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2 전장으로.
내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 자리를 마다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전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전쟁에 대해 문외한이다.
전쟁은커녕 헌터 경력조차 이 자리에서 가장 떨어진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반면 이 자리에는 나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는 건,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건 고미도 마찬가지에요. 언제나 혼자 싸워와서, 전쟁의 사령관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경험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의 대장, 슈퍼 아기곰 역시 이런 자리를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본인이 싸움을 잘하는 것과 전쟁의 총사령관이 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이 단순한 녀석에게 지휘를 맡긴다면, 명령이라고는 돌격과 공격, 혼쭐을 내줘라, 세 가지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흠, 흠흠!”
언제나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하는 아기곰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말했다시피, 전 전쟁은커녕 집단전 경험도 없어요. 반면 흑암은 한때 인간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죠. 능력의 특성상 많은 숫자의 마력 생명체나 소환수를 부려본 경험도 많고요.”
“흐음······.”
이 대목에서 흑암은 일리가 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싸울 때, 이 흑마법의 대가는 수 백, 수 천에 달하는 언데드들을 부렸으니까.
“백천은 정사대전을 치른 경험이 있고, 이강혁 씨 역시 몇 번이나 초월자와의 전쟁을 경험했죠.”
백천은 직접 싸우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문경준과 패왕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 이런 문제에도 경험이 풍부한 게 분명해 보였다.
천하일통 어쩌고 하는 말을 했었으니, 당연히 전쟁을 해봤을 거고.
“그러니까 지휘는 저희에게 맡기고, 사숙조께서는 그 가짜를 상대하는데 집중하시겠다, 이런 의미시군요.”
내 말의 행간을 읽은 무서운 손주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큰 틀은 그렇게 가는 게 맞다고 봐. 내가 이 싸움을 지휘하면 필패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어서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 생각을 전달했다.
“총대장은 드라고니아의 지형을 잘 알고, 가장 오랜 시간 전쟁을 준비해 온 동이님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동이님은 흑암이 인간계를 노리기 훨씬 전부터 드래곤 로드 자리를 노려왔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장은 동이님의 고향인 드라고니아이니, 그 누구보다 대장직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동이님이 총대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적의 본진에 동이님의 동료들도 있다고 했으니, 손발을 맞추기도 가장 좋을 거고요.”
다른 사람이 총대장을 맡는다면, 드라고니아의 반란군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한 다리를 더 거쳐야 한다.
이건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는 전장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합리적인 생각이군요. 전 찬성입니다.”
언제나 냉정한 레드 드래곤, 제르보나 씨 역시 내 생각에 짧게 동의를 표했다.
“저스티스와 패왕은 백천과 이강혁 씨가 나눠서 지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공술 계통의 능력을 가진 헌터들이라면 백천이 천마이던 시절에 지휘했던 무림인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죠.”
“나쁘지 않네요. 저도 동의.”
제르보나에 이어 한유진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용궁 수비대는 고북 대왕님이, 마법사들은 흑암과 한유진 씨가 지휘하면 되지 않을까요? 후방 지원과 의무대는 수다르 님이 지휘해 주시고요.”
“맡겨 주십시오, 이 수다르.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겠습니다.”
수다르 님의 대답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이 천하제일 의원이라면 정말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마저 들었다.
숲속 친구들 중 누구도 내가 생각한 각자의 역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예외가 있다면······.
“좋습니다. 그럼 심연 공을 총대장으로 각각 자기에게 맞는 부대를 맡아 지휘하는 것으로 하지요. 단, 저는 그 가짜 웅 노사가 나타나면 곧바로 그쪽에 힘을 쏟겠습니다.”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손주님 정도.
하지만 나 혼자 가짜 고미를 상대하기는 어려우니, 이 역시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결국 전쟁의 승패는 내가 가짜 고미를 제압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오오, 차, 참으로 훌륭하구나, 수하! 이, 이몸과 완전히 생각이 같다!”
전쟁의 청사진이 완성된 듯 하자, 고미는 조금 감탄한 듯 입을 헤 벌린 채 내 의견에 격렬하게 동의했다.
‘정말이냐······.’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대충 직접 나서서 모조리 혼쭐을 내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모두 이 아기곰의 거짓말을 눈치챈 듯 자리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흠, 흠흠······. 그럼 수하 님의 의견대로 해보지요.”
정적을 깬 것은, 이 순수한 영혼의 가장 오랜 친구인 동이님이었다.
“흑암, 무신님과 이강혁 님, 그리고 저의 권속들과 상의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부대 편성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동이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흑암이 날카로운 선글라스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인국, 나는 당분간 길드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너에게 연락을 하지. 길드원들을 맡겨도 되겠나?”
흑암이 길드원들을 신경 쓰다니······. 사람 앞일 참 모를 일이군.
“좋아,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게.”
하지만 노인국 씨는 이미 흑암의 그런 변화에 익숙해진 듯 싶었다.
“수하 씨, 저도 당분간은 밤낮없이 준비를 해야할 것 같은데······. 오늘 대련은 조금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강혁 씨가 조금 멋쩍게 웃으며 대련을 미루자고 말했다.
‘음······. 아쉽네. 이강혁 씨한테는 아직 배울 게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 아쉽지만(?) 할 수 없지.
그렇게 이강혁 씨의 말을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났고, 숲속 친구들은 각자의 임무를 마치기 위해 흩어졌다.
* * *
이후의 일정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진행됐다.
총사령관 역할을 맡은 동이님은 물론이고, 이강혁 씨와 천마, 흑암, 의료팀과 후방지원을 맡은 수다르님과 토생원까지, 모두 용궁에 틀어박혀 1퍼센트라도 더 승산을 높이기 위해 밤낮없이 머리를 짜냈다.
그 사이, 나는 봉식이와 이주혁 씨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마정석을 모으고, 수련에 몰두했다.
큰 그림은 숲속 친구들이 그리더라도, 최종 보스는 고미와 내가 맡아야 하니까.
< D- 90 >
일주일 동안 나는 총 다섯에 달하는 보스몬스터를 처리했고, 마정석의 조달을 마쳤다.
이 과정에서 조금 운이 따라, 이주혁 씨와 신 팀장님에게 맞는 아이템도 얻을 수 있었다.
나머지 아이템들은 각각의 길드에 분배해 주인을 찾아주었다.
이후 한동안은 국내의 모든 상급 던전을 돌아다니며 포션과 소환수, 단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를 조달하고, 연맹의 A급 이상 헌터들과 손발을 맞춰보았다.
< D- 82 >
더 이상 던전을 도는 것으로는 능력치를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분곰쇄신을 두 배까지 끌어올린 채로 사냥을 진행해 봤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이강혁 씨나 천마는 여전히 전쟁 준비에 바빠서, 수련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나는 다웅이에게 연습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 퍽, 퍼벅, 퍽!
정신이 흐려질 때까지 달콤한 솜방망이 맛을 보아야 했다.
‘어, 어째서 겉보기에는 이렇게 폭신폭신한데······.’
망치로 두들겨 맞아도 이거보다는 덜 아플 거다.
“다웅, 다우우웅!” (형아, 정신 차려! 형아!)
< 충분한 데미지가 축적되었습니다. 곰강불괴의 스킬 등급이 상승합니다. B -> A >
달콤한 꿀주먹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즈음, 곰강불괴의 스킬 등급이 올랐다.
‘실화냐······. 다웅이 정도는 되는 상대한테 맞아야 등급이 오른다고?’
하지만 어찌됐든 스킬 등급이 오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금 이 스킬은 나에게 있어 목숨줄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다웅아······. 내일도 또 하자.”
“다, 다웅!?”
그 후 무려 열흘에 걸쳐 밤낮없이 애정어린 매타작(?)이 이어졌고, 나는 간신히 곰강불괴의 스킬 레벨을 SS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조금이나마 다웅이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 D- 72 >
수다르 님의 영약을 먹고 몸 안의 사기(邪氣)가 모두 빠진 신 팀장님이 합류했다.
신 팀장님의 속도는 다웅이와 고미, 천마 정도를 제외하면 숲속 친구들 중 가장 빨랐다.
이에 원거리에서는 이주혁 씨, 가까이에서는 신 팀장님과 봉식이가 협공을 하는 형태로 회피 훈련을 시작했다.
“에이잇! 수하! 단 한 번도 맞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그 가짜 녀석의 일격이라고 생각하란 말이다!”
“고, 공격이 너무 많아. 게다가 신 팀장님은 블링크 능력까지 가지고 있잖아.”
신 팀장님의 본래 능력은 ‘롤 백’이었다.
특정한 위치에 자신의 표식이나 기를 남겨두면, 그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
던전에 함께 갔을 때 봤던 능력이었다.
그리고 오늘, 고미의 도움을 받아 ‘블링크’ 능력이 더해졌다.
‘S급 은신 스킬에 블링크, 롤백이라······.’
이 정도 능력이라면, 전장에서의 활용 가치는 실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고미, 롤백 능력의 범위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흐으음······. 본래 이런 종류의 이능은 특별한 힘을 가진 보구가 없다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신 팀장님, 지금 동이님과 토생원을 찾아가 서 롤 백 능력의 범위를 증가시킬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지 한번 물어봐 주세요. 어쩌면 고북 대왕님에게 그런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쪽에도 물어봐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용궁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주자, 신 팀장님은 홀연히 그 안으로 사라졌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성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가끔 피식 웃거나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의 반응은 생겼지만, 천성이 무뚝뚝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 * *
< D- 60 >
“우, 우웃! 수수깡! 참으로 훌륭하구나!”
신 팀장님에 이어, 이주혁 씨에게도 흥미로운 능력이 몇 가지 생겼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은 아니지만, 전략적 가치가 아주 높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나의 힘과 민첩은 80을 넘어 9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 D- 48 >
“사숙조, 전쟁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이강혁 씨와 무서운 손주분이 찾아와 모든 준비를 마쳤음을 알렸다.
예언에 따라 오래 전부터 전쟁을 준비해온 용궁 식구들과 이강혁 씨, 동이님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안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고.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네.”
나는 긴말 하지 않고 참숯 1호를 꺼내 들었다.
“호오······. 사숙조, 그새 자신감이 좀 붙으셨군요.”
원조 아기곰의 눈에 따르면, 가짜 고미의 실력은 백천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즉, 백천을 이기지는 못해도 얼추 비슷한 수준까지만 올라간다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보이지 않는 검이 사방에서 나를 덮쳐왔다.
하지만 다웅이의 솜주먹과 친구들의 다구리(?)로 단련된 나의 회피 능력은, 스스로도 놀랄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 챙, 채채채챙!
날카로운 검성이 끝도 없이 울려 퍼졌고, 개 중 몇 번의 공격이 몸에 적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급소를 당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종종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SS급에 달한 곰강불괴의 방어력과 스킬 포인트를 투자해 S급까지 끌어올린 드래곤 스케일이 무신의 공격에서도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었다.
“으으으······.”
거기에 아웅이에게 빌린 치유 스킬로 부상을 치료하니, 천마를 상대로도 버티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훌륭하다, 수하. 지금의 너라면, 가짜 살쾡이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그 괘씸한 가짜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가짜 웅노사가 얼마나 강할지는 몰라도, 지금의 사숙조라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딱 열흘만 더 수련해보자.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어. 그리고 고미, 이제부터는 너도 날 도와줘.”
* * *
< D-36 >
천마와 원조 아기곰을 상대로 수련을 한지 정확히 12일째······.
주 능력치가 인간의 한계치라는 100을 넘어섰다.
가장 큰 성과는, 그간 줄곧 물음표 상태였던 영웅검법의 마지막 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 D-35 >
오랜만에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나도, 고미도, 봉식이도, 차마 전쟁을 치르러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어머니였다.
“이강혁 씨에게 얘기 들었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거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말투였다.
곰돌이 삼형제의 어머니로 지내는 동안, 이 녀석들의 특별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
“아웅이도, 다웅이도, 고미도, 너도, 봉식이도, 꼭 무사히 돌아온다고 약속하렴.”
어머니의 눈에서 끝내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걱정 마, 엄마. 무사히 돌아올게. 다 같이 돌아오면 새집으로 이사도 가고, 용궁으로 소풍도 가자.”
“후훗, 걱정 말거라, 엄마! 진정한 곰은 결코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느니라! 엄마는 계란말이와 주먹밥을 해두고 이 몸을 기다리거라!”
* * *
그렇게 모두 함께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날······.
“자, 출발이다 수하! 악당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가는 것이다!”
숲속 친구들은 모두 용궁에 몸을 싣고 드라고니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