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2 숲속 친구들의 용궁 투어(5) : 고미의 몫, 수하의 몫.
작은 태양이 솟아오른 것 같은 눈부신 광채에,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의 눈앞에는 고아한 단(壇)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신비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은은한 빛을 내뿜는 복숭아 같은 모양의 과일 두 개가 놓여있었다.
“우웅!? 설마 그것은!”
먹음직스러운 향을 풍기는 과일을 발견한 먹보 아기곰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묘한 반응을 보였다.
두 귀가 쫑긋 일어서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면, 저 과일이 대단한 보물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왜 저러지?’
정작 제2의 자아인 꼬리가 당황한 듯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일어섰다 빙글빙글 돌아갔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놀란 것은 고미만이 아니었다. 동이님과 토생원, 수다르 님도 모두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즉, 저 과일은 대균열의 수호자에 초월자 셋이 놀랄만큼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 분명했다.
“우, 우웅······. 고, 고북 안 되겠다. 이, 이것은 받을 수가 없구나. 차, 차라리 맛있는 간식이라도 다오. 이, 이 몸은 꿀 한 통 정도면 충분하다.”
이어지는 고미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을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사양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를 모르는 것 같은 녀석이······. 손사래까지 쳐가며 선물을 거절한다고?
“고미님, 저는 조부의 예언에 따라 오랜 세월 이것을 지켜왔습니다. 부디 받아주시지요.”
“하, 하지만······. 이것은······.”
심지어 고북이 다시 한번 선물을 받아달라고 말을 했는데도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뭐지? 보기와는 다르게 맛이 없는 건가?’
그렇다고 맛이 없어 안 먹겠다고 말을 하자니 고북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고······. 그래서 저러는 건가?
‘안 되겠어.’
너무 궁금해서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냥 시원하게 물어보자.
“고미, 이게 뭔데 그래?”
나의 질문에 답한 것은, 고미가 아니라 수다르 님이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반도 복숭아인 것 같습니다.”
“반도 복숭아면, 손오공이 훔쳐 먹었다던 그거요?”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이번에는 토생원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반도 복숭아는 이미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말 놀랍군요.”
그럼 제천대성도 탐냈다던 그 영약이 용궁에 남아있었다는 소리인데······.
대체 뭐야, 여기는······. 말이 좋아 용궁이지, 완전 보물섬이나 다름없잖아.
‘이게 황금의 군주에게 넘어갔다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바다 여행 당시 이강혁 씨와 한유진 씨가 황급히 쫓아와 게이트가 열린다는 것을 알려줬다는 사실에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걸 먹으면 강해지는 건가요? 아니면 뭔가 다른 효과가 있는 건가요?”
영약의 효과에 대한 질문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수다르 님이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저희 수다르 일족이 지리산의 신령이 되었을 때도 이미 반도 복숭아는 전설 속의 영약이었으니 말입니다. 그저 이것을 먹으면 수명이 늘어나고, 신선에 가까운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으음, 수다르 님조차 그 정확한 효능과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영약이라······. 엄청나군.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저게 선과라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결국 명쾌한 답을 듣지 못한 나는 줄곧 묘한 몸짓을 하며 선과를 바라보고 있는 아기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고미, 너는 어때? 알고 있어?”
방금 전 반응으로 보아, 고미는 수다르님보다도 더 정확하게 이 선과(仙果)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 같아 던진 질문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기곰은 눈앞에 놓인 선과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인간이 먹으면 불로장생까지는 아니어도, 300년 이상은 살 수 있느니라······. 그리고 그 기운을 천천히 다스려 백년만 수련을 한다면 기의 양에 있어서만큼은 작은 살쾡이에 비견할 정도가 될 수 있지. 하지만 수하 네가 먹는다면 5년 정도만 수련을 하면 될 것이니라.”
완전히 흡수하는 데만 백 년이 걸리는 영약이라니······.
진짜 장난이 아니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가 이상했다.
왕유를 먹고 기맥이 넓어진 내가 먹어도 5년이면······. 늦어도 너무 늦는 거 아닌가?
‘그 정도면 이미 가짜 고미가 완성되고도 남을 텐데······.’
그 순간,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이건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닌 거야.’
초대 고북은 예언자, 그것도 상당히 뛰어난 예언자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언가를 안배하고 반도 복숭아를 보관해 왔을 터.
적어도 전쟁이 코앞인데 소화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리는 물건을 나에게 주려고 준비해 놓지는 않았을 거다.
사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황당하지만, 제법 신빙성 있는 근거가.
‘맛있어 보여.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다.
저 반도 복숭아는 ‘지나치게’ 맛있어 보인다.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기, 은은하게 뿜어져 기이한 광채와 신비한 빛까지······.
심지어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 절로 군침이 돌 정도다.
그러니까, 절대로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니다.
슬프지만, 나에게 어울리는 건······.
‘왕유지.’
그래, 나에게 어울리는 영약은, 그 지옥의 밑바닥에나 흐를 것 같은 검은 액체다.
반대로 달달하고 맛있는 건 고미 몫.
이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증명하는 자명한 진리다.
‘내 몫은 잘해야 취향 타는 맛이 나는 산신령님의 영약이야. 이렇게 맛있는 게 나한테 돌아올 리가 없어.’
음······. 정말이지,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혁명이 마려워지는 내용이군.
어쨌든, 역시 이 아이템이 어울리는 건 단맛 중독자, 식탐의 제왕, 먹보 아기곰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고미가 이걸 먹는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무협지의 흔한 설정에 따르면, 뛰어난 영약일수록 기맥이 넓고 튼튼해야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고미 정도 되는 먼치킨이 먹는다면 그렇게 긴 시간에 걸쳐 소화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 아무리 봐도 이게 정답이야.’
고미가 왜 거절하는지 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고미, 이걸 네가 먹으면 어떻게 돼?”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던진 질문에, 먹보 아기곰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이 이것을 먹는다고 강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영약이라도 여러 번 먹으면 효과가 떨어지니 말이다. 이 몸은 이미 수천 년도 전에 반도 복숭아를 먹어보았다.”
잠깐, 이미 먹어 봤다고······?
“맛은 아주 훌륭하다······. 다만 이 몸이 마지막으로 저 녀석을 맛보았을 때는 이미 아무런 효과도 없는 그저 달콤한 과일에 지나지 않았느니라. 용궁의 진귀한 보물을 단지 맛으로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냐?”
먹보 아기곰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고, 말을 하는 내내 몇 번이나 꼴깍꼴깍 침을 삼켜댔다.
‘음, 설마 그렇게 흥분하면서도 선물을 거절했던 이유가 눈앞에 놓인 게 전설 속의 선과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해서 그랬던 거냐.
게다가 대체 이런 엄청난 건 언제 먹어본 건데. 맨날 맛없는 것만 먹었다더니, 몇 안되는 예외 중에 하나가 전설 속의 선과라니······.
‘그래도 다행이네.’
평생 맛없는 것만 먹고 살다보니 편식이 심해져 아예 아무 것도 안 먹게 된 줄만 알았더니······.
한 번이지만 천마한테 꿀도 얻어먹고,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반도 복숭아도 얻어먹었다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음, 자식이 굶고 다니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 이런 건가.’
게다가 삶의 목표가 먹는 것인 식탐 대장이 먹을 것의 유혹을 참아내다니······.
정말이지, 대견하다.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이 녀석이 좋아할만한 달달한 디저트라도 잔뜩 사먹여야겠군.’
아니,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본론으로 돌아가자.
이 달콤한 선과가 고미를 위한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먹으라고 이걸 준 걸까?
그때, 문득 반도 복숭아의 개수가 ‘두 개’라는 사실에 신경이 쏠렸다.
하나도 소화하기 힘든 걸, 두 개나?
그것도 고미가 먹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물건을?
“고북 대왕님, 이 복숭아는 원래 더 많았는데 양이 줄어든 건가요? 아니면 원래 두 개 였나요?”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나의 질문에, 고북 대왕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두 개였습니다. 맹세하건대, 저도, 저의 조부와 부친께서도, 결코 이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없사옵니다.”
역시, 예상대로야.
“고미, 혹시 이걸 아웅이랑 다웅이가 먹으면 어떻게 돼?”
초대 고북이 어디까지, 얼마나 정확하게 내다봤는지는 몰라도, 선과가 두 개인 이유는 틀림없이 아웅이와 다웅이의 파워업 때문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이미 완성된 슈퍼 먼치킨인 원조 아기곰과 달리, 그 둘은 아직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먼치킨 꿈나무니까.
“우, 우웃! 그, 그렇구나! 그 두 녀석은 약하지만 이 몸과 체질이 비슷하니, 틀림없이 빠른 시간 안에 반도 복숭아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추론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원조 아기곰의 두 눈이 흥분으로 번득였다.
“으음······. 혹 그 두 분이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북 대왕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아, 그게 말이죠······.”
이에 나는 빠르게 곰돌이 삼형제의 탄생비화와 특징 등을 간단하게 읊어주었고,
“흐음······. 그렇군요. 조부께서는 그저 때가 오면 용궁에 대균열의 수호자와 그 제자가 찾아올 것이며, 위대한 수호자에게 이것을 내어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해서 당연히 고미님께서 드실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선과는 처음부터 두 분을 위해 준비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고북 대왕 역시 내 추론에 동의를 표했다.
“후훗! 수하! 역시 너는 훌륭하구나! 아웅이와 다웅이라면 틀림없이 이 선과를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다, 고북! 너의 선물은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아기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글빙글 꼬리를 돌리며 은은한 빛을 내뿜는 선과 두 개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이러면 고미한테 가는 선물은 사실상 없는 거 아닌가?’
이 조금은 서운한(?) 결말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
“흐음, 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 고미님에게는 아무런 선물도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고북 대왕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다. 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선과를 두 개나 받고 어찌 다른 선물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 이, 이 몸은 신의를 아는 곰이니라!”
이에 아기곰은 한사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서툴러, 역시 거짓말이 서툴러.’
살짝 쳐진 귀와 꼬리, 더듬거리는 말투가 선물을 못 받아 아쉽다는 말을 대신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시선은 여전히 고북 대왕의 등껍질에 고정되어 있으니, 누가 봐도 뭘 원하는지가 너무 빤히 보인다.
“흠······.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제가 용궁의 장인에게 명을 내려 제 귀갑과 비슷한 가방을 하나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기곰의 간절한 소망(?)이 전해진 걸까?
결국 고북 대왕은 용궁의 장인까지 불러 용궁산 명품백을 선물하겠노라 말했고,
“우, 우웃! 정말이더냐!? 정말 이 몸에게도 그런 멋진 등딱지가 생기는 것이냐!?”
순진무구한 아기곰은 방금 전 자기가 했던 말조차 잊어버린 듯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댔다.
“허허허, 이리 기뻐하시는 걸 보니, 저도 기분이 좋군요.”
너무나도 해맑은 고미의 웃음에, 고북 대왕 역시 기분이 좋아진 듯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 걸 받은 것 같은데······.’
그래도 먼저 주신다고 말씀하신 거니까, 거절하기보다는 감사하게 받는 게 예의겠지?
‘좋아, 일단 감사히 받고, 열심히 몸으로 뛰어서 갚자.’
선입금이라니, 모처럼 근로의욕이 불타는구만.
그렇게 몸으로 때워서라도 제대로 선물값을 치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허허, 그럼 이제 용궁의 자랑인 연회장에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이쯤이면 연회도 준비가 끝났을 것 같군요.”
마침내 고북 대왕의 입에서 노는 것과 먹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기곰이 학수고대하던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