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6 최후의 싸움(4) : 승부수.
머릿수로 치자면, 숲속 친구들과 웅왕의 헌터, 용궁 식구들에 드라고니아의 반란군까지 모두 합쳐도 승산이 없었다.
흑암과 노인국 씨, 블랙 메이지의 네크로맨서들이 부족한 머릿수를 채워준다 해도, 그들의 마력이 무한한 건 아니니까.
결국 이 전쟁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용궁 안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출격을 기다리고 있는 슈퍼 아기곰 삼형제였다.
아기곰 삼형제라면, 이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뒤집고도 남으니까.
그리고 슈퍼 아기곰 삼형제가 출격하려면, 먼저 가짜 고미를 끌어내 처리해야 했다.
[ 우웃! 고북! 굉장하구나! 그래, 어서 진격하거라! 저 악당 놈들을 혼쭐내주는 것이다! 이 몸을 대신해 친구들을 지켜다오! ]
전장을 지켜보는 아기곰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안도감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 녀석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흥분과 안도감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수하님! 어서 불을 지펴주십시오! 저는 부상자들을 돌보겠습니다! ]
수다르 님이 부상자들을 향해 달려가며 외친 말에 안도감은 초조함으로 변했고,
[ 수, 수하. 정말로 그것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냐? ]
[ 이미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어쩔 수 없어. ]
[ 우, 우웅. 아, 알고 있느니라······. 하, 하지만······. ]
[ 다, 다웅······. ]
[ 아, 아웅······. ]
원조 아기곰에 이어 아기 판다와 아기 백곰의 서글픈(?) 목소리가 웅톡방에 울려퍼졌다.
< 곰기(Ex)가 활성화 됩니다. >
< 식지 않는 열정(Ex)이 활성화됩니다. >
화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거대한 화로에 불을 지피자, 웅톡방이 아기곰 삼형제가 내쉬는 슬픈(?) 한숨 소리로 가득 찼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이 작전에 동의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싶었다.
[ 수, 수하. 불을······. 불을 더욱 세게 지피거라! 흑······. ]
정의로운 먹보, 아기곰 선생은 결국 훌쩍이면서도 화력을 올릴 것을 명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구들을 아끼는 마음이 더 큰 거지.
“정비해! 경상자는 단약과 포션으로 회복해라!”
“중상자들은 토생원과 수다르님에게 보내!”
“망령 부대가 전멸 했습니다! 이제 저희들만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도 전장에서는 끊임없이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은 용궁의 전사들이 선전해주고 있지만, 저 대량의 물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전선이 밀리기 시작할 거다.
‘그때까지 가짜 고미를 불러내야 해.’
그리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안에 가짜 고미를 불러내야 했다.
저 ‘특제 꿀’이 담긴 거대한 화로를 이용해서.
- 타닥, 타닥······.
숨겨진 맛을 끌어내는 것을 넘어 없던 맛도 만들어내는 흑룡 셰프의 불꽃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린다.
일찍이 맛본 적 없는 단맛의 신세계를 열어줄 환상적인 불맛.
토생원의 연금술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궁극의 꿀.
거기에 동이님과 토생원, 용왕의 제작자들이 모두 달라붙어 만든 특제 대형화로까지.
이 화로를 만들기 위해 수다르님은 산신령의 항아리 중 대부분을 희생했다.
‘절대로 버틸 수 없어.’
그 가짜 놈이 고미의 분신인 이상, 절대로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으응?”
“아, 아아아······.”
[ 우, 우우웃······. ]
- 키에에에?
- 크르륵?
재료의 향기와 맛을 극한까지 끌어내 주는 특제 화로가 만들어내는 아찔한 향기에, 웅왕 연맹의 헌터들과 아기곰은 물론이고 적군의 몬스터들까지 코를 킁킁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자, 장난 아니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단내.
초콜릿 바다, 아니, 꿀 바다에 빠져 헤엄을 친다 해도 이런 냄새가 나지는 않을 거다.
‘이, 이럴 수가······. 싸움이 멈췄어.’
게다가 특제 꿀 특유의 신비하고 은은한 꽃향기가 더해지니, 고작 몇 초에 불과하지만, 전장에 있던 모두가 잠시 손을 멈추고 말았다.
- 크, 크르르륵!
심지어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가 이성을 잃고 화로를 향해 달려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틀림없어, 이거면 돼.’
단맛에 관심이 없는 걸 넘어 조금 싫어하기까지 하는 나마저 침을 삼키게 만드는 압도적인 향기.
확신이 선다.
가짜 고미는 제 발로 걸어 나올 거다.
“우, 우우우웃! 무, 무엇이냐! 이, 이 냄새는!”
바로 그때,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헌터라면 결코 들을 수 없는, 까마득한 거리에서 울린 소리였다.
“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걸렸어!’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째서 저 악당 놈들이 친구들을 해치는데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냐!”
뭐라고······?
“놔두거라! 당장 저 괘씸한 놈들을 해치우고 저 맛있는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가져올 것이다!”
잠깐······. 우리가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수, 수하! 저 고얀 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것이냐! ]
머릿속에 울리는 고미의 낭랑한 목소리가, 내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님을 증명했다.
“놓거라! 누구도 이 몸을 막을 수 없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허공 위로 솟구쳤다.
“이 웅졸한 놈들!”
하지만 지금은 잡생각을 할 틈도, 망설일 틈도 없었다.
내가 저 녀석을 막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고미의 힘을 흡수한 이 가짜가 세상을 멸망시키겠지.
[ 백천! 가자! ]
< 허곰답보(S)를 활성화합니다. >
이에 나는 참숯 1호로 영지버섯에 불을 붙이며 곧장 하늘 위로 솟구쳤다.
“크하하하! 드디어 왔구나! 자, 이것부터 받아 보거라!”
그 순간, 하늘 위에 거대한 한 자루의 검영이 솟아났다.
‘이, 이런 미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천마는 가짜 고미를 상대하기 위해 드래곤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본좌의 일격을 받아 보거라!”
저스티스의 빌딩 앞에서 사용했던 검초.
그때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끝 모를 내공과 모든 것을 베고 가르는 무궁무진한 살기가 담긴 일검.
천지의 기운과 법칙마저 자신의 검의에 융합시키고 지배해 만들어 낸 궁극의 일격.
심지어 고미에게 사용했던 것보다 더 강해져 있다.
“흥! 비겁한 놈들! 어디서 또 너희들처럼 웅졸한 악당놈을 데리고 왔구나!”
천마의 일검을 본 가짜 고미는 곧장 거대한 앞발을 내밀었다.
“대력곰강장!”
- 쿠궁······.
거대한 검의 환영과 젤리가 맞부딪히는 순간, 하늘을 뒤덮는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대지마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미치겠네.’
Ex급이고 나발이고, 진짜 내가 저걸 잡을 수 있긴 한 거냐.
‘단숨에 끝낸다.’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 웅황 청심환을 흡수합니다. 전신의 기혈이 폭주합니다. >
“크으으으으······.”
고미의 진기가 담긴 ‘웅왕’ 청심환의 업그레이드 버전.
궁극의 청심환.
‘웅황’ 청심환.
Ex급에 달한 웅신입기혈이 있어야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청심환이었다.
그리고 이걸 먹는 순간, 내 몸에 있는 기운과 슈퍼 아기곰의 기를 완전히 융합해 잠시나마 천마를 상회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우웅? 너, 너는 그때 보았던 그 모리배 놈이 아니더냐!”
그제야 나를 발견한 가짜 녀석은 놀란 듯 두 눈을 치켜뜨며 잠시 발을 멈춰섰다.
“그래, 이 고얀 놈! 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구나!”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덤벼라.
“비웅참!”
온 힘을 다해 참숯 1호를 휘두르자, 전에 없이 밝은 화염 검기가 대기를 불태우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우, 우웃!?”
눈부신 황금빛과 칠흑 같은 흑색, 지옥의 그것처럼 섬뜩한 붉은 빛이 뒤섞인 화염.
감히 장담컨대, 원조 아기곰이라 해도 놀랄 위력이었다.
[ 수, 수하! 훌륭하다! 훌륭해! 너는 이제 진정한 곰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
거봐라, 놀라잖아.
“건방진 녀석! 감히 비웅참이라는 멋진 이름을 쓰다니! 사악한 모리배 주제에!”
······.
얘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놀라네.
“불도장!”
- 콰앙!
가짜 고미의 화염과 비웅참이 맞부딪히자, 새파란 하늘 위에 시뻘건 화염의 바다가 펼쳐졌다.
하지만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불꽃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의 곰강불괴는 이미 SSS급, 드래곤 스케일도 SS급에 이르러 있었다.
곰기와 웅신입기혈, 검의 달인을 제외하면 모든 스킬 포인트를 드래곤 스케일에 때려 박았으니까.
‘이 정도 화염은 불가마만도 못하다고.’
이후 천마와 나는 계속해서 가짜 고미를 향해 검격을 날려댔고,
“대력곰강장!”
“탄지곰!”
“일지곰!”
가짜 고미 역시 모든 초식을 동원해 그것을 막아냈다.
그렇게 멀리서 공격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니, 녀석과 우리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감히 이 몸에게 직접 맞서려 하는 것이냐!”
마침내 손이 닿을 거리가 되자, 가짜 고미는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검은 젤리를 휘둘렀다.
“영웅유운!”
이에 나는 곧장 영웅검법의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그 기세를 이어 반격하는 초식.
“우웃!?”
- 쩡!
검격이 녀석의 팔뚝에 적중하자, 강철을 후려친 것 같은 감각이 손을 전해졌다.
‘말도 안돼.’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
방심을 유도해 불의의 일격을 가했던 그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수, 수하! 조심해라! ]
“가, 감히 영웅(英熊)이라니! 진정한 곰은 이 세상에 오직 이 몸 하나뿐이란 말이다!”
그때, 또다시 이상한 지점에서 분노를 느낀 가짜의 몸에서 수십 개에 달하는 털이 뽑혀져 나왔다.
‘만천화웅.’
상대의 공격을 먼저 읽어낸 나는 잽싸게 퇴보를 밟으며 초식을 펼쳤다.
“영웅란로!”
“만천화웅!”
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굵기, 강도, 그리고 날카로움까지.
가짜의 털은 그 하나 하나가 천하제일의 명검이었고, 녀석이 펼치는 만천화웅은 그 명검이 만들어내는 검의 폭풍이었다.
- 쩌저저정!
하지만 고미가 직접 만들어준 검술은, 그것을 모두 막아냈다.
애초에 만천화웅을 막아내기 위해 만든 초식이니까.
[ 우, 우웃! 수하! ]
[ 다, 다웅! ]
[ 아우우웅! ]
그물처럼 촘촘하게 펼쳐진 검망이 검은 칼날들을 모조리 쳐내자, 아기곰 삼형제의 힘찬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역시, 버텨 주는구나.’
게다가 무기 강화권을 사용해 Gomi급 무기가 된 참숯 1호는, 가짜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할 수 있어.’
이 정도면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 녀석은······.
내 검에 한번 ‘맞았으니까’
< 식지 않는 열정(Ex)이 활성화됩니다. >
- 화륵!
“우, 우웅!?”
갑자기 팔 위에서 솟구친 화염에, 녀석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 이 모리배 녀석! 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건 절대 안 꺼질 거야. 아무리 위대한 곰이라도 그건 안돼. 하물며 너 같은 가짜가 그걸 끌 수 있을 리가 없지.”
가볍게 도발해보자, 녀석은 더욱 흥분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역시, 걸리네.’
원조 아기곰도, 이 녀석도, 절대 도발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이, 이놈! 이놈!”
흥분한 녀석은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지만, 단 한 방도 나에게 닿지 않았다.
속도 자체는 가짜가 나보다 우월했다.
아무리 웅황 청심환을 먹고, 능력치를 끌어올리고, 스킬 등급을 끌어올려도, 순수한 피지컬의 격차는 쉬이 메워질만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공격이 너무 뻔해.’
한 달 간의 회피 훈련.
거기에 고미를 만난 순간부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녀석을 관찰해온 ‘아기곰 관찰일지’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 쩡!
“흥!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냐!”
거기에 틈이 날 때마다 불시에 날아드는 천마의 일격은 녀석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비웅번신!”
또다시 기회를 잡은 나는 번개처럼 검을 휘둘러 가짜 녀석의 몸 곳곳에 불을 붙여주었다.
곰앤더머 콤비의 열정처럼,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을.
“크, 크아아아악!”
시간이 지날수록 가짜는 점점 더 이성을 잃어 갔고, 불길은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 안된다! 안돼!”
가짜의 몸은 처음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몸집이 작아짐에 따라 속도도 떨어지고, 공격의 위력도 빠르게 약해졌다.
그렇게 반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쳇! 뭐가 고미를 잡을 비장의 무기냐! 저 인간 놈 하나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지 않느냐!”
전신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섬뜩한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 쾅!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 수하! 피해라! ]
산처럼 거대한 애꾸눈의 호랑이 하나가 바닥을 박차고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