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2 수하는 오늘도 데굴데굴.
< 피로야, 가라! (Gomi) >
- 위대한 곰의 강인한 체력과 회복력은 예로부터 많은 인간들의 입에 회자 되었으며, 그 간은 영약으로 여겨질만큼 약효가 뛰어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회복력은 위대한 곰에 비견해도 좋을 정도로 강해집니다.
- 아무리 기진맥진한 상태라도 한 번의 수면으로 완벽하게 회복됩니다.
- 한계까지 체력과 마력, 기력을 소진했다가 회복할 시, 능력치 성장 속도가 대폭 향상됩니다.
비고 : 성장 속도는 피로도에 비례합니다.
······.
피로도에 따라 성장속도가 달라진다라······.
그야말로 워라밸과는 가장 거리가 먼 스킬이라 할 수 있겠군. 고미의 복지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 왜 내 복지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거냐.
‘저 체력이 맞아서 줄어드는 그 체력을 말하는 거냐, 아니면 단순히 지구력을 말하는 거냐.’
99.9퍼센트의 확률로, 전자겠지.
그렇지 않으면 따로 ‘기력’이라는 항목을 기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여하튼, 지금까지 흐름으로 보아, 관리자가 던져주는 스킬들은 나에게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즉, 이제부터 원하든 원치 않든, 죽기 직전까지 굴러야 한다는 소리지.
‘대체 얼마나 굴리려고 이런 걸 주는 거냐······.’
그리고 고미 성격에 이런 스킬이 생겼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솜방망이를 두드리며 딱 숨만 붙어있을 때까지 굴릴 게 뻔하다.
‘아니야, 어쩌면 요단강에 살짝 발을 담궜다가 빼는 정도까지 굴릴지도······.’
포션이라도 챙기고 훈련을 시작하고 싶다.
최소한의 인권 정도는 보장받고 싶다고······.
통증이 준다고 성장 속도가 느려지는 건 아니잖아.
화원에서 포션이라도 가져오고 싶은 마음에, 나는 또다른 화급한 문제 하나를 입에 올렸다.
“고, 고미. 특훈은 내일부터 하고, 우선 동이님부터 만나자. 이런 문제를 우리끼리 결정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유찬 씨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건 책임지고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희 쪽도 포션 제작자와 힐러들을 모아놓은 상태라, 간다고 해도 당장 주군을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오! 이 눈치 없는 드래곤 x끼가······!
“후훗, 그렇지. 동이가 내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느니라. 게다가 수다르와 토생원도 바쁘다고 하니, 우리는 당장 수련을 시작하자꾸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의욕에 불타는 아기곰의 모습에, 나는 이미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좋아, 그렇다면 플랜 B로 가자.’
결국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누구를 첫 번째 수련 파트너로 삼는 편이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지 계산했다.
일단 봉식이는 제외.
저 놈에게 운동을 배워본 적이 있어서 안다.
저 짐승 같은 녀석은 자기 몸을 단련할 때도 학대에 가까운 수준까지 운동을 하고, 그걸 즐기는 변태다.
「운동이 끝났는데 집에 제대로 걸어갈 수 있다? 그건 문제가 있는 거지. 걸어갈 힘이 없어야 운동을 한 거야.」
언젠가 녀석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각성을 하기 전에도 그랬고, 각성을 한 뒤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저 녀석을 선택하는 순간 둘 중 하나가 바닥을 기어 다닐 때까지 치고 받는 사태가 벌어질 확률이 높지.
천마는······.
‘으으,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군.’
내 기억이 맞다면, 무협지의 마교니 혈교니 하는 곳들은 이게 훈련인지 그냥 사람을 죽이려는 건지 모르겠는 방식으로 수련을 시켰으니까.
심지어 그러다가 죽으면 ‘이놈은 처음부터 우리 신교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정도로 퉁 치는 작품도 여럿 봤던 것 같고.
이쪽을 선택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희망은······.
‘이강혁 씨인가.’
그래, 얼마나 정의로우면 길드명이 저스티스겠나.
게다가 늘 정중하고 친절하고, 회귀 능력을 바탕으로 재능있는 사람들을 미리 알아봐서 가르친 경험도 많은 사람이니까.
역시, 비빌 언덕은 역시 저 사람 뿐이다.
“으음······. 그럼 먼저 이강혁 씨하고 수련을 할게. 무기도 비슷하고, 스킬도 많이 겹치니까.”
나름대로 논리적인 이유를 덧붙이며 이강혁 씨와 대련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호오······. 알겠다, 허수아비도 마침 이 몸이 가르쳐준 파천대웅검결을 연습해야 하니, 그야말로 꿀 먹고 초코바 먹고라고 할 수 있겠구나.”
특별 교관님은 흔쾌히 나의 제안을 수락해 주었다.
‘좋아, 오늘은 이강혁 씨를 상대로 수련을 하고, 화원에 가서 포션이라도 좀 챙겨온 다음 다른 사람이랑 수련을 하는 거야.’
하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 웃고 있어.’
민봉식이, 웃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저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다.
x알 친구가 x 되었음을 직감했을 때 짓는 웃음.
남자들은 대체로 알고 있는 그 웃음.
‘자, 잠깐, 설마······.’
- 쿠궁······.
바로 그때, 첫 번째 대련 상대를 바꾸겠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흑곰 덫’이 펼쳐졌다.
“자! 이 정도면 너희 둘의 힘으로는 절대로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안에서 마음껏 훈련을 해보거라! 역시 실전보다 좋은 수련은 없는 법이지!”
······.
역시 화끈하군.
아무리 그래도 흑곰덫까지 써가며 싸워보라는 건······. 좀 너무 하지 않냐.
‘하, 할 수 없지. 해보자. 상대가 검성이기는 해도, 나도 스킬 등급이랑 능력치는 만만치 않다고.’
그래, 이제 SS급 스킬도 몇 개나 생겼고, 거기에 흑웅대웅신검에 영지버섯까지 있으니, 비 오는 날 먼지나게 맞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을 거다.
“알겠어. 그럼 이강혁 씨, 부탁 드릴게요.”
마음을 굳힌 나는 곧바로 라면처럼 구불구불한 쇠막대와 영지버섯 모양의 방패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가짜 고미를 잡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하니까.
‘그런데······. 왜 자꾸 후회가 되냐.’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재앙이 오는구나.
하지만 언제나 나를 든든히 지켜주던 곰 선생님의 걸작을 빼드는 찰나······.
“응?”
갑자기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꼭 보이지 않는 손이 검과 방패를 강제로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
‘설마······.’
불안한 마음을 안고 고개를 돌려보자, 고미의 짤막하고 통통한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진정한 곰이 되려면 무기에 의지해서는 안 되느니라. 괴수 놈들과 싸울 때는 목숨이 달려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친구들과 수련을 할 때는 잠시 이 몸이 만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고······.”
- 휘릭!
그리고는, ‘고미!’라는 짤막한 두 글자를 내뱉기도 전에 나의 소중한 무기들이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웅 노사를 향해 날아갔다.
······.
무기도 뺏겼네.
설마 얼마 전 무서운 손주분이 한 말이 이 상황의 복선은 아니었겠지?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직 제가 천마신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 불필요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이걸 쓰도록 하죠.”
곰 선생님의 행동력에 감화를 받은 것일까?
이강혁 씨 역시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해 인벤토리에서 검은 쇠막대 두 개를 꺼내 들었고,
“큭큭큭······.”
그 모습을 본 봉식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꾸만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보죠.”
그리고 대련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고 말았다.
-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 깡!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이강혁 씨의 공격을 막자,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저려왔다.
‘주, 죽겠어.’
날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걸로 한 대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거라는 확신이 들 만큼 살벌한 공격.
“역시 눈이 좋으시군요.”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수련에 들어간 이강혁 씨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 쐐애애액!
입을 뗄 시간도, 살살 해달라고 말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괜찮아.’
하지만 검의 경로는 단순했다.
게다가 이미 몇 번이나 봐온 검술.
‘막을 수 있······.’
- 뻑!
“컥!”
- 콰득!
“어어억!”
옆구리에 한방, 어깨에 한방.
단단한 몽둥이가 사정없이 몸을 후려치는 순간,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뼈가 부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인정사정 없는 일격.
“한 방 맞았다고 멈추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한 방 맞고 멈춘 걸 확인하고도 기어코 한 방을 보너스로 얹어주신 거구나.
쓰, 쓸데없는 부상은 피하자면서요!
이건 쓸데있는 부상이에요?
“허수아비!”
그때, 평화를 사랑하는 정의로운 아기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그래, 그래도 막상 내가 맞으니까······.
“고작 두 대를 때려놓고 멈추면 어떻게 하느냐!”
······.
“수하! 정신 차리거라! 두 번이나 공격을 허용하고도 바로 방어 자세를 잡지 못하다니! 상대가 정말로 악당이었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란 말이다!”
쓰, 쓰라리다.
이게 배신당한 자의 마음이라는 건가.
아니, 쓰라린 건 뚝배기와 어깨인가.
“수하 씨, 저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내가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 때, 이강혁 씨가 몽둥이로 여유롭게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네?”
“저는 몬스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을 마친 이강혁 씨의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이내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좀 전과 똑같은,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단순한 궤도. 하지만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옆구리를 때렸다.
‘어떻게?’
감각 강화 스킬에 검의 달인 스킬까지 가지고 있는 내 눈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이유가 뭐였지?
- 쉬익!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깡!
“훌륭하네요. 역시 눈이 좋습니다. 집중하세요.”
내가 공격을 막아내자, 이강혁 씨는 피식 웃으며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강혁 씨의 검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간단했다.
공격이 시작할 때는 일부러 조금 느리고 가볍게 휘두른다.
그리고 내가 공격 예상 지점에 검을 가져다 대는 걸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궤도를 틀며 속도를 올려 다른 곳을 때리는 것.
일부러 똑같은 공격을 두 번 공격한 건,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였겠지.
‘이래서 몬스터와는 다르다고 했던 거구나.’
몬스터는 대체로 지능이 낮다.
뭐, 영리한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공격 패턴이 정해져 있고, 인간처럼 다채로운 기술이나 페이크를 구사하지는 않는다.
“수하 씨는 초반부터 능력치나 장비가 너무 좋았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줄곧 몬스터. 그래서 머리를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죠. 이건 검사로서 아주 큰 결점입니다.”
이강혁 씨의 말대로였다.
나는 처음부터 좋은 장비에 제법 준수한 능력치를 가지고 거의 몬스터만 상대해 왔다.
반대로 이강혁 씨는······.
‘A급 평균 수준의 능력치에 A급 검술 스킬로 한국에서 가장 강한 대인전 능력을 가진 헌터 중 하나였지.’
옆에서 구경하는 것과는 달리, 직접 검을 맞대보니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난다.
그야말로 능력치와 스킬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한 실력.
‘안 닿아.’
제대로 된 자세조차 잡지 않고 슬금슬금 내 주위를 걷고 있지만, 절대 내 간격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강혁 씨의 키는 185 정도. 나와의 키 차이는 6~7센티 가량 될까.
팔도 제법 긴 편이라, 팔 길이까지 감안하면 그것보다 훨씬 리치 차이가 있다.
그래봐야 15~20 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 달인을 상대로는, 그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공격하자.’
내가 이 사람보다 간격 조절을 잘할리는 없으니, 이대로 대치해봤자 또다시 두들겨 맞고 말겠지.
< 허곰답보(A)가 활성화됩니다. >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가자, 순식간에 간격이 좁혀졌다.
그러나······.
- 깡!
나의 공격은 너무나 쉽게 막혔고,
- 퍽!
디딤발로 삼은 오른쪽 허벅지에서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억!”
“검로가 단순합니다. 손발이 빠르면 뭐합니까. 노리는 곳이 뻔하면 아무리 빨라도 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같은 검의 달인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거냐!
그나마 희망이 느껴지는 건, SS급이 된 검의 달인 스킬 덕분에 몇 대 두들겨 맞고 나면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고,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퍽!
- 깡!
- 퍼벅!
그렇게 말없이 맞고, 막고, 다시 맞기를 수 차례······.
일방적인 구타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투지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 대 정도는 때리고 끝내고 싶어.’
그래, 아무리 상대가 검성이라도, 한 대 정도는 때리고 싶다.
그리고 이 정도 속도로 상대의 검술을 파악해 나가면, 곧 한 방 정도는 먹여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맞는 횟수보다 막는 횟수가 많아지고, 나의 몽둥이가 점점 더 이강혁 씨의 몸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후우······.”
이에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이강혁 씨의 빈틈을 찾으려 애썼다.
‘이제 한 걸음, 아니, 반 걸음만 앞으로 치고 나가면······.’
하지만······.
< 힘이 하락합니다. >
< 민첩이 하락합니다. >
나에게 닥친 시련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왜!? 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