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8 최후의 싸움(6) : 호불호(虎不好)에는 이유가 있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푸른 빛이 폭발하는 찰나,
“우, 우우욱!”
가짜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공격이 먹힌 게 분명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달라붙은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이 녀석의 눈과 속도, 힘이라면, 가만히 서서 빔을 맞아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힘으로는 망자의 갑옷을 한 방에 날릴 정도의 빔을 몇 번이나 쏠 수 없었다.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상황을 만든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아, 그 한 방에 모든 걸 쏟아붓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이 녀석 가까이에 붙어 빔을 날려야 했다.
결과는······.
- 펑!
성공이었다.
빔에 맞는 순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숯불의 불씨가 살아났다.
이어서 놈의 몸이 빠르게 불타기 시작했다.
족히 십 미터는 되어 보이던 녀석의 몸이, 푸른 빛과 화염에 휩싸여 빠르게 줄어들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 이겼어······.’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과 함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웅황 청심환의 반동이 찾아온 것이다.
‘으, 으으······.’
사지가 덜덜 떨리고, 더 이상 공중에 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 퀘스트를 완료 했습니다. >
< 달성 조건 >
1. 가짜 고미를 물리칠 것. (완)
2. 만수왕을 물리칠 것.
3. 드래곤 로드를 물리칠 것.
4. 악당들의 우두머리인 ???를 물리칠 것.
관리자가 나의 승리를 인증해 주었다.
바로 그때,
[ 사숙조! ]
[ 수하! ]
[ 김수하! ]
무신과 고미, 봉식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 쿠릉, 쿠르릉!
고개를 들어보자, 머리 위에 엄청난 크기의 뇌운(雷雲)이 몰려들어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어느 틈에?’
아니, 그보다······. 피할 방법이 없다.
해피 곰 포인트는 이미 바닥났고, 청심환도 없다.
한 방에 승부를 보기 위해 온몸의 기를 쥐어짜낸 탓에, 허곰답보를 펼치는 것도 버거운 상태.
‘두 번, 아니, 세 번인가?’
- 쾅!
다음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황금색의 전광이 떨어졌다.
‘주, 죽는다.’
< 허곰답보(S)를 활성화합니다. >
마지막 힘을 다해 경곰술을 펼치자,
- 콰르르릉!
섬뜩한 빛줄기가 방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어서 또 한 번,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 사숙조! ]
- 쾅!
하지만 이번에도 번개는 나를 죽이지 못했다.
[ 우, 우웃! 잘했다, 작은 살쾡이! ]
번개는 내가 아니라, 천마가 뿜어낸 검기와 맞부딪혀 사라졌으니까.
“감히 나를 상대하며 한 눈을 팔아!?”
“컥!”
그러나 나를 살린 대가로, 백천은 만수왕의 발톱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크하하하! 버러지 같은 인간 놈! 이게 분수를 모르고 나에게 대항한 대가다!”
“배, 백천!”
나는 온 힘을 다해 뇌운의 범위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쥐어짜 경곰술을 펼쳐보아도, 여전히 거대한 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 으아아아아! 네 이놈들! 감히 수하와 작은 살쾡이를! ]
[ 다우우우우웅! ]
[ 아우우우우웅! ]
그 순간, 용궁에서 세 개의 작은 빛 덩어리가 날아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려 가짜 고미가 추락한 곳을 확인했다.
‘자, 잠깐······!’
가짜 고미는······. 아직 죽지 않았다.
크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어 원조 아기곰과 비슷한 사이즈가 되었지만, 틀림없이 살아있었다.
[ 고미! 안······. ]
- 콰르릉!
“으아아아악!”
고미를 말리기 위해 잠시 발을 멈춘 대가는······.
나의 목숨이었다.
[ 수하! ]
[ 김수하! ]
[ 사, 사숙······. ]
[ 수하씨! ]
친구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그리고, 천천히 사라져간다.
‘그, 그래도 가짜 고미는 물리친 건가.’
어찌됐든 관리자가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띄워줬으니, 이걸로 충분하다는 의미겠지?
부디 그래야 할 텐데······.
‘고, 고미······. 뒤를 부탁할게.’
아기곰 삼형제가 있으니, 이 전쟁은 승리로 끝날 거다. 틀림없이.
‘백천, 미안해.’
나만 아니면 다칠 일도 없었는데······. 괜찮아, 고미라면 백천이 죽기 전에 만수왕을 막을 수 있을 거야.
부상을 입었다고는 해도 명색이 천마인데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테고······.
‘그래도 다행이다, 고미도 있고, 아웅이 다웅이, 봉식이도 있으니까······.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나는 죽지만, 넷이나 되는 아들들이 있으니까, 부모님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숲속 친구들도 모두 무사해야 할 텐데······.
그런데, 독백이 왜 이렇게 길어.
이게 주마등인가.
‘아니, 주마등치고도 지나치게 긴 것 같은데.’
나는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가 지나가질 않네.’
그럼 주마등이 아닌 건가?
생각해보니 번개에 맞은 순간에는 무지하게 뜨거웠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설마 벌써 현세의 나는 불타서 재가 되어 버린 건가?
이걸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게 증명······.
- 콰릉!
이상하다.
번개가 한 번 더 내리친 것 같은데.
왜 아무렇지 않지?
< 곰강불괴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SSS -> Ex >
< 한계를 넘은 데미지의 축적으로 인해 체질이 변화합니다. >
‘응?’
설마, 나 지금 죽은 게 아니라······. 환곰탈태 중이냐?
“으아아아! 이 개새끼들아!”
그 순간, 수백 미터는 떨어진 곳에 있던 봉식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터져 나왔고,
- 펑!
녀석의 몸을 뒤덮은 금광이 거대한 빛의 기둥으로 변해 하늘을 꿰뚫었다.
‘자, 잠깐!’
- 크릉!
이어서 사자의 울음소리가 거대한 파형으로 변해 전방을 휩쓸었다.
‘아, 아니······.’
이거······. 나 살아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상황이냐?
애가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무사하다고 말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같은 편을 해치지는 않는 걸로 봐서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건 아닌 것도 같고······.
- 쾅!
봉식이의 주먹 한 방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몬스터 무리에 휑하니 구멍이 뚫렸다.
‘저 정도면 거의 초월자급인 것 같은데······.’
그냥······. 죽은 척하고 있자.
‘미안하다, 민봉식.’
분위기상 지금 나서면 굉장히 뻘쭘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저 변신(?)이 풀리면, 또다시 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이나 해볼까?’
이에 나는 웅톡방을 이용해 수다르 님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 수다르님. ]
[ 수, 수하님! 사, 살아 계셨던 것 입니까? ]
언제나 따뜻한 온기가 묻어나오던 산신령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잔뜩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내가 죽은 줄 알고 오열이라도 하신 모양이다.
[ 네, 그보다······. ]
[ 흑, 이 늙은이는 수하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어쨌든, 봉식님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 와중에도 눈치는 귀신이시네.
[ 감사합니다. 그럼 이대로 놔둬도 될까요? ]
[ 으음······. 수하님이 살아계신다는 걸 알면 적들이 또다시 수하 님을 노릴테니, 잠시 몸을 숨기고 계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
그것도 그렇군.
체질이 변하고 방어력이 올랐을 뿐이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으니까.
자칫하면 나를 구한답시고 무리하게 적진을 돌파하다가 사상자만 나올 거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잠깐 숨어 있을게요. ]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남은 해피곰 포인트를 모두 쏟아부어 살곰살곰을 사용했다.
< 해피곰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잔여 : 11 >
< 살곰살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 -> S >
살곰살곰은 단순한 은신술이라 그런지, S급까지 상승시키는데도 500 포인트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S급으로는 조금 불안하지만, 전쟁이 한창이고, 아기곰 삼형제가 전장에 투입된 마당에 내가 살아있다는 걸 눈치채기는 쉽지 않겠지.
‘그나저나, 나한테 번개를 쏜 건······. 역시 황금의 군주겠지?’
크기로 보나, 파괴력으로 보나, 알틴이나 한유진 씨보다도 강력한 뇌전 마법.
아마도 이런 걸 쓸 수 있는 건 현(現) 드래곤 로드뿐일 테니까.
- 쿠릉, 쿠르릉······.
그때, 또다시 옅은 뇌성이 울리며 머리 위의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아기곰 삼형제가 있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로드께서 내가 죽은 줄 아시나 보다.
뭐,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다우우우웅!”
한편, 어느새 전장으로 날아온 다웅이는 새카만 죽창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적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다웅! 다우우웅!” (형아, 내가 이놈들을 맡고 있을게! 어서 가서 친구들을 구해줘!)
적진 한가운데 떨어진 아기 판다가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는 자세로 창끝을 들어 만수왕을 가리키자,
“알겠다, 다웅이! 이 몸이 반드시 작은 살쾡이를 구하고, 수하를 죽인 놈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
원조 아기곰이 눈부신 황금빛을 뿌리며 만수왕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네 이놈! 감히, 감히 이 몸의 가족을!”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 쾅! 콰광!
원조 아기곰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위의 몬스터들은 폭풍에 휘말린 먼지처럼 힘없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으, 으아아. 저게 뭐냐.’
대충 저 슈퍼 아기곰이 투입되면 전세가 뒤집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숫자가 의미가 없을 줄은 몰랐다.
다웅이, 고미와 더불어, 좀처럼 힘을 쓰는 일이 없었던 아웅이 역시 전투에 참여한 상태였다.
“아우우우웅!”
통통한 아기 백곰이 힘차게 손을 휘두르자, 새하얀 얼음 폭풍이 주위를 휩쓸며 삽시간에 몬스터들을 얼려버렸고,
“다웅! 다웅, 다웅다웅!”
다웅이의 죽창이 기다렸다는 듯 얼어붙은 몬스터들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괴, 굉장하다!”
“승산이 있어!”
“밀어붙여라!”
“수하님의 복수를!”
“수하님의 원한을 갚아라!”
“고미님을 도와라!”
“가자! 돌격!”
······.
여러분,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 수하씨······. 제가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겠습니다. ]
심지어 이강혁 씨는 목숨까지 거신단다.
‘으아아! 진짜 왜 이러냐!’
이러면 제가 살아있다고 알리기가 너무 어려워지잖아요.
‘나 이러다 은거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전장에 홀로 버려진 채 거짓말의 무게(?)를 깨닫고 있을 때, 고미의 머리 위로 이동한 거대한 뇌운에서 또 한차례 번개가 내리쳤다.
“흥! 가소로운 놈들! 이 따위 번개로 위대한 이 몸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러나 분노한 아기곰은 계속해서 내리치는 번개를 그대로 얻어맞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달아 내리꽂히는 번개는 고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주위에 있던 애꿎은 몬스터들을 모조리 재로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나에게는 적이지만, 저 녀석들에게는 아군이다.
그런데 아군이 있든 말든 그 위로 번개를 떨어뜨리다니······. 어떻게 저 따위 행동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황금의 군주와 만수왕의 잔인함에 까닭 모를 분노를 느끼고 있을 때······.
또 한가지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 크르륵! 크륵!
- 크릉!
피아를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황금색 번개에 겁먹은 몬스터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짜 고미를 계속해서 짓밟으며 달아나고 있었다.
전장에 있는 누구도, 가짜 고미를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비밀 병기 아니었어? 취급이 왜 이런 건데?’
악당들 사이에 진한 우정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그래도 너희들을 위해서 싸운 건데, 한 명 정도는 슬퍼하고, 한 명 정도는 분노해 줄 수 있잖아.
나는 홀린 듯이 전장에 버려져 있는 가짜 고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외롭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작은 흑곰의 모습이, 자꾸만 고미를 떠오르게 했다.
“비, 빌어먹을!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왜 그놈은 나타나지 않는 거냐!”
그때, 잔뜩 겁에 질린 만수왕의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고, 고미! 이, 이 빌어먹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황금색 아기곰을 발견한 만수왕이 은회색 털을 잔뜩 곤두세우며 비틀거리는 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 잠깐 설마······.’
외눈박이 은회색 범의 몸짓과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놈의 손에는, 어느새 피투성이가 된 백천이 붙들려 있었다.
“고미! 저, 저리 꺼져라! 더, 더 이상 다가오면 네 친구 놈을 죽여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