 놓고 또다시 며칠 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몇 번을 세보아도, 매번 계산이 달랐다.
어째서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충 만개는 넘겠지.
“우웅······. 만개를 채우면 친구가 생길 줄 알았건만······. 어째서 친구가 생기지 않을꼬?”
표식의 숫자는 이미 만 개를 훌쩍 넘어 있었지만, 여전히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던전 하나, 게이트 하나를 파괴할 때마다 한 줄씩.
그것이 벌써 수만 개가 되었건만, 외로운 아기곰은 여전히 혼자였다.
“으음······. 좋다! 그렇다면 2만 개! 2만 개로 해야겠구나! 위대한 곰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사실 표시한 숫자는 오래 전에 오만을 넘어 십만에 근접했다.
하지만 셈에 약한 아기곰은 목표를 두 배로 늘리는 것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 숫자를 정확히 모르는 편이 아기곰에게는 더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백, 다음에는 오백, 다음에는 천.
그렇게 목표를 늘려가는 와중에 친구는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대신 늘어난 것은 바닥에 남은 표식과, 그 주위에 늘어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철 덩어리들뿐 이었다.
언젠가 친구가 생기면 보여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이 담긴 조각상들이었다.
그 친구가 조각상에 담긴 자신의 위대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 우웃!?”
그리고 정확히 9만 8천 5백 하고도 92개 번째 균열이 나타난 날.
고미의 눈에 생전 처음보는 희한한 생김새의 생물이 보였다.
금색으로 빛나는 몸에, 검은색의 반점.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두 팔과 군데군데 드러난 붉은 살점까지.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히던 도마뱀 놈들과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어딘가 다른 괴상망측한 괴물이었다.
“······, ······!”
“@^%! , @#$*!”
고미의 눈을 사로잡은 기묘한 생김새를 가진 괴물의 뒤로는 가증스러운 도마뱀 놈들이 줄을 지어 쫓아오고 있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십.
“우, 우웃!”
고미는 직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뒤쪽의 도마뱀 무리가 앞쪽의 괴물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즉, 친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여, 역시! 이 몸의 계획은 완벽했구나!”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확신한 아기곰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껏해야 수십 밖에 안 되는 도마뱀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다니, 저 얼룩덜룩한 괴수는 비실이가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을 구해주고, 무공을 가르쳐주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네 이놈들!”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아기곰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깨달은 진리를 곧장 실행에 옮겼다.
- 쾅!
도톰한 솜방망이를 앞으로 내밀자, 거대한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도마뱀 중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감히 여럿이서 한 명을 괴롭히다니, 역시 비겁한 도마뱀다운 행동이구나! 하지만 위대한 이 몸이 있는 한, 절대로 저 녀석을 해칠 수 없다!”
성공이다.
이만하면 아주 멋지고 인상 깊은 등장이다.
게다가 자신의 힘도 보여줬고, 자신이 정의롭고 위대한 진정한 곰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후훗, 이만하면 저 녀석도 이 몸의 친구가 되어주겠지?’
고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도마뱀은 나쁜 놈들이니, 쫓기는 녀석은 틀림없이 착한 녀석일 것이다.
그러니 정의의 편인 자신과 친구가 되어줄 게 분명했다.
“이야아압!”
한 번 더 기합을 내지르며 손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천하제일의 명검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쿠릉, 쿠르릉!
쫓기던 괴물 놈이 갑자기 몸을 돌려 번개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검은 기운이 뒤섞인 뇌전에서는 위대한 곰이 보기에도 제법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 우웃?!’
고미는 덜컥 겁이 났다.
저 괴상하게 생긴 녀석이 생각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권능을 가르쳐주고 친구가 된다는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이익! 만천화웅!”
이에 조급해진 아기곰은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기 위해 더욱 화려한 기술을 사용했다.
- 쿵!
- 콰르르릉!
초콜릿색 솜털이 만들어 낸 폭풍과 괴물이 쏟아낸 번개가 몰아치자, 비겁한 도마뱀놈들은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후후후! 이 악당 놈들! 위대한 이 몸의 힘에 놀라 달아나는 것이냐!”
평소 같으면 쫓아가 혼쭐을 내줬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우, 우웅······.”
친구를 대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아기곰은 짤막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얼룩덜룩한 괴물의 눈치를 살폈다.
막상 도마뱀 놈들을 내쫓고 보니, 이 녀석도 나에게 달려들지는 않을까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때, 검은색과 금색이 뒤섞인 비늘을 가진 괴물이 입을 열었다.
“#*$% ? !#@$ ?”
문제는······.
고미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우, 우웅······.”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키기가 싫었던 고미는 알아듣는 척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괴물은 처음이었다.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녀석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할까 싶은 마음에 외로운 아기곰의 마음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적이 일어났다.
“대균열의 수호자가 정말로 이렇게 작은 아기곰일 줄이야. 실로 놀랍군.”
“우, 우웃!? 네, 네 녀석! 말을 할 줄 아는 것이냐!?”
말을 할 줄 안다.
심지어 자신과 같은 말을 한다.
이 기적과도 같은 일에 아기곰의 눈에는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숱한 괴수들을 물리치며 홀로 오랜 세월 대균열을 지켜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이럴 수가······. 이 몸에게도 드디어 친구가 생긴 것이냐?”
완벽한 계획은 어느새 머리에서 잊혀지고,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다.
맛있는 것을 주고, 권능을 가르치는 단계를 모두 건너뛰고, 고미는 곧바로 상대를 친구라고 불렀다.
“친구라니,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종을 넘어,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외로운 존재는 서로를 알아보는 것일까?
얼룩덜룩한 괴물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괴상망측한 생김새 때문에 동족들에게도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이형의 드래곤에게 있어, 친구라는 단어는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고미는 눈앞의 괴물이 드래곤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지만.
* * *
그렇게 외로운 존재 둘이 만나 친구가 된지 며칠이 지난 후······.
“우, 우웃!? 네, 네 녀석도 도마뱀이란 말이더냐!?”
고미는 또다시 한가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도마뱀에게 쫓기던 녀석이 사실은 도마뱀이었다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허, 역시, 도마뱀과는 친구가 되실 수 없는 것입니까?”
이미 ‘금동이’라는 멋진 이름까지 붙여주었건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같이 지내보니 이 괴상한 생김새를 가진 도마뱀은 제법 마음씨도 착하고 말도 잘 통했다.
심지어 목숨을 구해준 대가라며 멋진 집까지 지어주었다.
기와와 문고리에 위대한 곰의 앞발이 새겨진, 아주 웅장한 저택이었다.
“아니다! 네 녀석은 다른 도마뱀들과는 다르다! 시, 신의를 알고, 마, 말도 통하는 데다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는 아기곰의 말에, 이형의 드래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수백 년 만에 지어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고미님,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고미님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아주 멋진 친구들이, 그것도 아주 많이 생길 것 입니다.”
“우, 우웃! 정말이더냐?”
“정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생김새도, 종족도, 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마음입니다.”
사실 고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왠지 모르게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우웅······. 알 것 같구나!”
“허허, 아시겠습니까?”
“그렇다! 아주 확실히 이해했느니라!”
“그럼 저와 술래잡기라도 해보시겠습니까?”
“오오! 술래잡기라, 그것이 무엇이냐?”
이후 둘은 몇 달간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동이가 말없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흑, 동이, 동이이······.”
친구를 잃은 아기곰은 꼬박 며칠을 밤을 새워 울었다.
“흑, 아니다. 동이는 이 몸을 버린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눈물마저 마른 어느 날, 고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동이는 신의를 아는 녀석이다, 그러니 말없이 떠난 것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터였다.
먼저 동이를 원망하는 것은,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다.
그러니 다시 만날 때까지 동이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동이를 다시 만나는 날에는, 새로 사귄 친구들을 마음껏 자랑할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종족이 달라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테니까.
그날이 오면, 동이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잔뜩 자랑할 것이다.
* * *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 어느 날······.
“살곰살곰~♪ 다가갈 거야아아~♩”
“아저씨,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우, 우웃!”
아기곰의 앞에, 새로운 친구가 되어줄 녀석이 나타났다.
“마음, 마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하였지!”
외로운 아기곰은 자신의 친구가 해준 말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가벼이 발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이라면 반드시 친구가 되어줄 거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