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0 숲속 친구들의 용궁 투어(3) : 거북이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천 년 이상 활용되지 않은 전함 곳곳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관리자가 퀘스트조차 보내지 않은 것은, 이 문제가 아주 손쉽게 해결이 가능하리라는······.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
이거, 시비냐?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
요즘 들어 굴리는 빈도나 강도가 너무 눈에 띄게 올라가서 가뜩이나 신경 예민한데······.
‘이래서 혁명이라는 게 일어나는 거구나.’
책에서만 보았던 노동자의 혁명이라던가, 공산주의의 기원을 갑자기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니, 이건 조금 맥락이 다른가?
‘그보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있단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용궁 수리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하지만 그 수리 작업에 내가 직접 손을 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 멤버면 내가 나설 일이 있는 게 이상한 거지.’
용귀는 마력 생명체니까, 흑암에 동이님, 토생원에 수다르 님이면 어렵지 않게 해결책을 강구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마법, 연금술, 흑마법, 의술, 각 분야의 최고 석학이라 할 수 있는 초월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새로운 마도 병기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수리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그리고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관리자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악덕 고용주가 보상을 안 건다는 건, 그냥 가만히 놔둬도 해결되는 문제라는 소리니까.’
그래, 그렇게 믿었다. 방금 전까지는.
“허허, 화면을 보니 제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신비하군요. 이렇게 거대한 생명체가 존재하다니. 병든 부분들은 제가 한번 손을 써 보겠습니다.”
그때,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던 수다르님이 내 생각을 증명해주듯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수하님께서 그저 이 늙은이에게 용궁을 구경시켜주고 싶어 함께 오자고 한 줄 알았더니, 아마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싶어 저희를 모두 이끌고 온 것 같군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리고는 은근히 나를 추켜 세워주시며 흑암과 토생원, 동이님에게 시선을 돌리셨다.
“마정석과 연결되어 에너지를 공급받는 부분은 케르베로스와 구조가 비슷한 것 같군. 이건 내가 손을 써보지.”
수다르 님의 눈빛을 받은 흑암은 자신의 얼굴과 한몸이 되어버린 듯한 선글라스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용궁 수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법진은 저와 제르보나가 수리해 보겠습니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 금세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연금술로 만들어진 부분은 제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곳곳에 상당히 수준 높은 기술이 적용되어 있군요.”
이어서 동이님과 토생원 역시 각각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냈다.
그 반응으로 보건대, 내가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은 완벽한 정답이었다.
“허허, 용궁 내에도 기술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보내 일손을 거들도록 하겠나이다.”
숲속 친구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나서자, 고북 대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에 필요한 기술자들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할 일은 없어 보였다.
혹시 내 전공이 쓰일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슈퍼 거북이가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대체 뭐야.’
이에 나는 대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길래 퀘스트까지 주나 싶어 상태창을 열어봤다.
‘설마 날로 먹는 퀘스트인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나 횟집아들이다. 날로 먹는 거 좋아한다.
게다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이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만든 건 고미와 나니까.
용궁에 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특급 수리(?) 요원들을 모두 이끌고 용궁에 오겠다는 발상을 한 것도 나고.
그 공을 치하해서 상을 준다던가?
하지만 시스템 창을 보는 순간······.
‘이 망할 너드 x끼가······!’
아, 안돼. 안돼. 참아라, 김수하.
요즘 점점 입이 험해지고 있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참아라.
< 메인 퀘스트 : 꿀벌처럼 일하자! >
- 용족이 자랑하는 차원 전함, 마도 병기 일등 자라는 현재 곳곳이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숲속 친구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일등 자라를 치료해 주세요!
< 달성 조건 >
- 일등 자라 수리에 필요한 마정석 모으기
- S급 마정석 5개
- A급 마정석 50개
- B급 마정석 100개
- C급 마정석 150개
< 달성 보상 >
능력치 강화 (+10)
스킬 강화 (+3)
무기 강화권(+1)
······.
이게 대체 몇 개야.
지금 이 엄청난 양의 마정석을 다 모아오라는 거냐!
양도 양이지만, 돈으로 따져도 이게 얼만데!
‘으으······.’
게다가 재료를 모아오라니, 어딘지 모르게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한 법이고, 그 데이터는 모두 발로 뛰어 모아야 하는 거니까.
멀리서 보는 것과 달리, 막상 직접 해보면 연구자도 노동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순수한 노동의 결정체지.’
하지만 능력치 포인트 하나, 스킬 포인트 하나가 절박한 나에게 있어 10개의 능력치 포인트와 스킬 강화권 3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평상시라면 이런 보상에 목숨을 걸지는 않지만, 가짜 고미를 맡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상황이니까.
무기 강화권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보상이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시점에 꼭 필요한 보상 중 하나였다.
‘영지버섯과 흑염대웅신검은 곰손을 한계까지 발휘해 만든 물건이야. 거기에 드래곤의 마력까지 깃들어 있는데······. 다시 무기를 만든다고 해도 이보다 좋은 게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흑염 대웅신검은 S급, 영지버섯은 S급 이상의 아이템이다.
하지만 제작 과정을 되짚어보면······.
‘정말 무지막지했지.’
그야말로 불꽃 같은 열정과 벼락같은 영감으로 만들어진 아이템들.
다시 무기를 만든들 이런 걸작이 다시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다, 해! 한다고!’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수련을 해야 하잖아?
매일 숲속 친구들과 대련만해서는 강해질 수 없지.
다양한 몬스터들을 잡으면서 팍팍 강해지는 거야.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는 생각을 바꾸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
바로 그때,
“허허, 그래도 손님들에게 오자마자 일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어차피 용궁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마정석이 필요하니, 오늘은 조금 더 용궁을 즐기도록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북대왕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를 바라봤다.
“음, 으으음······.”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놀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미, 괜찮아. 어차피 마정석이 없으면 수리도 못 한다고 하니까, 용궁을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어떻게 고쳐야할지 계획도 세우고 그러면 되지.”
이에 나는 적당히 놀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다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오, 오오! 수하! 역시 너는 머리가 좋구나! 어떻게 하면 매번 그리 훌륭한 생각을 척척 내놓는단 말이냐!”
순식간에 고민이 해결된 아기곰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쪼르륵 달려와 나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자, 그럼 가자! 용궁을 구경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 몸도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용궁 전체를 구경하지는 못 했느니라!”
음······. 생각해보면 참 별것도 아닌 해결책인데, 언제나 리액션이 훌륭한 아기곰이란 말이지. 이런걸 혜자스럽다고 하나. 너튜브나 인터넷 방송 같은 거 하면 후원금으로 재벌이 될만한 캐릭터다.
“허허, 그럼 채하궁에 기별을 넣어 놓을테니 먼저 용궁을 조금 돌아보시겠습니까?”
“채하궁이요?”
나의 질문에 고북 대왕은 가볍게 웃으며 채하궁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채하궁은 용궁에 찾아온 귀빈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된 용궁의 연회장입니다. 이토록 귀한 분들이 오셨는데 연회가 빠질 수는 없지요.”
용궁 연회라니······. 이건 정말 기대가 되는군.
“오오, 연회라니! 그렇지! 위대한 이 몸에게는 연회가 어울리느니라!”
노는 것과 먹는 것을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기곰은 곧장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정신없이 꼬리를 돌려댔고,
“흐음······. 용궁의 연회라니, 흥미롭군요.”
언제나 냉정하고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던 무서운 손주분마저 기대감을 내비쳤다.
하긴, 천마라고 해도 용궁의 연회 같은 걸 경험해보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럼 먼저 용궁의 다른 곳을 구경하러 가시지요.”
말을 마친 고북대왕은 곧바로 영덕전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아, 대왕님, 잠시만요.”
하지만 나는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혹시 이곳에 토생원의 화원과 연결되는 게이트를 하나 만들어둬도 될까요?”
용궁을 수리하려면 앞으로 여러 번 이곳에 들락거려야 할 텐데, 그때마다 동해까지 날아와서 피리를 불 수는 없지.
용궁을 찾겠다고 정찰병까지 보내는 마당에, 자꾸 용궁의 위치를 드러내서 좋을 게 없으니까.
혹시 다시 동이님의 등에 타고 여기까지 날아오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냐고?
사람을 뭘로 보고······.
“좋은 생각이군요. 그렇게 하시지요.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용궁의 결계를 일부 해제해야 하옵니다.”
고북 대왕은 그렇게 말하며 동이님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옥좌에서 일어나려던 동이님은 빠르게 화면을 넘기며 마법진 몇 개를 가볍게 조작했다.
“허허, 역시 굉장하시군요. 벌써부터 용궁을 이토록 능숙하게 다루시다니······.”
고북대왕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광장 위에 있던 새하얀 마정석 몇 개에서 유독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드래곤 어로 된 마법진이 나타났다.
“자, 됐습니다. 그곳만 결계를 해제해 두었으니, 게이트를 만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나는 곧바로 ‘토끼굴’을 활성화해 게이트 하나를 형성한 뒤 고북 대왕의 뒤를 따라 영덕전의 물방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영덕전을 빠져나오자,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용궁의 풍경이 한눈에 시야에 들어왔다.
동굴 같은 벽면에 박힌 마정석에서는 하나같이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이 뿜어져 나왔고, 덕분에 어딜 가든 축제가 한창인 밤거리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예쁘네요. 매일 매일 오고 싶을 정도예요.”
곳곳에서 비추는 아름다운 빛에 한유진 씨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숲속 친구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지금 내 눈에는 빛을 발하는 마정석보다, 이미 빛을 잃고 평범한 돌처럼 변해버린 마정석들이 더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저걸 내가 발로 뛰어서 채우라 이거 아니야.’
숲속 친구들의 눈에는 저 하나하나가 별처럼 아름답겠지만, 지금 내 눈에는 저게 전부 다 앞으로 내가 흘려야 할 땀과 눈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
그렇게 앞으로 나에게 닥칠 시련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우, 우웃! 수하! 저것을 보거라!”
무언가를 발견한 아기곰이 솜방망이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응? 뭔데 그래?”
녀석의 통통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는 순간, 관리자에 대한 분노도,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한 걱정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와아······.”
지금 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동굴 같은 벽 대신 유리처럼 투명한 거대한 창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이름 모를 수천, 아니, 수만 마리에 달하는 물고기 떼가 무리지어 이동하는 것이 비추고 있었다.
“허허,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고북 대왕의 한마디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별 무리 같은 물고기떼 너머로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모래, 그리고 지상의 그것과는 또다른 느낌을 주는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에도 산맥이 있네요.”
“허허, 그렇지요. 늘 물속에 잠겨있어 육지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바다 깊은 곳에도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바위가 있고,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들이 있습니다.”
“오, 오오! 수하! 저기 보거라! 이 몸에게 어울리는 아주 커다란 놈이 있구나!”
저 멀리 커다란 고래가 보이자, 신이 난 아기곰은 마치 수족관에 온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라는 말은 다큐멘터리에나 나오는 문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직접 보니, 그 말이 결코 상투적인 멘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꼭 어린애로 돌아간 것 같네.’
오랜만에 느끼는 진한 설레임에, 이런 곳에 방문할 수 있게 해준 운명의 신에게 감사 인사라도 올리고 싶었다.
아, 착각하지 마라.
여기서 운명의 신은 관리자가 아니니까.
그 물건도 본인이 신이 아니라고 했고.
그렇게 바닷속 풍경에 감동 받은 숲속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럼 연회가 준비되는 사이에 응벽궁에 가보시겠습니까?”
고북 대왕은 다음 목적지로 우리를 안내했고,
“허허, 수하님. 고북 대왕이 연회말고 또다른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군요.”
응벽궁이라는 이름을 들은 수다르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