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1 최후의 싸움(9) : 마지막 숲속 친구, 합류!
‘응?’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어느새 봉식이와 이강혁 씨를 비롯한 숲속 친구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있었다.
“거짓말! 이, 이 교활한 도마뱀 놈! 거짓말이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꾀죄죄한 꼴로 달려온 봉식이의 품 안에는 가짜 고미가 눈물을 흘리며 바둥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가짜 고미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채 여기까지 왔네······.’
시킨 사람이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게 가능은 한 거구나.
저렇게 작아졌어도 A급 이상은 될 텐데······.
과연 민봉식은 민봉식이다.
“사, 사악한 악당들에게 맞서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째서, 어째서!”
고미와 똑 닮은 흑곰은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의 군주의 반응은, 실로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무슨 소리냐?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세상을 어지럽히는 놈들을 없애고,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 말 어디에 거짓이 있더냐?”
이 자식 이거, 진짜 악질이네······.
드래곤 로드라는 놈이 악랄한 사기꾼들이 나 할법한 변명을 하고 있어.
“쯧, 본체가 아둔해서 그런지, 저 녀석을 본따 가짜 만든 놈도 멍청하기 짝이 없더구나. 뭐, 덕분에 일은 수월해졌지만 말이야.”
이어지는 황금의 말에, 울먹이며 발버둥치던 아기 흑곰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버렸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이 몸은 진정한 곰이다······. 세상에 하나 뿐인······.”
“하등 생물답게,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구나. 바닥에 누워있는 저 호랑이 놈이 말해주지 않았더냐, 너는 가짜라고.”
황금의 군주가 눈부신 금빛으로 빛나는 손가락을 들어 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닥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거대한 호랑이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아기곰 삼형제에게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죽지는 않았는데······.’
타버린 것은 만수왕의 시신 뿐이 아니었다.
고미가 흑곰덫을 펼쳤던 곳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모조리 잿빛 먼지로 변해 있었다.
드문드문 자라나 있던 작은 풀들도, 돌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그곳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용족의 금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뭐, 됐다. 그래도 미끼 역할 정도는 해냈으니, 가짜치고는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
오만한 골드 드래곤은 그렇게 말하며 가짜 고미를 내려다 보았다.
“네가 원한다면, 목숨 정도는 살려주마. 덕분에 고미와 저 일족의 수치인 기형아 놈을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가짜 고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봉식이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 이 나쁜 놈! 누가 네 놈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할 것 같더냐! 덤벼라! 덤비란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 그것은 상대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행위로 보였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넘어, 존재마저 부정 당한 상황.
저 녀석의 정신 세계가 원조 아기곰과 비슷하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겠지.
고미가 나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오랜 세월 동안 숱한 괴로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자신이 정의롭고 위대한, 진정한 곰이라는 믿음 덕분이었으니까.
“아, 아웅!”
“다웅!”
그 순간, 아웅이와 다웅이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황금의 군주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녀석들도 저 악마같은 드래곤의 악행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우······. 이 비겁한 악당 놈! 아웅이, 다웅이, 동이! 가자! 저 녀석을 혼내 주자꾸나!”
형제들에 이어, 원조 아기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황금의 군주는 고미의 꿀주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저런 교활한 녀석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승리를 확신했을 때 뿐이니까.
“쯧, 아둔한 놈. 내가 왜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지금 너희들의 상태로 나와 내 친위대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악랄한 드래곤 로드가 금술로 인해 폐허가 된 전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대지 위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몬스터들은 그 사이 거의 다 정리가 된 상태였다.
뭐, 그중 절반 가까이는 우리가 아니라 황금의 군주 본인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숫자가 숫자다 보니, 그 나머지 절반을 정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 괜찮겠어요? ]
[ 사숙조,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 아직은 버틸만 합니다. ]
[ 걱정 마라, 이제 겨우 몸이 풀린 참이니까. ]
나의 질문에 숲속 친구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들 역시 황금의 군주에 나만큼이나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몬스터 떼와 한바탕 혈전을 치르고, 방금 전까지 번개와 불꽃을 뚫고 금술을 파괴하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다 왔으니, 멀쩡한 게 이상한 거지.
아기곰 삼형제 역시 상태가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다친 곳은 없지만, 방금 전 그 금술을 막아내느라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으니까.
“사족이 길었구나. 그럼 이제 그만 죽거라.”
말을 마친 황금의 군주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허공에 물결 같은 파문이 일며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후우······.’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를 끌어올렸다.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에 나는 망설임없이 아껴왔던 마력을 단번에 쏟아부었다.
< 나눠먹기(Gomi)를 사용합니다. >
< 대상 : 봉식이, 허수아비, 작은 금동이, 금동이, 삼룡 어멈, 작은 살쾡이, 뱀눈이······. >
“자, 가자!”
숲속 친구들이 특제 청심환을 집어삼키자, 황금의 군주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악몽, 언제까지 음침하게 숨어있을 생각이냐. 설마 나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는 건 아니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중충한 하늘에 흰자 없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 하나가 솟아났다.
“시끄럽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 기계처럼 기복 없는 말투.
그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저게 악몽의 지배자인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최종 보스다운 냄새가 풀풀 풍긴다.
‘그런데 왜 모습을 안 드러내지?’
한 가지 의문은, 녀석이 이런 상황에서도 직접 전장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게다가 황금의 군주는 상대의 그런 태도에 큰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고미에게 당한 부상이 아직도 치료되지 않았다던가?’
고미의 말에 따르면, 녀석은 지난 번 싸움에서 자신에게 큰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물론 고미 역시 이빨과 손톱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 크르르르!
- 크르릉!
이윽고 땅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하나둘 일어나 주위에 있던 몬스터들의 사체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일어난 것은 대부분 S급의 몬스터들.
게다가 그림자가 들러붙으며 생전보다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 크어어엉!
만수왕이 부활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더욱 강해져서.
“고미님!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고미 님은 만수왕을!”
동이님이 커다란 날개를 펼쳐 황금의 군주를 향해 돌진하며 외쳤다.
“알겠다! 죽지 말거라!”
이어서 아기곰 삼형제가 되살아난 만수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이님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듯, 조금의 걱정도 없는 모습이었다.
“백천, 한유진 씨, 알틴! 드래곤은 우리가 맡아야 해!”
< 허곰답보(S)를 사용합니다. >
나 역시 곧바로 참숯 1호를 빼든 채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봉식아! 이강혁 씨! 신 팀장님, 지상을 맡아줘요!”
지상조와 공중조를 나눈 나는 곧바로 웅톡방을 활용해 다음 지시를 내렸다.
아직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숲속 친구들은 흑암과 노인국 씨, 제르보나와 이유찬 씨였다.
흑암 콤비와 두 드래곤은 용귀와 전송진을 지키기 위해 베이스 캠프 근처에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의 상황은, 그들의 도움없이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가 없었다.
[ 고미! 친구들을 소환해! ]
[ 우웃,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인간들은······. ]
[ 걱정 마십시오, 고미님! 이곳은 이미 확실히 승기를 잡았습니다! ]
그때, 고북 대왕의 힘찬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 알겠다! ]
< 숲속 친구들, 모여라 (Gomi)를 발동합니다. >
< 소환 대상 : 두더지, 고북 대왕, 문어 할아범, 검은콩, 딸기, 수다르. >
- 펑!
상태창에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 안에서 숲속 친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미, 드디어 너에게 은혜를 갚을 때가 왔구나!”
전장에 합류한 흑암은 곧바로 드래곤 로드의 친위대와 S급 몬스터들을 향해 검은 안개를 뿌려대며 이강혁 씨와 봉식이를 돕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저 갑옷은 뭐지?’
지금 흑암의 몸에는 고미와 일전을 치를 때 두르고 있던 망자의 갑옷과 비슷한 것이 걸쳐져 있었다.
크기는 조금 더 작지만, 그때처럼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검은 색을 띠고 있음에도 어딘가 맑고 청아한 기운마저 흘렀다.
“우, 우웃! 흑암! 설마······.”
이에 고미는 흑암이 적들의 시체로 갑옷을 만든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니다, 고미! 이것은 인간들이 나누어준 마력으로 만든 갑옷이다!”
“뭐, 뭣이!?”
“그들의 힘으로는 이 괴물들과 맞설 수 없지만, 너를 돕기 위해 나에게 마력을 나누어주었단 말이다!”
흑암의 말을 듣는 순간, ‘웅비어천가’의 게이지가 눈에 띄게 치솟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서 흑암의 마력으로 만들어 낸 작은 벌레들이 무언가를 들고 우리에게 날아왔다.
벌레들의 손에는 수다르 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특제 단약이 들려있었다.
한번 밖에 쓸 수 없기는 하지만, 체력과 마력을 거의 완벽하게 회복시켜주고, 일시적인 버프 효과까지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황금의 군주와 악몽의 지배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우리도 이걸 사용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지.
[ 저는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 있는 드래곤의 등을 밟고 더욱 높이 뛰어올랐다.
“비웅참!”
눈부신 화염 검기로 드래곤의 날개를 베어버린 나는 다시 한 번 도약해 다음 드래곤을 베어나갔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을 통해, 보통의 드래곤과는 차원이 다른 피부의 강도를 느낄 수 있었다.
‘강해졌어.’
하지만 환곰탈태를 한 나는 드래곤 로드의 친위대를 상대로도 어렵지 않게 전투를 치를 수 있을만큼 강해져 있었다.
“크하하하! 죽어라!”
한편, 나의 건너편에서는 기력을 회복한 천마가 분풀이를 하듯 드래곤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나를 구하려다 당한 거지만, 만수왕에게 망신(?)을 당한 게 상당히 분했던 모양이다.
“웅혼참!”
지상에서는 이강혁 씨의 목소리가 울렸고,
“갓-고미 펀치!”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는 명실상부한 초월자급이 되어버린 살육전차가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력곰강장!”
가짜 고미는 어느새 숲속 친구들과 함께 악당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 이, 나쁜 놈들!”
덩치는 작아졌고, 힘은 다웅이는커녕 아웅이만도 못하다.
하지만 녀석은 솜방망이를 바르쥔 채 열심히 전장을 오가며 악몽의 수하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웅조수!”
드래곤 한 마리를 잡을 때도 허덕였다던 예전의 고미가, 저런 모습이었을까?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는 있지만, 여전히 아군도 적군도 아닌 상태로 외롭게 싸우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황금의 군주······!’
나는 이를 악문 채 저 멀리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동이님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거대한 황금색의 드래곤을 바라봤다.
‘저 자식만큼은 절대 용서 못해.’
불쌍한 아기곰을 등쳐먹고도 태연자약하게 비웃는 놈.
고미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믿고 싸우는 병사들을 눈 하나 깜빡 않고 제물로 삼는 놈.
저놈한테는······. 반드시 한 방 먹여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야! 이 도마뱀 새끼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 순간, 몸에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기운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