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55화 (255/300)

EP.255 말이 씨가 된다.

“네? 왜요?”

이강혁 씨는 회귀자다.

나와 고미의 등장으로 너무 많은 게 변해버려서 그 지식을 쓸 일이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우리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의 짤막한 한마디는 내게 적잖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아웅님은 북극곰이니 눈을 좋아할까 해서 이 던전을 수배한 건데, 운이 좋았네요.”

이강혁 씨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음······. 아무 던전이나 수배한 건 줄 알았는데, 일부러 눈 내리는 지형을 선택하신 거구나.

고미에 대한 광신도의 애정(?)과 신앙심은, 그 형제들에게도 이어지는 모양이다.

“던전 클리어 보상 중에 열쇠가 있던 것, 기억하십니까?”

“네.”

“그 열쇠, 설인의 보물 상자라는 인벤토리를 여는데 쓰는 아이템입니다.”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슨 휴대용 아이스박스도 아니고 냉기를 보존해주는 옵션이 붙은 인벤토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 했더니, 이런 용도로 쓰이는군요.”

역시, 대충 그런 옵션이 붙은 아이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저스티스에서 개방형 던전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길드의 주 수입원은 크게 세 가지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의 부산물과 게이트를 처리하고 받는 보상금.

폐쇄형 던전을 클리어하고 얻는 부산물.

마지막으로 개방형 던전에서 얻는 아이템이나 마정석, 마력철 같은 물건들.

분류로 따지면 세 가지지만, 사실상 대형 길드에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을 안겨주는 건 세 번째, 개방형 던전 뿐이었다.

즉, C급이라고는 해도 개방형 던전 하나를 완전히 클리어해 버린다는 건, 안정적인 수익원 하나를 포기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곰 선생님을 흉내 내는 그 가짜를 없애지 못하면 개방형이고 폐쇄형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텐데요.”

그러나 이강혁 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앞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언제봐도 참 시원시원하시단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일 년에 몇억 정도는 수익이 나오는 던전을 이렇게 흔쾌히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통은 돈도 지키고 얼음 칼을 보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할 텐데 말이야.

“빨리 마정석을 채취하고 설인의 동굴로 가보죠. C급 던전이라고는 해도 날씨가 제법 추우니,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하니, 왜 이강혁 씨의 인품에 반해 저스티스에 가입한 헌터가 많은지 알 것 같다.

만일 내가 고미를 만나지 않고 헌터가 됐더라면, 나라도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으니까.

“후후, 허수아비. 역시 너는 정의로운 녀석이다. 옛말에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 하였지. 참으로 너에게 어울리는 말인 것 같구나.”

그때, 고미가 이강혁 씨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모두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 어째서 이 녀석이 저런 어려운 말을 알고 있는 거지?’

하긴, 삼국지도 알고 있고, 만천화웅이니, 허곰답보니, 이기어곰이니 하는 이상한 기술명도 결국은 한자를 잘 알아야 칠 수 있는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안 어울려.’

물론 숫자에 약한 것 말고는 제법 똘망똘망한 아기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안 어울린다고.

“아, 아웅! 우웅!” (괴, 굉장해! 혀, 형은 아는 것도 많구나!)

아기곰치고는 제법 어려운 말을 하는 형의 모습에, 아웅이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커다란 눈을 반짝였다.

“후훗, 아웅이. 너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진정함 곰이라면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법이니.”

수상하다, 수상해.

조금이라도 멋져 보이는 게 있다면 일단 따라 하고 보는 아기곰이, 저런 말들을 여태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분명 최근에 저런 말들을 배운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대체 고미가 어디서 저런 말들을 배웠을까 고민하며 손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마정석 채취 작업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어디 보자······.’

아기곰 형제가 몰아온 몬스터의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에 나는 마정석을 캐자마자 퀘스트가 얼마나 완료됐나 확인해 보았다.

< 메인 퀘스트 : 꿀벌처럼 일하자 >

< 달성 조건 >

- 일등 자라 수리에 필요한 마정석 모으기

- S급 마정석 5개 (0/5)

- A급 마정석 50개 (0/50)

- B급 마정석 100개 (17/100)

- C급 마정석 150개 (153/150)

‘역시, C급 마정석 채취는 끝났네.’

거기다 B급 몬스터가 꽤 섞여 있었는지, B급 마정석도 생각보다 많이 모여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퀘스트가 끝날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등급의 몬스터까지 몰이 사냥이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A급 50마리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게 지금 숲속 친구들의 실력이니까.

‘그나저나 큰일났네.’

그렇게 설인의 창고를 향해 이동하던 와중, 한가지 문제점이 떠올랐다.

‘오늘 너무 편한데.’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고생을 즐기는 변태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나는 워라밸파라고 워라밸파.

대충 먹고 살만한 수준만 벌면 돈을 더 벌고 힘든 것보다, 그냥 편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게 좋은 사람이란 말이다.

‘문제는 지금이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

다만 악독한 관리자는 나에게 ‘피로야, 가라!’라는 악랄한 스킬을 줬고, 그 효과를 보려면 체력이든 기력이든 바닥을 쳐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만천화웅이라는 큰 기술을 두 번이나 써서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나가떨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도 빠르게 기력이 회복되는 게 느껴지고.

게다가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 물소 떼한테 깔려볼 걸 그랬나.’

아니다, 김수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말려들지 말자.

너무 시달려서 머리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그렇게 속으로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좀 더 알차게(?) 보내고 곯아떨어질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봉식이가 숲속에 남아있던 몬스터를 처리하는 소리였다.

“아직 잔몹이 좀 남아있네.”

일격에 설인을 즉사시킨 봉식이는 손에 낀 권갑의 감촉을 확인해 보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정석을 챙겼다.

“그거, 쓸만해?”

“어, 역시 용궁 보물창고에 있던 거라 그런지 엄청 좋다. 왜 장비 빨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실감이 좀 나네.”

그간 아무런 장비도 사용하지 않았던 녀석이라 그런지, 뒤늦게 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무기는 중요하지.’

이에 나는 설인의 보물창고에 들렀다 바로 이유찬 씨를 찾아가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무기는 가급적 빨리 수리하는 편이 좋으니까.

게다가 이래저래 돌아다니다보면 조금이라도 더 피곤해지지 않겠나.

“여기입니다.”

그렇게 드문드문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이동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크네요.”

우리의 눈앞에는 얼핏 보기에도 3,4미터는 되어보이는 커다란 동굴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강혁 씨의 뒤를 따라 거대한 마수의 아가리 같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보다 한층 훈훈한 공기에 몸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아우웅······.”

하지만 아웅이는 따뜻한 것보다 추운 게 좋은지, 조금 아쉽다는 듯 살짝 귀를 눕히며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아웅아, 아쉬워? 추운 게 좋아?”

나의 질문에 새하얀 아기곰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도 딱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역시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좋은 거겠지.

아니면 이것도 선과를 먹고 나서 생긴 변화일지도 모르고.

“자,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

어두운 동굴 안을 한참이나 걸어가던 이강혁 씨가 막다른 골목 앞에 우뚝 멈춰서며 말했다.

그리고는 벽면을 더듬어 어딘가를 꾹, 하고 누르자······.

- 드드드드득!

바위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막혀있는 것으로 보이던 벽면에 통로 하나가 생겨났다.

“호오오······.”

“아웅!?”

비밀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호기심 많은 두 아기곰 형제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얼른 그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설인의 보물창고 안에는, 딱히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마정석 몇 개와 마력철,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적, 날카로운 발톱 하나, 그리고 휴대용 냉동고가 되어줄 열쇠 정도.

“아, 아웅!”

보물창고라서 뭔가 대단한 게 있을까 기대했지만, 설인은 생각보다 소박한 삶(?)을 즐기는 몬스터였나보다.

“그럼 대충 아이템 챙겨서 나갈까요?”

그때, 돌연 아웅이가 나에게 다가와 우물쭈물거리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 아웅······.”

녀석의 통통한 손가락이 향한 곳은, 설인의 부적과 발톱 위였다.

‘왠일이지?’

아기곰 삼형제가 먹는 것과 장난감, 타는 것 외에 다른 물건에 관심을 보이다니······.

“왜 그래? 갖고 싶어?”

나의 질문에 아웅이는 방긋 웃으며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혁 씨.”

“하하, 괜찮습니다. 아웅님이 갖고 싶다면 드려야죠. 어차피 저에게는 딱히 쓸 일도 없는 물건입니다.”

이강혁 씨의 말을 들은 고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솜방망이를 들어 발톱과 부적을 가리켰고,

“후훗, 허수아비. 역시 너는 좋은 녀석이구나. 아웅이! 오늘 우리를 따라와 준 선물이다! 친구에게 받은 물건이니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거라!”

“아웅!”

차가운 것을 좋아하는 백곰은 그 두 개의 아이템을 품에 꼭 안은 채 우리와 함께 던전을 벗어났다.

* * *

던전을 나온 이강혁 씨는 곧바로 저스티스의 실무자인 박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개방형 던전 하나를 해먹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사이, 나는 한유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찬 씨에게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연락이 안 되네.’

익숙한 한유진 씨의 목소리 대신,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이 돌아왔다.

‘용궁에 간 건가?’

토생원과 수다르님, 삼룡이 패밀리는 모두 용궁 수리조에 배정됐으니, 아마도 용궁에 가있는 모양이었다.

화원에는 이미 와이파이가 설치됐고, 통화권 이탈이면 던전이나 용궁인데, 던전에 간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아웅아, 우리 용궁 갈까?”

‘용궁’이라는 단어에, 아웅이의 커다란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변하며 동글동글한 꼬리가 흥분으로 바짝 곤두섰다.

“아, 아웅! 아웅!”

너비아니에, 맛있는 전에, 결정적으로 선과까지.

그 모든 것이 용궁에서 나왔으니, 아웅이 입장에서 용궁은 보물창고나 다름이 없겠지.

“아웅! 아웅!”

아르바이트를 쉬고 형들과 놀러(?) 나온 날 용궁까지 데려가 준다는 말에 잔뜩 신이 난 아웅이는 보기 드물게 오두방정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오늘은 제법 바쁘구나. 던전을 두 곳이나 돌고 곧바로 용궁이라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미는 무언가 기대하는 게 있다는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 불길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느낌이 안 좋다.

평소에도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 잦기는 하지만, 이 눈빛은 뭔가가 다르다.

아기곰 학자의 예리한 눈으로 보기에 이건······.

지리산에 오르던 날, 이강혁 씨와 대련을 하던 날, 나에게 빔을 쏘라고 시키던 날 등등······.

‘고, 고생, 아니, 수련을 시키기 전의 눈빛인데.’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용궁행을 앞두고 저런 눈빛을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본래 진짜 무서운 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수하, 체력이 많이 좋아진 것 같구나. 이제 그 정도로는 힘들지 않은 것이냐?”

흐뭇함과 뿌듯함이 묻어나는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 말이 씨가 된다더니.’

실수다.

오늘은 손님이 없다는 말을 하면 손님이 몰려온다는 알바생의 법칙을 잊고 있었다.

‘피로야, 가라’라는 악독한 스킬이 생긴데다가 가짜 고미를 상대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상황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는데.

“어서 용궁으로 가는 통로를 열어 보거라. 어서 이 몸의 걸작을 고쳐야 하지 않느냐?”

용궁으로 가자는 곰 선생님의 한마디에,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어서 아직 수다르 님이 넘겨준 단약들의 효과도, 아웅이의 치료 마법의 효능도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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