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5 최후의 싸움(3) : 합류
[ 알겠습니다. 잠시만 버텨 주십시오. ]
동이님의 목소리에서는 굳은 결의와 비장함이 묻어났다.
흉측한 외형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족들에게 핍박당해 온 이형의 드래곤에게 있어, 오늘은 문자 그대로 수천 년을 고대해 온 순간일 테니까.
“······, ······ !”
분분히 지상을 향해 낙하하는 드래곤들 사이로, 이형의 드래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는 그 연설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는 점 정도.
궁금하다. 미칠 듯이 듣고 싶다.
하지만 드래곤어(語)로 말을 하는 터라,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 저······. 혹시 동이님이 지금 뭐라고 하시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
몬스터들을 베어나가며 통역을 요청하자,
[ 하하하, 수하님. 아직 기운이 넘치시나 보군요. ]
공중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유찬 씨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대충 고향을 더럽히고, 동포들을 핍박한 현(現) 드래곤 로드를 몰아내고, 긍지 높은 드래곤의 땅을 되찾자고 말씀하고 계시군요. ]
그렇군······.
역시 완벽한 동시통역은 힘들구나.
[ 김수하! 이상한데 정신 팔지 말고 저 덩치 큰 놈들이나 잘 처리해! ]
그때, 봉식이의 험악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다시 전장으로 돌려놓았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최전선을 맡고 있는 우리가 한 마리라도 더 처리해야 뒤쪽이 안전하니까.
- 쾅!
참숯 1호로 달군 영지버섯을 폭발시키자,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 이기어곰(C)을 활성화합니다. >
방패를 회수하는 사이, 뒤쪽에 서 있던 반인반수의 거인과 코끼리형 맹수가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 쉭!
그 순간, 거인의 어깨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 크, 크륵!
그림자는 손에 들린 비수로 거인의 목덜미를 가볍게 찌른 뒤 그대로 사라졌다.
[ 죄송합니다. 합류가 조금 늦었습니다. ]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신 팀장님이었다.
지금 그의 손에는 용궁산 SS급 비수가 들려 있었다.
칼날에는 이주혁 씨의 화살과 마찬가지로 히드라의 맹독이 듬뿍 발려 있었다.
[ 그럼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번개처럼 서너 마리의 거인을 찌른 신 팀장님은 그대로 ‘롤백’을 사용해 이주혁 씨의 곁으로 돌아갔다.
신 팀장님의 역할은 간단했다.
공중 지원조 주위를 지키며 마력이 찰 때마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만 골라서 제거하는 것.
본래 신 팀장님의 공격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새로 얻은 단검의 공격력과 특제 맹독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 쿵······.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신 팀장님의 공격에 당한 거인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덩치가 덩치이다 보니, 즉사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목적은 적을 전멸시키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버는 거니까.
[ 두 번째 전송진 설치 완료했습니다. ]
[ 세 번째도 끝났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몬스터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두 번째, 세 번째 전송진이 완성됐다.
- 우웅, 우우웅······.
“도착했습니다!”
“부상자 옮겨, 포션이랑 단약 가지고 왔다!”
“사망자는?”
“아직 없습니다! 중상자 다섯!”
“중상자는 2번 전송진으로 옮겨! 토생원 님이 오셨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의 귀청을 때렸다.
[ 사숙조! ]
이어서 천마가 번개 같은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날아왔다.
그의 뒤로는 수십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전송진이 나타나고, 지상이 밀리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날아오는 마법과 독화살도 성가시다.
그렇게 판단한 드래곤들 중 일부가 타겟을 지상조로 돌린 것이다.
[ 마법사 조, 결계! ]
“마법사 조! 결계!”
“마법사 조! 결계!”
이에 지상의 마법사들은 공격을 멈추고 일제히 하늘을 향해 결계를 펼쳤다.
“막아!”
“결계 안으로!”
“버텨라!”
- 크오오오!
하지만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일제히 뿜어내는 브레스에, 용왕의 마법사들이 펼친 결계가 삽시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안되겠어.’
이대로 두면 전멸이다.
[ 봉식아! 이강혁 씨! 전선을 부탁해요! ]
[ 인국! 김수하와 교대해라! 전열을 유지해! ]
[ 알겠네! ]
결계가 무너지기 직전, 흑암의 언데드 군단 중 일부가 미친 듯이 달려가 결계 위로 뛰쳐 올랐다.
그러나 언데드의 대부분은 보래 C급에서 B급 마수.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홍염에 닿기 무섭게 언데드 군단이 재로 변해버렸다.
“아, 안돼!”
“살려줘!”
마법사들은 긴급 탈출용 아이템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것을 사용해 용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지금 자신들이 자리를 비우면, 작전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해.’
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단 1초라도 더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대가가 죽음으로 돌아가게 둘 수는 없다.
언데드 군단을 불태운 화염이 결계를 녹여버리는 찰나······.
“블랙 쉴드!”
재로 변했던 언데드 군단이 검은 안개로 변해 마법사들을 보호했다.
[ 흑암! 나이스! ]
[ 칭찬은 됐다, 어서 동료들을 지켜! ]
< 허곰답보(S)를 활성화합니다. >
< 청심환을 복용합니다. 일시적으로 기와 마력이 상승합니다. >
빠르게 허공을 딛고 이동한 나는 곧바로 단 하나 남아있던 ‘스킬 획득권’으로 익힌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다.
< 해피곰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잔여 포인트 : 6911 >
< 흑곰 덫의 등급이 임시로 상승합니다. B -> S >
“흑곰 덫!”
- 우웅!
흑암의 블랙 쉴드가 녹아내리기 직전, 검은 색의 돔(Dome)같은 결계가 전송진 위로 펼쳐졌다.
[ 우, 우웃! 수하! 훌륭하다! 완벽한 흑곰덫이다! 동료들을 지켜냈구나! ]
칠흑 같은 결계가 불꽃을 막아내자, 흥분한 아기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가, 감사합니다! 조정위원님!”
“사, 살았다! 살았어!”
“정말 감사합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마법사들의 입에서는 연달아 환성이 터져 나왔다.
[ 잘했다, 김수하. 내가 인국과 함께 지상군을 상대하겠다. 너는 잠시 저 드래곤놈들의 브레스를 막아다오. ]
동료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흑암이 땅속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
“제가 결계를 펼치고 있는 동안 빨리 마나 포션 드시고 다음 공격 준비하세요.”
흑암과 노인국 씨와 위치를 바꾼 나는 마법사들에게 부족한 마나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획대로라면, 곧 결계를 거두고 반격할 기회가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마법사조, 어서 체력과 마나를 회복해라!”
“마셔! 마셔!”
[ 이주혁 씨는 저한테 오세요. ]
그리고는 마법사들이 마나를 채우고 있는 사이, 이주혁 씨를 불렀다.
< 웅신입기혈(Ex)이 활성화됩니다. >
< 웅기조식(A)을 사용합니다. >
한 손으로 기를 불어넣어 흑곰덫을 유지하고, 다른 한 손으로 이주혁 씨의 기를 회복시킨다.
지금의 나라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진기를 주입하자, 무리해서 화살을 쏴댔던 탓에 창백하게 질려있던 이주혁 씨의 얼굴이 빠르게 혈색을 되찾았다.
“다음 공격 준비하세요. 아군 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흑곰덫을 거둘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 동이님, 아직인가요? ]
흑곰덫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없으니, 웅톡방에 의지해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 지금, 지금입니다! ]
“마법사 조, 공격 준비!”
“공격 준비!”
“공격 준비!”
“하나, 둘, 셋!”
셋에 맞춰 흑곰덫을 거두자, 비처럼 쏟아지던 화염이 거짓말처럼 멈춰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이님의 동료들이 합류했으니까.
‘생각보다 숫자가 훨씬 많아.’
처음에 날아왔던 드래곤들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쪽에는 사도급 드래곤 셋에 인간 하나, 초월자 하나가 버티고 있으니까.
거기에 용귀의 화력이 더해지면, 제공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붉은 빛이 도는 드래곤들은 아군이다! 붉은 빛이 도는 드래곤들은 쏘지 마라!”
“쏴라!”
“붉은 빛이 도는 드래곤들은 아군이다!”
“쏴!”
공중에서는 드래곤들이 혈투를 벌인다.
지상에서는 만수왕의 마수 군단과 흑암의 언데드, 숲속 친구들과 전송진을 통해 온 상급 헌터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단순한 소모전의 반복.
아직까지 전사자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 소모전이 계속되면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저쪽은 대지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을 정도로 많고, 이쪽의 숫자는 기껏해야 천 단위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아직 진짜 강한 녀석들은 등장하지도 않았다.
[ 네 번째 전송진 설치 완료! ]
[ 다섯 번째 전송진, 완성됐습니다! ]
전송진도 늘어나고, 지원군이 속속 도착했지만, 아직도 적들을 밀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 용귀 착륙 완료. 요새로 전환합니다. ]
드디어 용귀가 지상에 내려앉았다.
[ 수하님! 제가 왔습니다! ]
이어서 용귀의 거대한 입을 통해 용궁 식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선두는 고북 대왕.
“딱총새우 군단, 정렬!”
“정렬!”
“정렬!”
고북 대왕의 명령에 따라, 가재처럼 생긴 새우 군단이 일렬로 자리를 잡고 오른팔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발사!”
“발사!”
“발사!”
- 땅, 따다다다당!
다음 순간, 쉴 새 없는 폭음과 함께 딱총 새우의 집게발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 키에에에에!
- 크르르륵!
‘시, 실화냐.’
딱총새우 군단의 사격은 드래곤의 단단한 피부를 뚫을 정도로 강력했다.
심지어 조금 크기가 작은 드래곤들은 빗발치는 탄환에 곧장 목숨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덩치가 큰 놈들 중에도 날개가 반쯤 날아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놈들이 속출했다.
‘대, 대체 뭘 쏜 거야? 충격파?’
S급에 달한 감각 강화 스킬로도 탄환의 정체를 확인하기 어렵다니, 대체 뭐냐고 저 엄청난 새우들은!
“재장전! 흑곰덫 안으로!”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위력이 강한 대신 재장전에 시간이 조금 필요한 모양이었다.
“백상아리 부대! 돌격!”
딱총새우들이 흑곰덫 아래에서 안전하게 재장전을 하는 사이, 커다란 백상아리 어인들이 몬스터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손에는 백상아리의 날카로운 이빨로 만든 창과 커다란 조개로 만들어진 방패가 들려 있었다.
“고래 부대, 추가 전송진을 설치해라!”
이어서 보급을 맡은 고래 어인들이 전송진을 설치하고, 포션과 단약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수하님! 저도 전선에 합류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전송진을 지켜 주십시오!”
말을 마친 고북 대왕은 곧바로 자신의 등껍질에서 기다란 삼지창 하나를 꺼내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 민봉식, 이강혁 씨, 일단 뒤로 물러서요! 다른 헌터분들도 전송진 쪽으로! ]
그 모습을 본 나는 곧장 선봉에 서서 싸우고 있던 헌터들에게 퇴각을 명했다.
“용궁 식구들이 왔다! 탈출해!”
“뒤로 물러나라! 휩쓸린다!”
선봉을 지키고 있던 헌터들 중 이동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뒤쪽으로 퇴각했다.
발이 느리거나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에 있던 사람들은 마법사들의 텔레포트와 신 팀장님의 블링크, 롤백을 이용해 퇴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까지 방진 근처로 퇴각을 마친 순간······.
“해신의 창이여, 바다의 전사들에게 힘을!”
우렁찬 함성과 함께 고북 대왕의 삼지창과 용귀의 눈에서 신비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 쏴아아아!
이어서 물 한 방울 없던 대지 위에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며 몬스터들의 대열을 무너뜨렸다.
“돌격!”
몬스터들이 파도에 휩쓸려 떠밀려 나가자, 물 만난 고기가 된 백상아리 부대가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휩쓸었다.
갑자기 전장이 물바다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만수왕의 마수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삽시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괴, 굉장해. 괜히 자신있게 말씀하신 게 아니었어.’
말로는 들었지만, 정말로 용궁 식구들만으로 전선을 밀어낼 수 있을 줄이야.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용궁 식구들의 전투 방식에 모두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
[ 수하님! 제가 왔습니다! ]
수다르 님이 전장에 합류했다.
‘드디어 왔군.’
지금 수다르 님의 곁에는 사랑이들과 고래 부대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무려 열 마리에 달하는 고래가 커다란 솥을 짊어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