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2 수하도 강하다.
“그만!”
우렁찬 목소리가 체육관 안에 메아리치자, 봉식이도, 문경준도 약속이나 한 듯 주먹을 멈췄다.
‘음······. 이게 슈퍼 먼치킨의 위엄인가.’
봉식이는 그렇다 쳐도, 설마 문경준까지 고미의 말 한마디에 싸움을 멈출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에이, 아저씨 운 좋은 줄 알아. 우리 막내님이 좀 무서워서 말이지.”
봉식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녀석이 이미 문경준을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고 판단했음을 직감했다.
저놈의 성격은 강강약약.
강한 사람한테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 약하다.
설령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태도가 누그러드는 희한한 놈이랄까.
‘게다가 그 감이 묘하게 잘 맞는단 말이지.’
그리고 상대가 자기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판단하는 저놈의 감은, 살벌할 정도로 정확하다.
외모 가지고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생긴 것만큼이나 짐승 같은 육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아웅이!”
그때, 말 한마디로 둘의 싸움을 끝내버린 슈퍼 아기곰이 힘찬 목소리로 자신의 아우를 호출했다.
‘아, 안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지금 이 녀석이 하려는 행동은 손x공이 녹색 괴물에게 하려던 짓하고 똑같은 거라는 걸.
문제는 내가 손x반이 아니라는 거지.
무슨 소리냐고?
“저 멧돼지 녀석을 회복시켜 주거라. 힘만 조금 빼려 했는데, 너무 맞은 것 같구나. 이래서야 전혀 수련에 도움이 안 되지 않겠느냐.”
이런 소리다.
나랑 저 괴물 같은 아저씨를 붙이기 전에, 저 아저씨를 완전히 회복시켜주겠다는 끔찍한 소리.
‘후, 어쩔 수 없군······.’
하지만 나 김수하, 우주 제일의 먼치킨이 인정하는 모리배로서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지.
고미 너에게 꿀주먹이 있다면, 나에게는 지혜가 있다.
승부다!
“아웅!”
임무를 부여받은 아웅이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자, 문경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심지어 아웅이가 가까이 다가오니 불안한 듯 초점이 흔들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
‘뭐야, 설마······.’
전형적인 특정 공포증 증상이었다.
공포증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두려워하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회피 반응이다.
핏기가 가시고 식은땀을 흘리는 건 명백한 공포.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건 회피에 해당한다.
아웅이가 가까워질수록 심하게 땀을 흘리는 걸 보아하니, 이미 고미를 넘어 ‘아기곰’ 형태를 한 모든 것에 대한 공포가 뿌리 깊이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천하의 문경준이 아기곰 공포증이라니······.’
하긴, 생각해보니 이강혁 씨도 한동안 초코바 공포증에 시달렸었지.
그쪽은 고미랑 자연스럽게 붙어 지내면서 초코바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지만, 이쪽은 단기간에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
‘좋아······. 일단 메모.’
이것도 써먹을 수 있겠군.
이제 다음 단계다.
아웅이가 손을 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지.
“고미, 아웅아, 잠깐만!”
“우웅?”
“아웅?”
내가 손을 들어 아웅이를 멈춰 세우자, 아기곰의 눈이 반짝하고 예리한 빛을 발했다.
한눈에 봐도 내 행동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 명백한 눈빛이었다.
“무엇이냐, 수하. 설마 위대한 이 몸의 제자가 저 멧돼지를 두려워해 잔꾀를 부리는 것은 아니겠지?”
······.
매번 그렇지만, 어째서 이런 일에서만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냐.
‘침착하자.’
하지만 이 정도 시련은 이미 예상했다.
구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까지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거라 생각한 거냐.
‘가자, 김수하. 반격의 봉화를 올리는 거야.’
그래, 오늘, 드디어 기나긴 압제에 짓눌린 인간 김수하의 혁명이 시작되는 거다.
“그게 아니라, 수다르님이 부탁하신 거 있잖아.”
“우웅?”
일단 아기곰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나는 잽싸게 품 안에서 산신령님이 약효를 확인해 달라며 넘겨준 단약 세트를 꺼냈다.
“오, 오오. 그렇구나. 수다르가 그 단약들의 효능을 확인해 달라 하였지.”
‘좋아, 걸려들었어.’
아웅이와 다웅이가 선과를 먹고 파워업 했던 날, 수다르 님은 나에게 일품(一品)부터 오품(五品)까지 등급별 단약의 효과를 확인하고 기록해서 넘겨달라고 부탁하셨다.
하지만 던전에서도, 참숯 1호의 제작 과정에서도 딱히 쓸 일이 없어 이 약을 사용하지 못하고 가지고만 다녔다.
‘즉, 이 자리에서 수다르 님이 부탁한 약을 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게다가 단약을 받을 때, 그 자리에는 아웅이도 있었고, 고미도 있었으니,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고 해서 의심을 살 리는 없다.
“최대한 빨리 알려 드리는 게 좋으니까, 저 아저씨한테 써보자. 봉식이는 자체 회복 스킬이 있어서 약효를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잖아. 약 때문에 치료가 된 건지, 자기 스킬로 치료가 된 건지 정확하지가 않으니까.”
완벽하다, 김수하.
훌륭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다.
“흐음······. 그것도 그렇구나.”
아니나 다를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아기곰도 나의 논리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다르님의 약이나 아웅이의 스킬이나 문경준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 아니냐고?
무슨 소리.
‘아웅이의 회복 스킬은 틀림없이 A급 이상이라고.’
반면 수다르 님의 단약이라고는 해도 일품이나 이품 회복약이라면 그 정도 효과는 나지않을 테고.
굳이 회복약을 일품에서 오품으로 나눠놓은 이유는, 부상의 정도에 따라 다른 약을 쓰기 위해서일 테지.
‘귀한 약일수록 좋은 약재가 많이 들어가는 건 상식이니까.’
내가 보기에, 이 신약은 토생원과 수다르님이 함께 만든 신약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자주 만들어왔던 단약이라면 굳이 실험을 통해 약효를 확인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아마 실험의 목적은 부상 정도에 따라 약재의 배합을 달리하고, 이를 통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약재의 재고를 관리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리고 이 추론에 따르면, 오품은 당연히 아주 가벼운 부상에나 쓰이는 물건일 거다.
체력 회복 효과도 꽤 낮을 거고.
‘훗······.’
좋아, 모든 게 완벽하군.
이번만큼은 내 승리다.
효과가 가장 떨어지는 약을 먹여서 최대한 덜 회복된 상태로 싸우는 거야.
“문경준 씨, 이거 드세요.”
내가 ‘오품’이라고 쓰인 약병을 내밀자, 문경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제가 문경준 씨하고 대련을 좀 하고 싶은데, 부상을 당하신 상태로 하면 불공평하잖아요. 그래서 약을 드리는 거예요.”
“이 새끼가······. 지금 나를 대상으로 약효가 얼마나 좋은지 실험을 하겠다는 거냐? 이 약, 제대로 된 거 맞아?”
문경준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자,
“네 이놈! 수다르는 천하제일의 명의다! 너 같은 악당 놈이 감히 의심해도 되는 녀석이 아니란 말이다!”
분노에 찬 아기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아, 알겠다. 머, 먹지.”
그러자 아기곰 공포증에 걸린 불쌍한 아저씨는 허겁지겁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응?”
단약을 먹은 문경준은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껌뻑이며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이거, 효과가 좋은데?”
“흥, 그것 보거라! 수다르는 최고의 의원이라 하지 않았느냐!?”
이후 나는 문경준 씨에게 통증이 어느 정도나 사라졌는지, 상태창 수치상으로는 체력이 몇이나 회복됐는지를 물어본 후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
약효는 생각보다 뛰어났다.
체력은 15 정도가 깎였지만 5 정도가 회복됐다고 했고,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맞은 부위는 거의 멀쩡해진 상태.
‘이 정도만 해도 성공이야.’
기대했던 것보다는 봉식이에게 입은 타격이 적어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아웅이가 손을 댔다면 틀림없이 완전히 쌩쌩한 상태로 돌아갔을 테니까.
어쩌면 싸우기 전보다 더 기운이 넘쳤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완전히 파김치가 된 상태로 대련을 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덜 맞고 체력과 기진을 소진하는 거지, 파김치가 된 문경준을 두들겨 패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이강혁 씨 때처럼 너무 많이 맞고 싶지는 않은 것 뿐이라고.
나도 강해지고 싶고, 수련도 제대로 할 생각이다. 그래야 가짜 고미를 상대할 수 있으니까.
다만 조금 덜 두들겨 맞고도 수련을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맞아야 하냐는 거지!
너무 당연한 요구 아니냐!
적당히 맞고, 오래 싸우면 되는 거잖아!
‘윽!’
흥분했더니 또다시 가슴에서 뜨끈한 게 올라오는 느낌이다.
이게 주화입마라는 건가.
‘평정심, 평정심.’
잠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린 나는 문경준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정중하게 대련을 요청했다.
“자, 그럼 이제 저랑 대련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그 정중한 태도가 더욱 문경준의 화를 돋운 모양이었다.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냐?”
그의 얼굴은 무서운 아기곰 선생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마저 잊은 듯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럴리가요. 원래 약속된 대련이잖아요.”
“아······. 그래? 그럼 여기서 내가 널 죽여도 문제가 없는 거냐? 약속된 거니까?”
······.
아저씨, 저한테 왜 그래요.
내가 약도 주고, 치료도 해주고, 그랬잖아요······.
아닌가, 병 주고 약 주고 다시 병 주려고 하니까 화가 나는 게 당연한 건가?
“오냐, 시작하지.”
이어서 문경준은 해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짐승처럼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우씨!’
나 역시 곧바로 참숯 1호와 삼색 영지버섯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 쩡!
다음 순간, 커다란 영지버섯 위로 바위 같은 주먹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이 귀청을 때렸다.
“윽!”
동시에 억지로 눌러놓았던 화기(火氣)가 치솟으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안돼.’
이제 겨우 공격 한번 막았을 뿐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
대체 이 상태로 무슨 수련을 하라는 거야!
“뭐야, 하도 건방을 떨길래 네 친구보다는 강할 줄 알았는데. 무기까지 꺼내놓고 주먹 한방에 휘청거리는 거냐?”
비틀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내 모습을 확인한 문경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죽거리며 가볍게 손목을 돌려댔다.
“흥! 네 이놈! 위대한 이 몸의 제자는 너보다 강하다!”
“아우우웅!”
내가 무시를 당하자, 아기곰 형제는 곧바로 문경준의 말을 반박하며 벌컥 성을 냈다.
‘고, 고미······.’
응원해 주는 건 고마운데······.
둘 중 하나만 해주라. 내가 맞기를 바라는 거니, 이기기를 바라는 거니······.
“게다가 무기가 바뀐 것 같은데, 전보다 좋은 걸로 바꾼 거 아닌가? 뭐 이렇게 시원치 않아?”
봉식이에게 사실상 패배한 게 분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병주고 약주는 우리의 태도에 열이 받은 걸까.
문경준의 표정에는 살기가 가득 묻어났다.
‘안되겠어. 막지 말고 피하자.’
다리에 힘을 주고 운기를 시작해 허곰답보를 쓸 준비를 마치자, 다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공격을 막을 때보다는 훨씬 열기가 덜하니, 역시 피하는 게 더 낫겠지.
“어디 뭘 보여주려고 그러나 한 번 보자고!”
또다시 주먹이 날아드는 찰나, 나는 허곰답보를 사용해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문경준의 공격을 피해냈다.
“속도는 제법이군!”
공격할 때마다 일일이 대사치지 말라고.
‘일단 기회를 봐야지.’
나는 온 정신을 방어에만 집중한 채 문경준의 공격 패턴을 읽어내려 애썼다.
이 사람이 싸우는 건 이미 두 번이나 봤다.
그러니까, 공격 패턴도 조금이나마 알고 있고.
거기에 가짜 고미를 상대하며 더욱 예민해진 감각과 경곰술이라면, 피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다.
- 쉭, 쉭!
망치 같은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섬뜩한 소리가 귓속을 파고 든다.
- 쾅!
그렇게 서너 번 정도 공격을 피했을까, 또다시 쇳덩이 같은 주먹이 방패 위를 강타하며 온몸으로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맞은 탓에 첫 번째 공격을 막았을 때처럼 화기가 역류하지는 않았다.
‘능력치는 나보다 낮은 것 같은데.’
참숯 1호 불가마가 선사하는 뜨끈함 때문에 제대로 쓸 수는 없지만, 단순 능력치 총합으로만 따지자면 내가 위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막상 붙어보니, 이 사람의 전투 기교 는 이강혁 씨보다 못한 수준이다.
‘의외로 할만한데?’
거기다 봉식이에게 맞은 곳이 완벽하게 회복되지는 않은 탓인지, 중간중간 움직임이 허술하다.
‘한 번 시험해볼까?’
시험 삼아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참숯 1호를 휘두르자,
-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을 타고 단단한 암반을 두드린 것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씁······.”
충격은 받지 않은 듯 하지만, 어쨌든 반격에 성공했다.
‘이거, 잘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순간, 오늘 대한민국 최강의 파이터를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심지어 수갈량의 책략을 다 써보기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