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0 수하에게도 수하가 있다.
“모, 모, 몬스터가 말을······.”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자, 이강혁 씨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아, 아니, 몬스터가 말을······.”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산전수전 다 겪은 던전 1타 강사, 아기곰 선생이 가볍게 나의 어깨에 올라타며 말했다.
“네가 도마뱀이었다면, 도마뱀의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이어지는 이강혁 씨의 설명에 따르면,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숨겨진 루트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경우, 종종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했다.
드래곤이든, 고블린이든, 혹은 다른 종류의 몬스터든, 모두 NPC처럼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진다고.
“흔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런 던전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죠. 제가 히든 피스를 독식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것 때문이고요.”
그렇군, 저스티스가 하급 던전의 히든 피스까지 최대한 독식했던 이유는 본인에게 큰 쓸모는 없다고 해도 다른 길드에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던 건가······.
반면, 문경준은 내 반응을 보고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군. 그런 것도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S급 보스 몬스터를 떡 주무르듯 주무를 수 있는 거지?”
뭐냐, 이거······.
당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어?
“괜찮아, 김수하. 나도 몰랐다.”
그때, 봉식이가 솥뚜껑만한 손을 들어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
하긴, 생각해보면 내가 여태 인간의 말을 하는 몬스터를 본 적이 없을 뿐, 그런 존재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흑암이나 토생원, 이유찬 씨와 제르보나 씨만 해도 몬스터에 가까운데 아주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니까.
여하튼, 보스 몬스터의 말에 따르면, 이 던전의 배경은 이계의 검투장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검투사의 반란이나 저주 등 이 던전에 얽힌 사연을 읊어주었으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으니 패스.
- 그대가 저주받은 석상을 파괴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으니, 이 챔피언의 증표를 선물하겠다.
그렇게 NPC같은 대사를 줄줄 늘어놓은 검투사는 곧장 주먹만한 펜던트 하나를 내밀었다.
음······. 일종의 챔피언 벨트 같은 건가.
“이거 어디 쓰는 건데요?”
벨트든, 펜던트든, 나에게 중요한 건 이 물건의 용도가 뭐냐 하는 점이었다.
관리자가 퀘스트까지 줘가며 이런 짓을 시킨다는 건, 이게 꽤 유용한 아이템이라는 의미였으니까.
- 단 한 번, 그 펜던트를 이용해 검투사의 무덤에 잠든 영혼들을 소환할 수 있다.
“정말요!?”
- 명심해라. 단 한 번 뿐이다.
주어진 대사를 마친 검투사의 영혼은 우리를 남겨놓고 바람처럼 사라졌고, 관리자는 곧바로 퀘스트 완료 보상을 보내왔다.
* * *
던전이 사라진 뒤, 나의 손 위에는 S급 마정석과 아이템 큐브가 남았다.
그 중에서 가장 쓸모가 있어 보이는 건, 역시나 검투사의 망령을 소환할 수 있는 펜던트였다.
이건 틀림없이 전쟁에 도움이 될 테니까.
‘하여간 이런 건 절대 안 놓쳐요.’
내 워라밸에는 관심도 없는 놈이, 고미가 좋아하는 거나 전쟁에 필요한 건 칼같이 챙긴단 말이지.
“후우······.”
한편, S급 던전 하나를 날려버린 문경준은 어두운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만 놓고 봐서는 초상을 치러도 아주 줄초상을 지른 사람 같다.
‘괜히 미안해지네.’
쏘기는 천마가 쏘고, 덤터기는 저 사람이 다 뒤집어 쓰는군.
아니, 애초에 이걸 천마가 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왠지 동네 무서운 형이 삥뜯은 돈으로 나한테 맛있는 걸 사준, 그런 굉장히 부적절한 상황 같은 느낌이······.
괜스레 미안해진 나는 손에 든 아이템 큐브를 만지작거리며 이거라도 넘겨줄까 고민했다.
던전 정보창에 따르면 보상은 보스 몬스터의 대검과 강철일 텐데······. 나한테는 크게 쓸모가 없는 물건이니까.
‘그래도 S급 던전 클리어 보상인데, 위로금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니지, 이 아저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아, 인간 김수하.
호인과 호구의 기로에 섰구나.
그렇게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은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경준.”
돌연 무서운 손주님께서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본좌의 결정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구나.”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목소리를 낼까?
“그, 그것이 아니라······.”
“그런데 어째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냐? 돈이 아깝느냐?”
질문과 동시에 칼날 같은 시선이 문경준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사숙조는 이 와중에도 이놈이 손해를 본 것을 신경 쓰시는 겁니까?”
으, 귀신 같은······ 놈, 아니, 분이네.
왠지 이 분이 중원 통일하겠다고 칼질하고 다닐 때 밑에 있는 분들 마음 편히 발도 못 뻗고 잤을 것 같다.
대체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냐.
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문경준의 표정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드러났다.
반면 천마의 표정은 갈수록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이거 이대로 두면 사고 칠 거 같은데······.’
화를 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분위기다.
“본좌가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싸움에서는 패했고, 너를 도와줄 세력도 없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역전시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너는 아직도 상대와 대등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구나. 그런데도 네가 여태 살아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가 여태 살아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백천!”
뭔가 아동교육에 좋지 않은 일을 벌일 것 같은 대사에, 나는 잽싸게 무서운 손주분의 앞을 가로막았다.
패왕은 자기 길드원이라도 수틀리면 사람을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는 일이 잦은 길드다.
철저한 약육강식.
길드장과 길드의 가치관이나 분위기가 그렇다는 건, 그 후원자 역시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죽이지 마.”
“우, 우웅!? 작은 살쾡이! 설마 저 멧돼지 녀석을 죽이려 했던 것이냐!?”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아기곰은 한입에 초코바를 집어삼키고는 백천의 앞을 막아섰다.
“웅 노사, 사숙조. 배후에 원한을 가진 자를 남겨놓고 큰일을 도모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천마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이 자리에서 문경준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역시, 그런 이유였나······.’
그래도 자기가 후원하던 집단의 수장을 죽이려 들다니, 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야.
“네 사도잖아. 네가 후원하던 길드고. 이건 아니야.”
“거두는 것도, 버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모두 강자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저 모자란 놈은, 아직도 자신이 강자의 선의에 기대 살아남았을 뿐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백천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문경준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사숙조는 정에 끌려 어리석은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 아둔한 녀석은 아직도 자신이 왜 살아있을 수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옳은 선택을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수하 씨, 천마님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때, 이강혁 씨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패왕은 여전히 저희와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제가 무력으로 패왕을 해체하거나 흡수하자고 하지 않은 건, 수하 씨에게 뭔가 대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디데이 카운트까지 나온 마당에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이강혁 씨의 말대로였다.
나는 본래 천천히 패왕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 후에 협조를 구하려 했다.
패왕이 순순히 연맹에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와도 들어오는 대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다고 협박을 한다면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들 공산이 더 컸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람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한둘 죽여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천천히 달래가며 협조를 요청하기는 어려웠다.
“이 노사는 좀 말이 통하는군요. 역시 큰 문파를 운영하는 장문답습니다.”
“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웅왕 연맹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문경준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으나,
“수하씨, 우리는 이번 전쟁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볼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 문경준이 무슨 짓을 꾸미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사숙조, 전쟁의 승패는 병사들의 사기에 달려 있습니다. 설마 연맹의 적들은 안전한 곳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데, 연맹원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말씀하실 셈입니까?”
이강혁 씨와 천마는 이미 문경준을 죽이거나, 최소한 패왕을 해체하지 않고는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바로 그때,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이 아주 간단한 해법을 내놓았다.
“오오, 그럼 멧돼지 너도 우리와 함께 악당들에게 맞서면 되겠구나!”
······.
고미, 지금 그게 안 되니까 상황이 여기까지 온 거······.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 가 아니네?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걸까?
문경준은 부탁하지도 않은 것까지 줄줄이 들어주겠다고 나섰다.
“더, 던전도, 아이템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처음부터 협박할걸······.
당신,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어?
“쯧, 한심한 놈. 여태 살아있는 게 신기하구나. 상황이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그 말이 나온단 말이냐?”
문경준의 입에서 원하던 답을 들어낸 무신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설마 할 이야기가 있다던 게 ······. 이거였나?’
그 반응을 본 나는 그제야 무신이 왜 먼저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깨달았다.
전쟁이 가까워지면, 문경준의 처분에 대한 이야기가 도마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흑암과 이강혁 씨, 한유진 씨는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할만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강혁 씨는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고.
그때 가서 문경준을 압박해 협조를 얻어낸다 한들 연맹원들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지.
‘그래서 상황이 거기까지 가기 전에 손을 쓴 거겠지.’
물론 이런 협박이 먹힌 가장 큰 이유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문경준이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좀 좋게 말하지······.’
천마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지만, 실은 상황이 최악으로 굴러가기 전에 살길을 터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기가 거둔 사람을 죽게 두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좋다, 그럼 이번 일이 끝나면 금제를 풀어주마.”
금제?
“백천, 그런 거 걸어뒀어?”
어째 저 성질머리 더러운 양반이 너무 쉽게 굽히고 들어온다 했더니······.
“수하를 거둘 때는 상벌이 분명해야 합니다. 보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으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하긴, 무협지에서 보면 이상한 독도 먹이고 그러니까······. 역시 무림인의 사고방식은 현대인과는 많이 다르구나.
‘그래도 흑암보다는 낫네.’
흑암은 사람을 괴롭히는 걸로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냈었지. 이제는 새 사람, 아니, 두더지가 됐지만.
“그럼 문경준, 너는 앞으로 사숙조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라.”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천마는 내친 김에 서열 정리까지 확실히 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 알겠습니다.”
“오, 오오! 수하! 너에게도 수하가 생겼구나!”
고미, 수하에게 수하가 생기다니, 어감이 좀 그렇지 않니······.
그리고 저런 무서운 아저씨를 부하로 두고 싶지는 않다고.
“아저씨, 잘 부탁할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고. 이놈이 마음이 약해서 막 부려먹지는 않을 거야.”
봉식이의 말에 문경준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으, 불편하다.
이 불편한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아니에요, 일단 오늘은 돌아가세요. 조만간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 드릴게요.”
급격하게 쭈구리가 되어버린 문경준 씨의 모습에 애잔함을 느낀 나는 서둘러 그를 돌려보냈다.
여기 계속 뒀다가는 스트레스로 위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 같았거든.
여담이지만, 그거 되게 아프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돌아가라는 한마디에 문경준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도망치듯 자리에서 떠났다.
“백천, 마음은 알겠는데,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마. 좋게 말해도 되잖아.”
자신의 행동에 깔린 진의를 읽어낸 듯한 나의 말에, 무서운 손주분의 입가에는 보일락말락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사숙조, 때로는 맞아야 말을 듣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매번 대화와 인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으, 으음······.
동의해서는 안될 것 같지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말이군.
그렇게 상황이 대충 마무리되자, 이내 다음 으로 해야 할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음, 이제 용궁에 마정석이나 주러 가볼까?’
겸사겸사 패왕이 연맹의 하부 조직으로 들어왔다고 말도 해주고, 펜던트에 대해서도 말해줘야겠다.
디데이 카운트에 대해서도 말해줄 필요가 있고.
바로 그때, 꿀태창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마지막까지 완료되지 않았던 웅비어천가(2)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토생원이랑 수다르님이 마지막 제자를 거둔 모양이네.’
이에 나는 곧바로 시스템 창을 열어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했다.
아마도, 마지막 싸움의 키가 되어줄 보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