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4 든든한 지원군, 합류.
“오, 오오! 수하! 그 사이 새로운 이능이 많이도 생겼구나!”
짤막한 꼬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기뻐하는 아기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우웅!? 이, 이것은! 오오······. 그래서 그렇게 맞았는데도 위대한 곰처럼 금세 멀쩡해진 것이로구나!”
‘피로야, 가라’를 본 모양이군······.
끝장이야. 마지막 남은 한줌의 희망마저 사라졌어.
이제 모든 훈련이 오늘, 아니, 어제인가?
여하튼, 쓰러지기 전이랑 똑같은 강도로 진행되겠군.
“김수하, 설마 이 스킬 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이강혁에게 맞서다 장렬하게 쓰러진 것이냐?”
고미를 따라 꿀태창을 확인한 흑암은 조금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장렬하다니, 그냥 카운터 맞고 뻗은 건데요.
지금도 제 만용을 후회하고 있는데요.
“평소에는 물렁하다 싶어도 의외로 결단력이 있군. 하긴, 그러니 나를 끌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유인책을 폈겠지.”
“허허, 그러게. 수하 씨가 은근히 깡다구가 있다니까. 평소에는 마냥 사람이 좋아보여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야.”
흑암에 이어 New인국 씨마저 연신 웃음을 흘리며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왠지 그 모든 칭찬이 상당히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음······. 설마 저주 걸어서 미안해서 저러시는 건 아닐 테지?’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조금 불순한 상상을 하게 되는군.
그때, 칭찬에 인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까칠한 손주분이 흐뭇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이능이 있다 해도 정말 체력과 기력이 모조리 바닥날 때까지 달려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 사숙조, 무위는 부족하지만 근성만큼은 아주 훌륭하시군요. 본교의 제자들도 조금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닌데요.
그냥 일하고 돈 못 받는 기분이라 그런 건데요.
일만 하고 돈은 못 받는 거에 한이 맺혀서 그런 것뿐 인데요.
굳이 따지자면, 한(恨)에서 비롯된 파워입니다.
“우, 우웅!? 이, 이것은!”
그 사이, 새롭게 생성된 스킬의 설명을 읽어내려가던 아기곰의 귀가 쫑긋 일어섰다.
“이럴 수가······.”
그리고는 왠지 모르게 감동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수하! 그 관리자라는 녀석이 어쩌면 나쁜 녀석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난 이걸 보니까 그놈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 지는데······.
< 곰강불괴지신 (B / F ~ Gomi) >
- 옛부터 인간들은 위대한 곰의 강인한 몸을 보고 ‘곰강불괴’라며 칭송해 왔습니다. 진정한 곰은 그 어떤 공격에도 타격을 입지 않으며, 당신의 피부 역시 위대한 곰의 그것처럼 강인한 방어력을 가지게 됩니다.
- 속성 공격과 물리 공격에 무관하게 데미지가 감소됩니다.
비고 : 본 스킬은 데미지를 받을수록 등급이 상승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스킬 등급을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틀림없다! 이것은 수하 너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내려준 권능이니라!”
음······. 이 순수한 아기곰의 눈에는 ‘비고’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 걸까?
데미지를 받을수록 등급이 상승하다니, 한마디로 맞아서 스킬 레벨 올리라는 소리잖아.
‘깽값은 제대로 챙겨줄 테니까, 이제부터 마음 놓고 맞아!’라는 느낌이라고.
“게다가 이것을 보거라!”
관리자의 말도 안 되는 갑질을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인 순진무구한 아기곰을 흥분시킨 마지막 스킬은, 바로 ‘파천대웅검결’이었다.
하지만 SS급 검법인 이강혁 씨의 그것과는 달리, 나의 검법은 등급란이 물음표로 되어 있었다.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비고에 적힌 내용이었다.
< 파천대웅검결 (?) >
- 천마가 창안한 검법에 위대한 곰의 가르침이 더해져 만들어진 강력한 검법입니다.
비고 : 위대한 곰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 더 새로운 검법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
‘음······. 어째서 이걸 익히게 된 거지?’
설마 이강혁 씨가 줄곧 보여준 움직임에 파천대웅검결의 초식이 섞여 있던 건가?
이번 대련은 이강혁 씨의 파천대웅검결 연습도 겸한 거 였으니까.
“이강혁씨, 혹시 저랑 대련 중에 파천대웅검결 쓰셨어요?”
“네, 수하 씨가 따라하셨던 동작들이 파천대웅검결의 초반부 초식들입니다.”
그렇군······.
어쩐지 지금까지 못 본 움직임이 섞여 있더라니. 나도 모르는 새에 그걸 따라하면서 파천대웅검결을 익히게 된 거구나.
“다만 사용한 것은 초식의 형뿐이고, 거기에 내공 운용법이 곁들여져야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뭐, 무협지에 보면 고급 무공들은 대개 그런 식이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초식 이름도 외쳐야겠지.
“후훗, 수하, 위대한 이 몸이 곧 너에게 맞도록 파천대웅검결을 고쳐주마.”
그렇게 차곡차곡 가짜 고미에게 맞설 무기들의 성능을 확인하고 있을 때······.
“허허, 수하님, 고미님, 두 분께서 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다니,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대웅전의 문이 열리며 새하얀 도포에 두건을 쓴 수다르 님과 토생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음, 어디선가 많이 본 옷차림인데······.’
“오오, 수다르, 토생원! 참으로 멋지구나! 어떠하냐! 새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느냐!? 제자로 거둘만한 녀석은 있더냐? 너도 수하처럼 훌륭한 녀석을 제자로 맞아야 할텐데 말이다!”
도포를 입은 사제(師弟)의 모습에, 아기곰은 구슬 같은 눈을 반짝이며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허허, 인품과 재능을 동시에 갖춘 훌륭한 인재들이 많더군요.”
고미의 질문에 산신령님은 언제나처럼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 창을 열어 확인해보자, 토생원 님은 둘, 수다르 님은 세 명의 제자를 받은 상태였다.
‘하루 만에 완료되면 더 좋겠지만······.’
역시 두 사람(?)의 눈에 차는 인재가 그리 많지는 않겠지.
게다가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일을 빨리 해달라 어째달라 재촉하는 것도 뻔뻔하니까.
어차피 나도 수련이 필요하니, 그냥 천천히 퀘스트가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참, 유찬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오늘 마일로스트님을 만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때, 한유진 씨가 알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이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능할까요?”
“네, 얼마든지요. 마침 마일로스트님도 수하 씨랑 고미님을 보고 싶어하셨어요.”
“오오! 참으로 잘 됐구나!”
자신의 오랜 친구 역시 우리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에 잔뜩 신이 난 아기곰은 곧장 초코바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틴, 게이트 열어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유진 씨의 품에 안겨있던 알틴이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화원의 중앙으로 날아갔다.
“삐이이이이!”
자그마한 아기용이 날개를 파닥이며 울음 소리를 내뱉자, 기이한 파문이 응집되며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들어······.”
이어서 한유진 씨가 앞장서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고미님.”
황금색 게이트의 안쪽에서 얼굴의 절반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주군!”
“주군!”
“마일로스트님!”
“삐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모습에 삼룡이 패밀리는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고,
“동이!”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초코바를 폭풍 흡입하고 있던 아기곰이 화살처럼 그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 쿵!
“하하하, 고미님, 드디어 현세에서 만나 뵙게 되었군요.”
또다시 갈색 솜뭉치에게 덮쳐진 동이님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미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음······. 저 과격한 몸통 박치기는 두 사람만의 인사법인 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과격한 인사법이 애정표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분명 저런 식으로 인사를 했던 것 같은데······.
‘하긴, 저런 과격한 애정표현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
평범한 아기가 해도 받아주기 어려운 애정표현 방식인데, 달려드는 상대가 무려 고미다.
드래곤 로드 자리를 노리는 초월자 정도는 되어야 받아줄 수 있는 인사법이기는 하지.
‘나한테는 안 해서 다행이다······.’
한다면 받아줄 마음은 있지만, 마음과는 무관하게 내 여리디 여린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주군, 드디어 마력을 모두 회복하신 것입니까?”
그때, 특별히 말을 할 이유가 없으면 굳이 입을 여는 일이 드문 제르보나 씨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다행히 때를 맞출 수 있었던 것 같구나.”
이에 동이님은 진중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맞추다’니,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이미 읽고 계셨던 건가?
‘그러고 보니 놀이공원에서도 곧 힘이 되어드리러 현세로 넘어오겠다고 말씀하셨었지.’
그때는 현세로 넘어오지는 않고, 알틴의 입을 빌어 말했지만 말이야.
“설마 동이님, 곧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으셨던 건가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드래곤 로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읽고 있었습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모든 계획을 뒤로 미루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나는 우리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직감했다.
‘역시, 가짜 고미한테 타격을 입힌 것 때문에 침략이 뒤로 미뤄진 거야.’
그리고 이 상황이 의미하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선공을 취하는 게 정답이라는 거지.’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초월자급의 전쟁이 되어도 선빵필승의 진리는 통하는구나.
아니, 선빵필승은 옛말이 아닌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동이님, 저희가 세운 계획이나 상황을 좀 설명 드려도 될까요?”
계획에 확신을 갖게 된 나는 한쪽은 금색, 한쪽은 붉은색을 띤 사내의 눈동자를 바라본 뒤 천천히 숲속 친구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숲속 친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고, 나는 곧바로 삼룡이 패밀 리와 야채가게 식구들이 없던 자리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쪽의 배후에는 악몽의 지배자라는 엄청난 초월자가 있는 것 같아요.”
“악몽이라······.”
악몽의 지배자의 이름이 나오자, 동이님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미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미의 가장 오랜 친구이니만큼 저 슈퍼 아기곰의 숙적인 악몽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짜 고미를 만났는데······.”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동이님과 숲속 친구들은 말 한마디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결론적으로, 저희가 선공을 취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긴 설명을 마치자, 동이님은 잠시 망설이다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드라고니아로 쳐들어간다면, 저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기도 쉽겠지요. 스스로 이런 결론에 이르시다니······. 수하님은 역시 현명하시군요.”
그리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고미님의 첫 번째 가족이 이리 영민한 분이라 참으로 다행입니다.”
음······. 역시 이분도 저 슈퍼 아기곰의 치명적인 단점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근데 이거, 살짝 디스 아닌가?
“후훗, 그렇지! 이 녀석은 참으로 훌륭한 모리배다!”
하지만 정작 디스를 당한 본인이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으음······.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정신 건강에 좋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고, 세부적인 계획에 대해 상의하려던 찰나, 동이님이 살짝 굳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상대가 황금의 군주 하나라면 저와 고미님, 그리고 친구분들만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만수왕과 악몽이 그곳에 있다면 저희들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드라고니아는 그렇게 쉽게 침공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고미님과 수하님, 그리고 친구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다른 인간들을 데리고 드라고니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까요.”
표정으로 보아, 그 ‘물건’이라는 게, 그리 쉽게 구할 수 없는 무언가라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심지어 드래곤 로드 자리를 노리고 있는 초월자마저 쉽게 구할 수 없는······.
그리고 그 ‘물건’이 없어 동이님 역시 황금의 군주와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규모 차원이동이 가능한 전함이나 장치가 있지 않은 이상······.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준비가 가능할지 알 수 없습니다.”
동이님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가짜 고미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계획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커다란 암초에 걸린 것 같은 상황에 자리에는 잠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
“우웃! 동이! 있다! 있어! 이 몸이 방법을 생각해 냈느니라!”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이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