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4 용궁 연회(2) : 당연한 것에 대하여.
나는 왜 고미의 집사, 아니, 제자로 간택되었는가.
사실 이건 고미를 처음 만난 날부터 줄곧 궁금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나중에는 물어보는 걸 까먹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내가 이 슈퍼 아기곰의 제자가 됐는지, 고미의 정체가 무엇인지 같은 문제보다, 그냥 이 녀석과 함께 하는 게 더 중요해졌으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왜 물어보냐고?
호기심이 많아서 대학원이라는 지옥에 스스로 발을 들인 게 바로 나, 김수하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고.
“그러게, 나도 좀 궁금하긴 했어.”
나의 질문에 용궁의 잔치상을 보고 잠시 눈이 돌아가 있던 숲속 친구들 최고의 대식가, 봉식이 역시 잠시 먹을 것에서 시선을 돌리고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저도 줄곧 곰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숲속 친구들 중 가장 고미를 믿고 따르는 이강혁 씨 역시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어째 대사가 좀 미묘하다.
내 자리는 못 뺏더라도, 외문 제자 중 서열 1위 정도는 하고 싶다는 야망이 느껴지는 질문인 것 같은데······.
“으음······.”
이에 잠시 친구들의 얼굴을 훑어보던 아기곰은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 초코바 때문은 아니니라.”
살짝 더듬거리는 말투에, 미묘하게 흔들리는 동공. 미약하게 움찔거리는 꼬리까지······.
‘이걸로 확실해졌군.’
조금 웃프지만, 내가 이 슈퍼 먼치킨의 제자가 된 것은, 그 날 나의 가방 안에 들어있던 초코바 공(公)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었나보다.
하지만 심하게 당황하거나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어느 정도 초코바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군.
“이 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위대한 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느니라.”
음, 그렇게 당연한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목소리를 들으려면 뭔가 특별한 체질을 타고 나야 하는 건가? 내 몸에 무슨 사자의 피가 흐른다며. 그럼 저 녀석의 몸에는 곰의 피가 흐른다던가?”
음, 민봉식. 그거 드립이냐, 아니면 진지하게 하는 소리냐······.
여하튼,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봉식이의 질문에 대한 고미의 답은, 퍽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니다. 사실 어떤 자가 위대한 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는, 이 몸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저 누군가가 이 몸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지.”
나는 그제야 이 외로운 아기곰이 던전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닌 이유를 깨달았다.
누가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저 누군가가 자기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라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다녔겠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노래를 부르고 다닌 걸까?’
언제 만날지, 누가 될지도 모를 제자를 찾아 외롭게 던전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을 초콜릿색 솜뭉치의 모습을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다행이다. 들을 수 있어서.’
그리고, 내가 이 외로운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럼 그거 말고도 또 다른 조건이 있는 거야?”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고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말을 더듬었다.
“우, 우웅······.”
다만 이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없거나,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아냐고?
아직 ‘꼬르륵’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자꾸 커다란 눈동자로 음식을 힐끗거리고 있거든.
이대로 얘기를 계속했다가는, 틀림없이 저 통통한 배가 또다시 쭉정이처럼 홀쭉해지고 말 거다.
아기곰의 집사된 입장에서, 또 그 꼴은 못 보지.
“먹으면서 얘기할까?”
“우, 우웃! 그래도 되는 것이냐!?”
“당연히 되지. 천천히 얘기해 줘도 괜찮으니까, 먹으면서 말해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고미의 입꼬리에는 곧바로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후훗, 수하, 역시 너는 좋은 녀석이다! 그렇다면 먹으면서 이야기해주마! 사실 조금 배가 고팠느니라!”
신이 난 먹보 아기곰은 곧장 젓가락을 들어올리며 기다란 상에 줄줄이 늘어선 음식들을 훑어보더니, 이내 수다르와 고북 대왕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시선이군.’
세계 최고의 고미 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저건 메뉴가 너무 많아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거다.
그러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이 잔치상을 차린 고북 대왕과, 숲속 친구들 최고의 미식가인 수다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거지.
“허허, 이런 제대로 된 한식은 오랜만이라, 절로 군침이 도는군요. 우선 밤 타락죽과 백김치부터 맛보시지요.”
고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사회생활 만렙의 산신령님은 곧바로 전채(前菜)로 먹을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오오, 그렇구나! 이 죽과 백김치를 맛보면 되는 것이냐?”
수다르 님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있던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 죽과 백김치를 앞으로 끌어왔다.
실로 이 미식 수달의 날카로운 미각이 얼마나 신뢰를 얻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기대감으로 두 뺨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아기곰이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죽을 입안에 넣는 순간,
“오, 오오오! 이, 이것은······. 괴, 굉장하구나. 은은한 단맛과 고소한 맛이 함께 느껴지는 것이······.”
녀석의 입가에 곧바로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허허, 타락죽은 조선 시대의 왕들이 먹던 궁중 음식입니다.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우유가 매우 귀해, 타락죽의 재료가 되는 우유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이 없었지요. 덕분에 우유가 들어간 타락죽은 왕의 보양식으로나 올라가던 음식이었습니다.”
단맛이 나는 타락죽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먹보 아기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놀렸다.
“오오, 수다르. 언제나 그렇지만, 너의 설명을 들으며 요리를 먹으면 왠지 모르게 음식의 맛이 더욱 살아나는 것 같구나.”
“허허, 본래 하나의 요리는 수많은 문화와 시대상, 그리고 이야기가 모여 완성되는 것이니, 요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맛이 더욱 살아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허어······. 뭍의 신령께서는 참으로 해박하시군요.”
숲속 친구들의 식욕을 돋워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미식 수달의 해박함에 고북 대왕은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었고,
“허허, 부끄럽습니다. 그저 늙은 산신령의 소박한 취미일 뿐입니다.”
수다르님은 늘 그랬듯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친구들이 하나둘 타락죽을 맛보기 시작하자, 나 역시 은은한 상아색 죽을 떠서 입안에 넣어보았다.
이런 본격적인 한정식은 처음이라 그런지, 아니면 무려 용궁의 잔치상에 오른 첫 음식을 맛보는 것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단지 죽을 먹는 것뿐인데도 묘하게 긴장이 됐다.
‘으음······. 맛있네.’
자극적이지 않은 단맛에 밤과 잣의 은은한 맛, 그리고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오묘하고도 고급스러운 맛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후훗, 이 백김치란 녀석도 아주 제법이구나. 빨간 녀석만큼 맵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칼칼하고 시원한 것이, 이 몸의 마음에 쏙 드는 녀석이다.”
그때, 타락죽에 이어 백김치를 맛본 미식 꿈나무 아기곰이 간단한 시식평을 내놓았다.
위대한 곰의 체면상 매운 걸 못 먹는 티는 못 내고, 김치를 먹을 때마다 매번 ‘스읍’, ‘하’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맵지 않은 백김치가 더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흠흠, 이제 아까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구나.”
이후 몇 번 정도 죽을 더 떠넣은 아기곰은 그제야 조금 시장기가 가셨는지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사실 목소리를 듣는다고 누구나 이 몸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곰의 제자가 되면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 함부로 제자를 받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느냐?”
음······. 그건 그렇지.
이 녀석이 이런 점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조금 의외기는 하지만, 역시 정의로운 슈퍼 아기곰답다고 해야 하나.
“사실은 수하를 만나기 전에도 몇 번인가 이 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들을 만난 적이 있느니라.”
“응? 정말이야?”
“하지만 모두 심성이 글러먹은 놈들이었다. 약해빠진 녀석들이 더 약한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괴롭히고, 마정석과 하찮은 보물들에 눈이 멀어 있더구나.”
이 대목에서 고미는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수하는 달랐느니라. 힘도 없는 녀석이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찾아보자고 말했지. 게다가 겁에 질려 정신을 놓은 친구를 보살피기까지 하더구나.”
으음······. 그렇군.
아기곰의 심사 기준은 인성이었던 거구나.
하긴, 헌터 중에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긴 하지.
던전 안에 들어가면 평소에는 그렇지 않던 사람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짜증이 많아지기도 하고.
“후후, 거기다 괴수를 잡으러 오면서 간식을 챙겨 다니더구나.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느니라.”
불안하군, 대체 뭘 확신했을까······.
이 녀석과 함께 다니면 배 곯을 일은 없겠구나, 혹은 맛있는 걸 많이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런 거?
“자신이 먹을 것도 아니면서, 친구들을 위해 간식을 챙겨 다니는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믿을만한 녀석일 거라고 말이다.”
으음, 이 대목에서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됐지 뭐.
“게다가 위대한 이 몸을 던전에서 나가게 해주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더구나. 영혼 수확자에게 당해 의식을 잃은 자신의 부모를 구해달라는 말보다 그 말을 먼저하는 것을 보고, 이 녀석은 절대로 위대한 이 몸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니라.”
고미가 이야기를 마치는 순간, 갑자기 한유진 씨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 그랬어요?”
“네.”
왜 그러지, 이상한가?
“부모님 이야기보다, 사람들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먼저 했다고요?”
“네.”
이어서 천마 역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 입으로만 대의니 정의니 하는 말을 떠들어대는 위선자 놈들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정말로 사숙조 같은 분이 계셨군요.”
“으음······.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나는 저도 모르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때는 고미가 좋은 녀석이라는 걸 몰랐으니까 그렇죠. 갑자기 나타나서 S급 몬스터를 한 방에 때려잡는데, 그런 녀석을 어떻게 함부로 데리고 나와요.”
그러자, 이강혁 씨가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았는지 설명했다.
“수하 씨, 그런 말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게 먼저 떠오른다는 게 대단하다는 얘기에요.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수하님의 훌륭한 점이지요. 이 수다르, 고미님의 가족이 수하님이라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강혁 씨에 이어 수다르 님까지 나를 칭찬하자, 나의 작은 스승은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잔뜩 어깨에 힘을 넣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후후, 보거라. 참으로 훌륭하지 않느냐?”
으음, 모르겠다. 어디가 훌륭한 건지 모르겠어.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게 먼저 떠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큭큭, 아무리 말해줘도 이해 못 할걸요. 이 자식은 원래 그게 당연한 놈이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모습에, 봉식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 웃음을 흘려댔다.
“허허, 과연 수하님은 예언 그대로의 분이군요.”
그때, 줄곧 말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북 대왕이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조부께서 수하님에게 전하라며 남긴 오래된 전언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응? 고미가 아니라, 나한테도 예언을 하신 게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