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7 천마가 쏜다!
“오오, 작은 살쾡이! 마침 잘 와주었다!”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무서운 손주분이었다.
‘요 며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어디 있었던 거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온 건데······.
“웅 노사, 보아하니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계셨던 것 같군요.”
거기다 귀신같이 새로운 검법을 배우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궁극의 무를 추구하는 이 무공 덕후에게 있어 ‘재미있는 일’이라면, 역시 무공뿐 이니까.
“백천, 어떻게 알고 여기 온 거야?”
“아, 용궁 쪽에는 굳이 제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손주님······. 전혀 대답이 안되잖아요.
‘가만 보면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고미야 어린애라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왜 그러는 거냐고 대체.
‘내 갈 길은 오로지 내 의지로 정한다’가 천마들의 흔한 인생 모토이기는 하지만, 이건 좀 얘기가 다르지 않아?
묻는 말에 대답을 좀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속 외침을 들은 걸까?
천마는 간략하게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용궁에서 할 일도 없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느니, 이쪽으로 와서 무공이나 배우고 가르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고.
“해서 웅 노사를 처음 만난 곳에 찾아가 이 노사의 문파원들에게 노사들께서 어디로 갔는지 물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더군요.”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저스티스에 찾아가 우리의 행방을 물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 친절하게 알려줬을까?
그 특유의 맹수같은 눈으로 협박하듯 쳐다보니까 무서워서 알려준 게 아니고?
“그러다가 오는 길에 범상치 않은 기의 파동이 느껴져 황급히 달려와 보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심심함에 몸부림치다가 이쪽에서 싸움의 냄새가 나서 호다닥, 아니, 곰다닥 뛰어왔다. 뭐 이런 얘기군.
“후후후······. 벌써 이 몸이 만든 신공의 위대함을 느꼈던 말이더냐?”
자신이 만든 검법의 기운을 느꼈다는 말에, 아기곰의 콧대는 하늘을 뚫을 듯 높게 치솟았다.
“자, 수하! 어서 이 몸이 만든 위대한 신공을 보여주거라!”
그제야 나는 고미가 왜 천마에게 ‘잘 와주었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마에게 이걸 보여주고 인증이라도 받고 싶었던 거겠지.
무공으로 초월자가 되어 ‘무신’이라는 이명을 쓰는 초월자에게 인증을 받는다면, 이 새로운 검법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테니까.
‘하여간 자랑하는 걸 좋아한다니까.’
그렇게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잔뜩 신이 난 고미가 솜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자신이 창안한 검법과 새로 만든 검의 이름을 발표했다.
“영웅검과 영웅검법이 함께라면, 네 녀석도 진정한 곰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군, 참숯 1호의 정식명칭은 영웅검(英熊劍)인가.
어째 열풍대웅신검이나 흑염대웅신검에 비하면 상당히 이름이 초라한 것 같은데.
설마 검의 능력은 마음에 들지만, 생김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평소보다 성의 없는 이름을 지어준 건 아니겠지?
“잠깐만 기다려줘, 우선 스킬 정보 확인 좀 해보고.”
시스템 창을 열자, 검법의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 영웅검법(英熊劍法) (SS / Ex) >
- 위대한 곰이 자신의 제자를 위해 직접 창안한 절세의 신공입니다. 오직 위대한 곰의 진정한 제자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비고 : 신공의 숙련도가 상승할수록 스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제 1식 : 영웅란로(英熊攔路)
제 2식 : 영웅유운(英熊流雲)
제 3식 : 대웅수동(大熊守洞)
제 4식 : 대웅박호(大熊搏虎)
제 5식 : 대웅퇴산(大熊推山)
제 6식 : 비웅번신(飛熊飜身) (사용 불가)
제 7식 : ???
······.
검술의 현재 등급은 SS급.
초식은 모두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중 내가 이해한 것은 다섯 개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미완성 상태로도 SS급 검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말도 안돼······.’
황당할 정도로 높은 등급에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굉장하군요. 일곱 초식 중 다섯 개를 익혔는데 SS급이라니. 축하드립니다.”
이강혁 씨가 감탄한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조금 쓸데없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영웅, 대웅, 비웅이라······.’
등급도 등급이지만, 초식명이 나름 디테일이 살아있다.
‘영웅’이 들어가면 대충 기술이 주인 초식, ‘대웅’이 들어가면 힘이 주가 되는 초식, ‘비웅’이 들어가면 대충 속도가 주가 되는 초식.
검법 자체뿐 아니라 네이밍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모양이다.
‘그나저나, 한자를 제법 잘 아네.’
역시, 우리 애는 문과형 인재가 맞는 모양이다.
“후훗,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구나. 나머지 2식은 대련 속에서 천천히 깨달아 가도록 하거라.”
칭찬에 인색한 아기곰 선생께서는 평소와 달리 대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일곱 중 다섯을 이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성과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모처럼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을 때,
“그럼 웅 노사께서 만든 검법을 한 번 구경해봐도 되겠습니까?”
무서운 손주분께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
그렇게 쳐다보지 마, 무서워.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왠지 싸워줘야 할 것 같다고.
“아, 걱정 마십시오. 사숙조에게 비무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검술을 구경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천마의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언젠가는 이 무서운 손주분과도 대련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으, 살 떨려.’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하지만 피할 마음은 없다.
가짜 고미를 이기려면 더 강해져야 하고, 원조 아기곰과 다웅이를 제외하면 숲속 친구들 중 단연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게 이 무서운 손주분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안돼.’
지금은 검법을 익히는 게 우선이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검법으로 대뜸 천마와 붙어본다고 성과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마침 잘 됐군요. 제가 소싯적 만든 검술에 천마신검까지 가지고 있는 이 노사가 있으니, 사숙조와 이 노사의 비무를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천마의 제안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먼저 몬스터를 상대로 연습을 좀 해보고, 그 다음 대련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강혁 씨와 다시 대련을 하는 게 무섭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선 몬스터를 상대로 연습을 좀 해보고,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 가능하면 이기고 싶고.
내 감이 맞다면, 지금의 이강혁 씨는 문경준보다도 몇 수는 위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군요. 던전을 수배해 보겠습니다.”
이강혁 씨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강혁 씨, 혹시 S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몬스터로 가능할까요? 머리도 좋으면 좋고요.”
나의 요구사항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침 검술 수련에 도움이 될만한 보스 몬스터가 있기는 한데······. 저희 쪽 소유 던전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현재 A급이나 S급 개방형 던전은 대부분 4대 길드의 소유였다. 그리고 4대 길드 중 셋이 웅왕 연맹 소속이니, 우리 소유가 아니라면 패왕이 그 던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문경준이 S급 던전을 내주겠습니까? 하나만 없어져도 엄청난 타격일 텐데요.”
이강혁 씨의 입에서 문경준의 이름이 나오자, 무서운 손주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노사, 그렇게 돌려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휴, 무서워.
이거 눈치 빠른 거 봐라.
이강혁 씨가 문경준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 의도가 명백한 행동이었다.
우리가 말을 꺼내면 문경준이 거절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넌지시 그의 후원자인 무신의 옆구리를 찌른 거지.
“가보시지요.”
아니나 다를까, 눈치 빠르고 화끈한 손주분은 곧바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세에서는 마수굴이 꽤 가치가 높다고 들었습니다. 웅 노사의 새로운 검법을 구경하는 값이라기에는 뭐하지만, 제가 내도록 하지요. 마침 제 사도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있으니 말입니다.”
흠흠······.
손주님, 그런데, 던전 입장료는 손주님이 내는 게 아니라, 문경준 씨가 내는 거 아니에요?
* * *
패왕의 본사 빌딩 앞.
“무, 무신이시여.”
자신의 후원자를 만난 문경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천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노사들께서 S급 마수굴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 내어드려라.”
워······. 이분 말하는 거 보소.
누가 보면 S급 던전 맡겨놓은 줄 알겠다.
문경준이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천마의 눈에 곧바로 살기가 돌았다.
“대답이 느리군.”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싫다는 것이냐?”
서릿발처럼 차가운 무신의 목소리에, 문경준은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렇게 굴러가는구나.
뭐, 어쨌든 손주님의 말 때문에 큰 마찰없이 던전에 들어가는 거니, 이것도 백천이 쏘는(?) 거라고 치자.
“그 던전을 검투사의 무덤으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강혁 씨가 콕 집어 던전을 정해주자, 문경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문경준.”
하지만 무서운 손주분의 짤막한 한마디에 그는 애써 인상을 펴며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 검투사의 무덤 >>
<< 몬스터 등급 A+~ S+>>
<< 클리어 조건 >>
- 검투사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자를 제거하세요.
<< 클리어 보상 >>
- ???의 대검, ???의 강철, ???의 증표
회귀자가 검술 수련에 적합한 곳이라며 우리를 안내한 곳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지하감옥 같은 구조의 던전이었다.
“이곳에 있는 몬스터는 전부 인간형입니다. 게다가 검술이나 창술을 익힌 지능이 있는 몬스터이니, 수련 상대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죠.”
그야말로 내 요구에 딱 맞는 장소.
게다가 출몰 몬스터 등급도 높은 편이라 ‘꿀벌처럼 일하자’의 마정석 수집 퀘스트를 진행하기에도 딱 좋은 곳이다.
‘그럼 온 김에 불도장과 신기술도 시험해볼까?’
내가 등급이 높은 던전을 원한 이유는, 검법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미뤄놨던 불도장 실험을 진행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개발한 신기술의 시험.
“그럼 시작하죠.”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내가 참숯 1호과 영지버섯을 손에 든 채 앞으로 나서자, 이강혁 씨는 천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뒤 천마신검을 뽑아 들었다.
아마도 검령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 아, 아으으······.
어슴푸레한 통로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자, 곧바로 부서진 도끼와 검을 손에 든 인간 형태의 몬스터 둘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수하! 너의 검법을 보여다오!”
좋아, 그럼 한 번 아기곰 선생의 선물 꾸러미를 풀어볼까?
- 쉬이익!
군데군데 부서진 갑옷을 입은 두 검투사가 달려드는 순간,
“영웅란로!”
나는 곧바로 스킬명을 외치며 손에 든 참숯 1호를 어지럽게 휘둘렀고,
- 쩌저저저정!
시끄러운 쇳소리와 함께 벌겋게 달아오른 참숯이 춤을 추며 검과 도끼를 그물처럼 에워쌌다.
“오, 오오오오! 수하!”
참숯 1호의 불씨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모습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아기곰은 더욱 흥분하여 목소리를 드높였다.
‘좋아, 여기서······.’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나는 곧바로 고미가 사용했던 다웅이의 죽봉으로는 할 수 없었던 기술을 그 위에 끼얹어보았다.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이 초식은 단순히 수비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 화르륵!
곰기를 조종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꽃잎처럼 흩날리던 불꽃들이 휘몰아치며 두 몬스터를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우, 우웃! 수하! 이, 이 몸의 초식을 완벽하게 이해했구나!”
폭풍처럼 몰아치는 화염검기의 모습에, 아기곰은 던전이 떠나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를 칭찬해주었고,
“호오······. 사숙조, 그새 상당히 강해지셨군요.”
대놓고 나의 약함을 지적하던 천마마저 조금 감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 장난 아니네.’
심지어 나 역시 내가 펼친 초식의 위력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지금 나는 분곰쇄신을 활성화한 상태다.
그것도 꽤 뜨끈한 온도로.
즉, 지금 펼친 초식은 잘해야 원래 위력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이 정도면······. 정말로 해볼만해.’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참숯 1호를 달구었다.
이번에는 고미가 만든 검법이 아니라, 내가 직접 개발한 기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