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4 희대의 날먹 헌터.
‘대체 뭐지?’
나는 지금 지극히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아니지, 문자 그대로 온몸을 불 살라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방금 전까지도 이 한 몸 불태워 수련에 매진했고.
그런데 왜 숲속 친구들이 총파업에 들어갔을 때랑 같은 일이 벌어진 걸까?
‘나 때문은 아니야.’
상황으로 보아, 내 행동 때문에 빨간 상태창이 뜬 건 아니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관리자의 예상을 벗어난 ‘상정 밖’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 정도.
‘진짜······. 일처리 똑바로 안하냐?’
사람을 이렇게 굴려 먹을 거면, 긴급 상황 같은 건 만들지 말라고!
이래놓고 또 나한테 야근 시키려고!
이 망할 무능하고 악독한 고용주 같으니.
이에 참을 수 없는 의문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나는 곧바로 시스템 창을 열었다.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 퀘스트 제한 시간 : D - 100 >
그러자, 새빨간 글씨로 표시된 디데이 카운트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자, 잠깐······. 이게 뭐야.’
깜짝 이벤트 같은거면 좋겠지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악몽의 지배자가 현세를 침공하기까지 100일 남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가짜 고미가 완성될 때까지 100일 남았다는 뜻?
“우웅? 수하, 왜 그러느냐?”
그때, 단맛 중독자 아기곰이 초코바를 핥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무신의 사도인 문경준을 꺾은 것이 못내 기분이 좋은지, 녀석의 꼬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왜, 또 무슨 퀘스트 떴냐?”
반면, 봉식이의 얼굴은 살짝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 표정만 보고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린 듯 싶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저 녀석이니까.
그나저나, 가뜩이나 무섭게 생긴 놈이, 인상까지 쓰니 더욱 살벌하군.
“잠깐만.”
이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시스템 창을 가시모드로 전환했다.
예전이었다면 괜히 불안한 마음에 일단 내가 먼저 내용을 확인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면 친구들에게 보여줬겠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무엇이든, 나 혼자 끌어안고 끙끙거려서는 안 된다는 걸 고미와 함께 지내며 배웠으니까.
“사실 나도 뭔지 못 봤어. 같이 보자.”
시스템 창을 가시모드로 바꾸자,
“불길하네.”
“조금 불안하군요.”
봉식이와 이강혁 씨의 미간에는 곧장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왜, 왜 그러시죠?”
지금 상황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이주혁 씨도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둘 있었으니······.
“흐, 흐흠! 그렇구나! 화, 확실히 좋지 않은 징조다!”
“아, 아웅······!” (나, 나도 그런 것 같아!)
바로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과 그 동생이었다.
‘음, 이해 못했군.’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공으로 보나, 더듬거리는 말투로 보나, 절대 이해 못했다에 초코바 한 박스, 콜라 한 박스 걸 수 있다.
돈도 많이 버는데 너무 쪼잔한 거 아니냐고?
다 애들 건강 생각해서 하는 소리다.
탄산과 당은 건강의 적이라고.
가뜩이나 요즘 고미 배가 나오는 것 같아서 걱정인데 말이야.
어쨌거나, 굳이 왜 이게 불길한 건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뭐, 퀘스트 내용을 보면 대충 이해하겠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에서 엉뚱한 쪽으로 생각이 빠지거나 숫자에 약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머리가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 메인 퀘스트 : 진정한 영웅(英熊)이 되어보자! >
-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거대한 악의 무리가 모든 준비를 마쳐가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하나가 되어 거대한 악을 무찌르세요.
“으음······.”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의 내용을 본 아기곰의 표정이 곧장 심각하게 변했다.
‘역시 그 디데이 카운트는······. 가짜 고미의 완성을 의미하는 건가?’
물론 현세를 침공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그 밖에도 많겠지만, 역시 악몽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건 그 녀석일 테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경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고양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려보았다.
< 달성 조건 >
1. 가짜 고미를 물리칠 것.
2. 만수왕을 물리칠 것.
3. 드래곤 로드를 물리칠 것.
4. 악당들의 우두머리인 ???를 물리칠 것.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4번 항목이 가리키는 게 악몽의 지배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 달성 보상 >
1. Gomi급 스킬 획득권.
2. ??? 소환권.
마지막으로 보상란을 확인하는 순간, 어쩌면 오래된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소원은 Gomi급 스킬을 얻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곰돌이 삼형제와 가족들, 숲속 친구들과 오순도순 워라밸 라이프를 즐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니까.
‘역시 저 물음표는 관리자겠지?’
하지만 관리자를 만나서 잊지 못할 한 방을 날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지 않나?
악덕 고용주나, 상사의 뺨을 때린다거나, 뭔가 통쾌한 복수를 해주는 거 말이다.
그걸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왜 고미급 스킬을 얻는 게 퀘스트 완료 전이 아니라 퀘스트 완료 후지?’
가짜 고미와 맞서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그 전에 고미급 스킬을 주는 게 이치에 맞다.
“뭔가 이상하군요.”
이강혁 씨 역시 나와 같은 대목에서 의문을 느꼈는지, 팔짱을 낀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미급 스킬을 주려면 싸우기 전에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뒤이어 봉식이도 이 보상을 주는 타이밍이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마 최종 보스 뒤에 또 숨겨진 흑막이 있다던가······.
‘아니야, 그럼 뭔가 힌트를 줬겠지.’
고미도 모르고, 관리자도 모르는 적 따위가 있을 리는 없으니까.
‘대체 왜 뒤늦게 이런 보상을 주는 거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관리자는 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고미급 스킬을 얻어 더 강해지는 게, 나에게 그리 매력적인 보상이 아니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차라리 아웅이 다웅이용 페달 카트 같은 게 나을 텐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것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테고.
주려면 세 대는 줘야지.
하여간 일은 더럽게 많이 시키면서, 보상은 쥐꼬리만큼 주는 놈이다.
아, 오해하지 마라. 능력치랑 스킬 같은 건 보상이 아니다.
그건 계속 일 떠맡기려고 주는 거잖아.
설마 분곰쇄신에 피로야 가라, 이런 걸 보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
그렇게 이강혁 씨와 봉식이, 내가 나란히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후훗! 그런 녀석들 따위는 수하 스스로 단련하여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긍정의 아이콘, 해피 아기곰 선생께서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씨익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치더니, 오늘 내가 문경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걸 보고 조금은 마음이 놓인 걸까?
“그러게.”
고미의 긍정적인 해석을 듣고 보니, 나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후후, 게다가 우리에게는 백일이나 되는 시간이 있지 않느냐! 그 사이에 이 몸이 수하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마! 이제 기초는 갖춘 것 같으니 말이다!”
······.
진짜냐, 문경준을 꺾은 게 본격적인 수행을 위한 ‘기초’라고?
언제나 그렇지만, 기준이 높아도 너무 높은 거 아니냐?
“대체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냐?”
우리가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체육관 구석에 쳐박혀 있던 문경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우울한데, 말투는 어떻게 안 고쳐지나 보네.’
표정도 잔뜩 풀이 죽어있고, 목소리도 힘이 없는데, 말투만 평소처럼 거칠다.
참 곧 죽어도 센 척을 하는 캐릭터구나.
“글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대답을 하려던 찰나, 이강혁 씨가 내 말을 가로채듯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문경준에게 이 일을 말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인가?’
물론, 이강혁 씨의 판단을 믿기는 한다.
나 역시 이 사람을 믿을 수 없어서 웅왕 연맹에 패왕을 포함시키지 않은 거고.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협력을 요청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로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걸까.
‘대체 전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아저씨.’
물론 김춘식한테 했던 짓으로 보나, 우리의 도발에 넘어가 무신을 현세에 강림시키는 것으로 보나,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 수하씨, 문경준은 안 됩니다. ]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이강혁 씨가 웅톡방을 통해 한 번 더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 이 아저씨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인가요? ]
[ 일의 전말을 알고 나면, 우리가 아니라 저쪽에 붙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성을 가진 놈입니다. 이미 전력이 있기도 하고요. ]
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람이구나.
‘하긴, 전생에도 도심 한복판에 생성된 던전을 돈 때문에 계속 유지하다가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지.’
그것 때문에 봉식이는 만수왕의 사도가 됐고.
생각해보니 새삼 괘씸하군.
[ 알겠습니다. 그럼 이강혁 씨 말대로 할게요. ]
이에 나는 일단 이강혁 씨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꺼라. 그리고 던전 문제는 우리가 보상을 하지. 앞으로 생성될 A급 던전 하나의 입찰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어때?”
이강혁 씨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후······. 좋다.”
고미에 나, 봉식이까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셋이나 있어서일까?
문경준은 아무런 불만없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상 A급 던전 하나를 그냥 넘겨 준거나 다름이 없으니, 불만을 갖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럼 나는 이제 가봐도 되겠나?”
그리고는 안쓰러울 정도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형,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니야?”
문경준이 사라지자, 봉식이가 못 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괜찮아. 조만간 관리는 더럽게 어렵고 돈은 안 되는 A급 던전이 하나 열릴 거거든. 결국 아까운 개방형 던전을 스스로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정도로 골칫덩이인 던전이.”
음······. 역시, 이분도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후훗, 수하! 그럼 이제 네 능력치와 이능이 성장했는지 확인해 보자꾸나!”
대충 성가신 일이 마무리된 듯 하자, 고미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어서 능력치를 확인해 보라고 나를 재촉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새 능력치가 올랐으려고?”
“아니다, 이 몸이 보기에 너는 틀림없이 강해졌느니라!”
확신에 찬 슈퍼 먼치킨의 한마디에, 괜스레 나까지 마음이 들떴다.
“자, 그럼······.”
약간의 기대를 품고 상태창을 열자,
< 현재 능력치 >
힘 : 67(+3), 민첩 51(+3), 체력 42(+2), 마력 : 20(+1)
정말로 힘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1씩 올라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지어 힘은 2포인트나 상승했다.
“지, 진짜네······.”
황당하다.
지금 내 순능력치는 S급 평균 정도.
그리고 S급 헌터들이 능력치 1을 올리기 위해서는 보통 짧게는 서너 달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 번에······.
‘진짜로 남들이 보면 밸런스 똥망이라고 하겠네.’
아니지, 그래도 맛있는 거 몇 번 먹이고 능력치 포인트 다섯 개에 스킬 포인트까지 타 먹던 희대의 날먹 성장법에 비하면 양심이 있는 건가······.
아니지, 횟집 아들이 날로 먹는 게 뭐가 문제가 돼?
“오, 오오! 역시 이 몸의 눈이 정확했구나!”
능력치가 성장한 것을 확인한 아기곰 선생께서는 솜방망이를 두드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여기에 방패에 새로운 검의 능력치 보너스까지 합치면, 능력치는 거의 100에 육박하겠군요.”
이강혁 씨는 아이템 보정치까지 고려한 나의 능력치를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능력치는 아무리 높아도 부족했다.
가짜 고미의 능력치는,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그 차이를 메꾸려면 역시 스킬 뿐인데······.’
그렇게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지 머리를 굴려대고 있을 때,
“후후······. 좋다, 드디어 때가 된 것 같구나. 수하, 내일부터 이 몸과 함께 특훈에 들어가자꾸나. 너에게 위대한 이 몸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을 주마.”
1타 강사, 아기곰 선생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