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4 아웅이와 수하의 콤비네이션.
“아웅아. 혹시 이 얼음 칼, 조금 더 작게도 만들 수 있어?”
“아웅!!!”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걸까?
아기곰 삼형제 중 가장 순하고 성실한 성격을 자랑하는 아기 백곰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우웅······!”
그리고는 새하얀 솜방망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더니, 곧바로 50센티 정도 크기의 얼음 칼 하나를 만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검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제법 정교한 모양새와 칼날을 가진 ‘제대로 된’ 얼음 칼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정한 의미에서 검을 만져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간 원조 아기곰이 만들어 준 것들은······.
‘그만, 여기까지 하자.’
이 이상은 마음속으로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째서 아웅이는 손재주가 좋은 거지?’
마법으로 만드는 건 직접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러서 제작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저 무저갱의 가장 깊은 곳에나 존재할 것 같은 원조 아기곰의 지옥의 솜방망이에도 한 가닥 희망이 남아있는 걸까?
“혹시 더 작게도 가능해? 지금 만들어준 칼의 절반 정도 크기로. 그리고 조금 더 단단했으면 좋겠어. ”
이어지는 나의 요구에 아웅이는 귀찮아하기는커녕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웅!”
순둥이 아기 백곰이 도톰한 솜방망이를 휘적거리자, 순식간에 다섯 자루에 달하는 얼음 단검이 불쑥 솟아났다.
‘이상하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 정도로 손재주가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에 나는 조금 더 정확한 비교를 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무릇 실험이라는 건 대조군이 명확해야 결과가 깔끔하게 나오는 거니까.
“아웅아, 정말 미안한데······. 방패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집에 가는 길에 콜라 큰걸로 사줄게.”
“아, 아웅!?”
콜라를 사준다는 한마디에 아웅이는 허둥지둥 커다란 얼음 방패를 만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아웅이는 이전에도 나에게 얼음 방패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계절이나 장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방패를.
그러니까 방패끼리 비교하면 조금 더 정확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겠지.
‘역시······. 늘었어.’
나는 그제야 아웅이의 손재주(?)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확신했다.
이전에 아웅이의 얼음 방패는, 말이 좋아 방패지, 조금 넙데데한 얼음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누가 봐도 방패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만큼 정교했다.
심지어 방패 위에 고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젤리 모양의 도장까지 찍혀있다.
도저히 지옥의 곰손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물건이 아니었다.
‘설마 이것도 선과의 효과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 외에 이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최근에 눈에 띄는 변화를 불러 일으킬만한 사건이라고는 선과를 먹은 것 밖에 없었으니까.
‘아쉽네.’
선과가 세 개였다면 웅티스트 선생님의 예술 세계에도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오, 오오! 아웅이! 손재주가 많이 늘었구나!”
고미 역시 아웅이의 얼음 공예가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열렬히 솜방망이를 두드리며 자신의 동생을 칭찬해주었고,
“아웅!”
형의 칭찬을 받은 아웅이의 커다란 눈은 귀여운 반달모양으로 변했다.
“호오······. 이 정도라면 위대한 이 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어떠하냐, 조만간 이 몸과 함께 가게 앞에 전시할 새로운 걸작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
······.
이상하다, 손은 이상해도 눈에는 문제가 없는 녀석이었는데······.
설마 진심으로 아웅이의 얼음 공예와 자신의 조물조물이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아웅이의 얼음 칼과 흑염대웅신검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고.
“고마워, 아웅아.”
“아웅!”
얼음 칼 세트에 이어 방패까지 순식간에 제작을 마친 진짜 명곰, 아웅 선생은 방긋 웃으며 콜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치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회사원이 맥주 한 캔을 꺼내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행동이었다.
“응? 아웅아, 너 그 콜라 어디서 났어?”
마법과도 같이 콜라를 소환(?)해내는 아웅이의 모습에, 봉식이가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아, 아웅!”
하지만 아웅이는 애써 못 들은 척 콜라를 들이켜며 황급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지······.’
괜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행동이군.
저 콜라가 어디서 나는지도 궁금하지만, 저건 분명 감출 게 있을 때 하는 행동인데······.
- 휘이이잉!
아웅이를 따라 던전의 조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닥치며 돌연 눈앞에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 설인의 정원 >>
<< 몬스터 등급 C~B >>
<< 클리어 조건 >>
설원의 동굴 속에 숨어있는 설인의 보물 창고를 찾아내세요.
<< 클리어 보상 >>
???의 부적, ???의 발톱, ???의 열쇠
‘음······. 아웅이가 좋아할만한 지형이네.’
“아, 아우우우우우웅!”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아웅이의 입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힘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그림처럼 새하얀 눈밭 위로 아기 북극곰이 젤리 자국을 남기며 오도도도 달려갔다.
“오오오! 아웅이! 함께 가자!”
아웅이가 달려서 흥분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눈을 좋아하는 걸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미 역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정신없이 흔들어대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니, 내 수련은······.’
정신없이 눈밭 위를 달리는 두 아기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수련을 하러 온 건지 이 녀석들과 놀아주러 온 건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았다.
손에 들린 채 서늘한 냉기를 뿜고 있는 얼음 칼들만이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 피크닉이 아님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외롭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외로워. 소외당한 느낌이야.’
문득 나는 여기에 왜 온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잠깐 수련을 미루고 이 녀석들과 눈싸움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아웅이! 너는 저쪽으로 가거라! 이 몸은 이쪽으로 가겠다! 수하를 위해 괴수들을 끌어오는 것이다!”
“아웅!”
그때, 용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은 아기곰이 매혹적인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숲속으로 달려갔다.
“흠, 아쉽네요. 곰 선생님과 눈싸움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강혁 씨는 조금 아쉽다는 듯 손에 든 눈 뭉치를 탁탁 털어냈고,
“그러게. 꽤 재밌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봉식이 역시 솥뚜껑 같은 손에 들려있던 눈뭉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내 생각은 두 사람과 달랐다.
기곰술의 대가인 고미와 눈밭이 홈그라운드인 아웅이를 상대로 눈싸움을 했다가는······.상당히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마 눈싸움이라고 쓰고 일방적인 살육전이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우, 우오오오! 수하! 이곳에 아주 재미난 녀석들이 있구나!”
그 순간,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던 원조 아기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눈밭 위를 달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미의 뒤에는 표범처럼 생긴 맹수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털복숭이 괴수가 따라오고 있었다.
‘설인인가?’
생김새로 보나 ‘설인의 정원’이라는 던전 이름으로 보나, 아마 저게 설인인 모양이다.
하지만 수십에 달하는 몬스터 무리보다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답설무흔!?’
그렇다.
지금 고미의 발아래로는 발자국이 생기지 않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분명히 발자국이 남았는데, 그건 그냥 경곰술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모양이다.
어째서 저 체형으로 눈위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이 가능한 건지, 아무리 봐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 크르르륵!
‘그나저나, 정말 노련하네.’
일부러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따라잡혔다 금세 거리를 벌리며 몬스터를 유인하는 노련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척 보기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혼자 수많은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몰이 사냥도 적잖이 해본 모양이다.
원래 몰이 사냥은 고인물의 상징과도 같은 거니까.
- 크릉!
그때, 흥분한 스라소니 형태의 몬스터 하나가 번개처럼 앞으로 치고 나왔다.
그러자 고미는 빠르게 솜방망이를 움직여 눈을 뭉치더니 그것을 내던졌고,
- 퍼억!
눈덩이에 맞은 녀석은 공중에서 한 바퀴를 회전하며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우하하하! 수하! 보았느냐!”
눈으로 만든 ‘탄환’으로 몬스터를 처리한 고미는 요란하게 솜방망이를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강혁 씨와 나, 봉식이는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역시, 눈싸움은 아닌 것 같다.’라고, 우리 셋은 눈빛으로 합의했다.
저거에 맞는다면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거든.
대체 어떻게 하면 평범한 눈덩이를 던져서 몬스터를 기절시킬 수 있는 걸까.
“아웅, 아웅!”
이어서 반대쪽 숲속에서 아웅이가 한 무리의 몬스터를 끌고 나타났다.
“우, 우웃!?”
“아, 아웅이! 어, 어째서!”
아웅이의 모습을 확인한 고미는 약간의 배신감과 부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통통한 솜방망이를 바르쥐었고,
“괴, 굉장하네요.”
이강혁 씨가 약간의 당혹감과 감탄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우우웅!”
나는 금세 두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아웅이는 얼음으로 만든 보드 비슷한 걸 타고 설원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걸까?
“아, 아웅이! 어, 어째서 이 몸에게는 그런 멋진 물건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이냐!”
썰매인지 보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기묘한 물체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아웅이의 모습에, 아기곰은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서운함을 표했다.
그런데 이거······.
나 수련하러 온 거 맞지?
“고미······. 나 수련해도 돼?”
어렵게 말을 꺼내자,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보드에 정신이 팔려있던 초콜릿색 솜뭉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 흐흠. 다, 당연한 것을 무, 묻는구나. 이, 이 몸과 아웅이가 어, 어째서 몬스터를 유인해 왔다고 새, 생각하느냐!”
이걸로 확실해졌군.
잊고 있었어.
출발할 때는 분명 목적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얼음 보드에 정신이 팔려서 순식간에 이곳에 온 목적을 잊었던 거야.
원래 어린애라는 건 눈 깜빡할 새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는 법이니까.
“아, 아웅이! 이제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거라! 수, 수하! 너는 어서 저 녀석들을 상대로 새로운 필살기를 써보거라!”
잠시 제자의 수련보다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기곰의 뒤통수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럼 시작해 볼게.”
그 사이, 아웅이와 고미가 몰아온 설인과 맹수 떼는 불과 수십 미터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아웅이가 만들어 준 일곱 자루의 길고 짧은 검들에 기를 불어넣자,
- 우우우웅!
“서, 설마!”
고미의 입에서 흥분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역시, 되는구나.’
그리고 나는, 검을 날리기도 전에 이 실험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 쉬이이익!
< 만천화웅(SS)을 사용합니다. >
이어서 예리한 일곱 자루의 얼음 칼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몬스터들을 베어나갔다.
‘좋아, 그럼 다음 단계.’
- 콰드드득!
한계까지 기를 불어넣자, 일곱 자루의 얼음칼이 일제히 폭발하며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주위를 휩쓸었다.
이것도 예상대로였다.
흑염대웅신검도 내 기를 못 버티는데, 아웅이의 얼음 칼이 견뎌낼 수 있을리 없지.
- 크르르륵!
- 켕!
- 크륵!
“오, 오오오오!”
“아, 아웅!?”
얼음 칼을 폭발시켜 만든 수십 자루의 예리한 칼날.
그리고 그 칼날을 이용해 사용한 만천화웅의 파괴력에, 고미와 아웅이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음······. 얼음 칼의 강도는 대충 A급 정도인가?’
한편, 나는 속으로 얼음 공예로 만든 아이템의 강도를 짐작해보고 있었다.
설인의 정원의 몬스터 등급은 C~B니까······.
대충 B급 몬스터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는 소리겠지.
‘이걸 잘 응용하면 굳이 얼음 마법을 사용할 줄 몰라도 속성 공격이 가능할 것 같은데.’
흑염대웅신검과는 별개로 얼음 칼을 인벤토리에 넣어 다닌다면, 원거리 공격 능력도 대폭 상승할 테고······.
‘아무 물건이나 움직여서 만천화웅을 쓰는 것보다는 위력도 훨씬 강하겠지. 아웅이의 마력까지 깃든 물건이니까.’
게다가 합체를 하지는 않지만, 내 공격에 아웅이의 마력이 곁들여지니까, 일종의 합체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음에 드네.’
변신, 합체, 빔.
남자라면 누구나 열광할 수 밖에 없는 단어지.
한가지 난관은, 이 얼음 칼을 얼마나 오랫동안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법으로 만든 거긴 해도 얼음은 얼음이니까.
계속 상온에 보관하면 녹아버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아웅아, 혹시 이 얼음칼을 미리 만들어두면 얼마나 오랫동안 안 녹고 쓸 수 있어?”
“우, 아우웅······.”
나의 질문에 아웅이는 다소 난감하다는 듯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아마 이 얼음칼을 만들어 낸 장본인도 유통기한을 짐작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 강력하고도 멋진 신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재료의 보관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수하 씨.”
회귀자, 이강혁 씨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