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5 용궁 연회(3) : 예언
“저요? 고미가 아니라요?”
“네, 그렇습니다.”
“오오, 위대한 이 몸의 제자에게도 너의 조부가 예언을 남긴 것이냐?”
나에 대한 예언이 있다는 이야기에, 고미는 숟가락질마저 멈추고 구슬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북 대왕을 바라봤다.
“재미있구나, 말해보거라, 혹시 저 녀석도 위대한 곰이 될 수 있는 것이냐?”
음, 그건 아니야, 고미.
내가 곰이 될 수는 없지. 돼서도 안 되고.
여하튼, 얼핏 듣기에는 조금 엉뚱한 말 같지만, 이제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저 슈퍼 아기곰의 머릿속에서 ‘곰’은 위대한 영웅이자, 정의롭고, 강하고 멋진 모든 것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맥락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다의어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어떨 때는 사전적 의미의 ‘곰’을, 또 어떨 때는 ‘자신’을, 또 어떨 때는 ‘강하고 멋진 존재’ 등을 의미하니까.
즉, 이 경우 저 말을 정상적인 언어로 번역하자면······.
‘말해보거라, 저 녀석도 나처럼 위대하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냐’ 정도 되겠다.
뭐, 세계 최고의 고미 학자가 아니라면,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언어 사용법이기는 하지.
“허허허······.”
아니나 다를까, 고미어(語)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북 대왕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저희 조부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미 님의 첫 번째 제자는 베틀이라고 하셨습니다.”
······.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고미어에 이어 고북어도 배워야 예언을 이해할 수 있는 건가?
“수많은 씨실과 날실을 엮어 운명을 완성하는 자, 그것이 바로 수하님의 역할이라는 의미이지요.”
이어지는 설명에 예언자인 초대 고북 대왕이 나를 ‘베틀’이라고 지칭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이 집 용하네.’
숲속 친구들을 씨실과 날실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그간 내가 한 일은 베틀로 천을 짜는 것과 비슷했으니까.
“그리고 수하님이 베틀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을 때, 비로소 세상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북 대왕의 마지막 말에,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겠구나! 수하는 언제나 제 역할을 훌륭히 해냈으니 말이다!”
“그렇죠. 수하씨 덕분에 저희가 모두 한팀이 되었으니까요.”
이강혁 씨는 한때는 적이었던 친구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고,
“허허, 수하님이 있었기에 토생원이 다시 의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요.”
수다르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눈빛으로 이제는 자신의 제자가 된 토생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웅노사와 사숙조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 현세가 멸망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어서 천마가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놀려 백김치를 하나 집어먹었다.
‘의외로 김치를 잘 드시네.’
천마니까 당연히 중화요리를 좋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한식이 입에 잘 맞으시나 보다.
“하하, 그렇지. 일반적인 정의의 사도였다면 나나 흑암을 살려두지 않았겠지. 하지만 수하씨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나.”
마지막으로 New인국 씨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흑암을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자,
“흠, 흠······.”
선글라스를 쓴 두더지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상 직접 말은 안 하지만, 고맙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겠지.
숲속 친구들이 나를 칭찬하는 것을 듣다 보니, 약간의 민망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사람들의 말은,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준다는 사실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정을 내렸다는 실감이 나서 못내 기분이 좋았다.
“허허, 여러분의 말만 들어봐도 수하님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을지 짐작이 가는군요.”
그렇게 조금은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칭찬 릴레이가 끝나자, 고북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부의 말에 따르면, 수하님에게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큰 시련이.”
‘시련’이라는 단어에, 왠지 모르게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가짜 고미나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겠지.
“그리고 조부님께서는, 최후의 싸움에서 수하님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선택이요?”
응? 뭐지?
당연히 가짜 고미를 물리칠 힌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가슴이 시키는 데로 움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고북의 예언은, 내 기대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난감한 건, 그 선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힌트도, 언급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혹시 다른 말씀은 없었나요? 그 선택의 내용이라든지······.”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때가 오면 수하님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언이라는 게 원래 모호하고 애매하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데······.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따르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원하는 거라······. 이건 맘에 드네.
드디어 내 인생에도 워라밸이라는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피는 건가?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좋은 예언이니까. 열심히 해보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용궁에 온 이후로 운수가 좋은 것 같다.
아웅이 다웅이에게 줄 진귀한 반도 복숭아 두 개에, 맛있는 식사에, 평생 어딜 가도 못 볼 멋진 바닷속 풍경도 봤고, 나중에 부모님도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용궁 효도 관광이라니, 훌륭하군.’
어디 그뿐인가, 용궁의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 들여 만든 아기곰 전용 명품 백팩까지 선물 받을 예정인데.
‘선입금이 이 정도면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게 인간된 도리지.’
관리자가 이 멋진 고북 대왕님처럼 선입금을 팍팍 찔러줬다면, 나도 좀 더 훌륭한 노동자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음······. 알겠습니다. 꼭 기억해 둘게요.”
이에 나는 그 예언을 곱씹으며 마음속 한구석에 새겨두었다.
어차피 더 이상의 힌트가 없다면, 그 말을 잘 기억해 두고, 앞으로 할 일에 집중하는 게 낫겠지.
지금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후후, 좋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요리를 추천해 보거라.”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된 듯 하자, 먹보 아기곰은 또다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미식 수달을 바라봤고,
“허허, 다음은 전복초를 드셔보시지요.”
믿음과 신뢰의 상징, 수달랭은 곧장 두 번째 요리를 정해주었다.
“오오! 전복이라, 이 녀석은 여태 먹어보지 못한 녀석이구나! 생긴 것이 아주 재미있어 보이는 데, 맛은 어떨지 궁금하구나!”
호기심 많은 아기곰은 잽싸게 젓가락을 움직여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뿜는 유기그릇에 담긴 커다란 전복을 집어 들었다.
‘엄청 크네······.’
전복의 크기는 거의 내 손바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우리 가게에서도 종종 전복을 팔곤 하는데, 이렇게 크고 싱싱한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용궁은 다르구만······.’
그런데, 용궁에서 해물요리를 취급해도 되는 건가?
아니, 오히려 용궁이니까 해물요리가 나오는 게 맞는 건가?
“전복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가득 담긴 고급 식재료로, 패류의 귀족으로 불릴 정도로 맛이 뛰어날 뿐 아니라 몸에도 좋아 고급 코스 요리의 단골 메뉴라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속으로 ‘과연 용궁에서 해물을 취급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수다르 님의 식욕 증진 설명회가 이어졌다.
“전복초의 초란 양념한 간장을 넣어 윤이 나도록 반질반질 졸인 음식을 의미합니다. 전복초 역시 앞선 타락죽과 마찬가지로 왕의 보양식으로 수라상에 올라가던 음식이지요. 전복초는 양념장과 고명에 따라 그 맛이 미묘하게 달라지니, 한 번 직접 맛을 보시지요.”
수다르 님의 설명이 끝나자, 숲속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전복초를 하나씩 집어 입안에 집어넣었고,
“우, 우웃!”
먹보 아기곰의 입에서는 곧바로 행복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과연 생긴 것 못지 않게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살짝 달작지근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우러나오는 것이······. 게다가 살이 단단하여 씹는 맛이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음, 어째 시식평이 점점 디테일해지는군.
이것저것 잘 먹인 보람이 느껴지는 장면이야.
계속 먹방 경험치가 쌓이면, 언젠가는 수다르님 수준의 시식평도 가능해지는 걸까?
“와아, 야, 김수하. 이거 진짜 맛있다. 너도 빨리 먹어봐.”
미식가 꿈나무의 시식평이 끝나기 무섭게, 대식가 봉식이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래, 수하! 너도 어서 먹어 보거라!”
“그래, 알았어.”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나와 이강혁 씨까지 모두 전복초 시식을 마치자, 잔뜩 신이 난 식탐 대장이 직접 다음 요리를 골랐다.
“후후, 이번에는 이 몸이 직접 음식을 골라보겠느니라. 실은 아까 전부터 꼭 맛을 보고 싶었던 녀석이 있었느니라.”
말을 마친 고미는 한시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녹색과 흰색, 노란색과 붉은색 만두가 담긴 접시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그런데 만두의 생김새가, 어째 내가 아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 만두, 좀 특이하게 생겼네요.”
내가 아는 만두는 동그랗거나, 반달 모양이다.
반면 지금 이 만두는 꼭 꽃봉오리를 접어놓은 것처럼 생긴데다, 살짝 벌어진 윗부분에 고명까지 얹어져 있었다.
“허허, 석류 만두군요.”
요알못인 내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요리 박사 수다르님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그 만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석류 만두요?”
“이 역시 지금까지 먹은 것과 마찬가지로 수라상에 올라가던 만두입니다. 보통은 모양만 대충 흉내를 내는데, 고명이 올라간 데다가 색까지 낸 것이, 실로 완벽한 석류 만두군요. 이렇게 제대로 된 석류 만두는 저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
‘아주 오랜만에’라고?
조선시대 궁중 요리나 수라상에 올라가던 음식을 줄줄 꿰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이미 맛을 본 적이 있단 말이야?
‘설마 수라상을 직접 맛보신 적이 있는 건가?’
산신령은 원래 영험한 존재고, 수다르님 정도의 의술과 사회생활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 아니, 수달이라면, 임금의 병을 고쳐주고 수라상을 대접받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이 미식 수달의 시식평이나 요리 지식이 단순히 책이나 인터넷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을 때,
“우웅?”
만두를 처음 맛본 아기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녀석도 제법 재미있구나. 그런데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기 맛이 들어있는데······.”
“음······. 저도 이런 맛은 처음입니다. 무슨 고기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고미의 뒤를 이어 요리라면 제법 일가견이 있는 흑룡 셰프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북 대왕과 미식 수달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제가 한번 맛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반응에, 기미 상궁, 아니, 기미 수달이 출동하여 곧장 만두를 시식했다.
“으음······. 꿩고기군요. 조선 시대 방식 그대로 만든 모양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만두소로 꿩고기를 사용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
그러니까, 지금 조선시대 수라상에 올라간 방식 그대로 만든 만두의 맛을 알고 있다는 거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하지만 자리에 있는 누구도 수다르 님이 그런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너도나도 만두를 집어먹을 뿐이었고, 결국 나 역시 그 의문을 고이 가슴에 묻어 놓은 채 석류 만두의 맛을 확인해 보았다.
‘음······. 이게 꿩고기구나.’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기는 한데, 독특한 냄새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뻑뻑한 느낌이······.
살짝 특이한데 취향을 타는 맛이라고 해야 하나?
고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도 같다.
“으음······.”
자신이 직접 고른 메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줄곧 빙글빙글 돌아가던 아기곰의 꼬리가 살짝 멈춰섰다.
뭐, 일단 단맛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이 단맛 중독자의 입에는 다소 실망스러운 맛이겠지.
‘뭘 먹여야 다시 기분이 좋아지려나?’
고민하며 식탁을 둘러보자, 풀 죽은 아기곰의 입맛을 다시 되살려줄 아주 멋진 음식 하나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