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1 수하는 굴러야 제맛이지.
「동이를 다시 만날 것.」
토생원과 수다르님이 제자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 아래 붙어있던, 조금은 맥락과 동떨어진 임무.
그때는 그저 용왕의 후원자가 동이님이라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한 줄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내 생각이 맞다면 웅비어천가(3)의 마지막 줄은 틀림없이······. 그런 의미야.’
어차피 가짜 고미가 힘을 회복하면 내 실력이 늘더라도 승부를 내기 어렵다.
아니, 내가 가짜 고미에게 맞설 정도로 강해지는 것보다, 그 전에 녀석이 완성될 확률이 더 크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흑암님, 차라리 우리가 쳐들어가는 건 어때요?”
갑작스런 나의 제안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합리적인 전략은 없었다.
악몽은 적어도 수백 년 이상 대균열이 다시 붕괴되기를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해온 초월자다.
게다가 고미와 맞서 호각을 이룰 정도로 강력하고, 흑암보다 뛰어난 흑마술사이자, 적어도 마력 생명체를 만드는 데 있어서만큼은 토생원보다도 뛰어난 연금술사다.
그런 놈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갖출 때까지 기다리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악몽은 이미 몇 번이나 세계를 멸망시키려다 고미에게 막혔어요. 만수왕은 아주 오래 전부터 고미에게 복수를 하려고 준비해 왔죠. 드래곤로드는 모든 몬스터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드래곤들의 왕이에요. 그 셋이 손을 잡았는데, 여태 선공을 취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반면 우리는 고작 몇 달 전에 급조된 조직이다.
넷이나 되는 초월자 – 수다르님은 아직 정식으로 초월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를 데리고 있지만, 그 중 둘은 비전투 인원이고.
어째서 이 정도로 전력 차이가 나는데 여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거야 위대한 이 몸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 애꾸눈 괭이 놈과 도마뱀 왕은 결코 이 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나의 질문에 우주 최강을 자부하는 슈퍼 아기곰은 곧바로 솜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열변을 토했다.
으음······.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본인 입으로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언제봐도 굉장한 자신감이군.
“그럼 이제와서 현세를 침공하려는 이유는?”
“그, 그것은! 놈들이 주제를 모르기 때문이니라!”
······.
여기서 그런 오답을 내놓는 거냐.
아니, 더듬는 걸 보니 자기도 정답을 알고는 있는 것 같은데······.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 자신감의 근거는 가짜 고미일 테고.”
그때, 꿈도 희망도 없는 냉정한 현실주의자 두더지가 대신 정답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가장 승산이 높은 건 가짜 고미가 타격을 입은 지금 선제공격을 감행하는 거다. 그런 의미군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강혁 씨 역시 내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래도 너답지 않네. 선공이라니.”
나답지 않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해결책에 봉식이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놈들이 우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말이야.”
그래, 적어도 나라는 인간을 알고 있다면, 갑작스러운 선제 공격을 선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군. 내가 너희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에 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준비를 마쳤더라도 고미를 당해내지는 못했겠지만······. 너희들 중 몇 정도는 황천길로 보낼 수 있었겠지.”
이어서 한때는 우리의 적이었던 흑암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 계획이 합리적이라는 데 동의했다.
“흑암님, 가짜 고미가 회복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큰 틀에서 이 작전의 합리성을 검증 받았다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계획의 성공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글쎄, 고미가 녀석에게 타격을 입혔다는 그 기술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그걸 깨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마력을 소모했겠지. 그걸 보충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다.”
몇 달······.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회복이 빠르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만 하다.
순전히 꿀태창에 고미 덕분이기는 해도, SS급까지 도달하는데도 고작 몇 달 밖에 안 걸렸으니까.
“고미, 지금 녀석은 얼마나 약해져 있어?”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아기곰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동글동글한 두 귀를 움직이다 입을 열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얼추 작은 살쾡이보다 조금 더 강할 것이다.”
······.
포기할까.
안 선생님이 그랬는데, 포기하면 편하다고.
그 정도로 타격을 입었는데도 저 무서운 손주분보다 강한 거냐.
“웅 노사, 그 가짜라는 놈이 부상을 입었는데도 저와 비슷할 정도로 강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자신과 부상까지 입은 가짜 고미가 비슷한 수준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무신의 입꼬리가 벌레를 씹은 것처럼 뒤틀렸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저 두더지 놈의 말에 따르면 마무리를 사숙조께서 하셔야 할 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제가 그 가짜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무리로 살짝 손만 보태시지요.”
소, 손주님. 정말입니까.
설마 그 오만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은 이 순간을 위한 포석이었던 겁니까.
“그리고 그 가짜 웅 노사를 처리하면, 악몽의 지배자인지 뭔지하는 자와도 자웅을 겨뤄보고 싶군요.”
호, 호방하다. 호방해.
뭐가 이렇게 거칠 게 없냐.
“으, 으음······.”
상황이 이쯤되자, 고미 역시 단칼에 안 된다는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바로 그때,
“그런데 김수하, 네 계획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줄곧 내 의견에 동의를 표하던 흑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계획의 전제는, 놈들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셈이지?”
녀석의 작은 두 눈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
“알아요. 적어도 한 명은.”
그래, 동이님은 황금의 군주를 물리치고 드래곤 로드를 교체하려 하고 있었다.
설마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계획을 세우지는 않겠지.
“고미, 동이님은 황금의 군주와 고향이 같다고 했지? 그럼 그곳에 드래곤들이 모여있는 거 아니야?”
나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고미가 아니라 이유찬 씨였다.
“아마도 주군은 황금의 군주의 소재를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게다가 드라고니아에는 저나 제르보나처럼 주군을 섬기는 드래곤들이 있으니, 그곳에서 전쟁을 벌인다면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유찬 씨의 눈빛은, 한없이 차갑고, 동시에 뜨거웠다.
숲속 친구들의 전담 요리사이자, 농땡이를 피운다고 제르보나에게 핀잔을 듣던 ‘흑룡 셰프’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진지한 눈빛.
“하지만 신성한 드래곤들의 고향에 그런 사악한 존재들을 불러들였을지는 의문이군요.”
‘의문’이라는 애매한 단어를 쓴 것과는 달리, 이유찬 씨의 눈에는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노와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악몽의 지배자나 만수왕 같은 사악한 존재들과 손을 잡고 자신의 고향을 더럽혔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럼 최소한 각개 격파라도 할 수 있겠죠. 동이님이 드래곤 로드가 되면, 만수왕과 악몽을 상대할 때 드래곤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요.”
“알겠습니다. 드디어 드래곤 로드를 교체할 때가 왔군요.”
“오오! 그렇다면 이제 사악한 도마뱀을 몰아내고 동이가 왕이 되는 것이냐!?”
이유찬 씨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아기곰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는 듯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무신이 나를 도와주고, 숲속 친구들까지 손을 보탠다. 거기에 고미가 가장 믿는 동이님까지 힘을 보탤 게 확실한 상황이니, 이만하면 내가 목숨을 잃지는 않을거라 생각한 거겠지.
“고미, 그럼 이제 된 거지?”
“으음······. 좋다. 아직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이어지는 아기곰의 말에, 이번에는 반대로 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신 놈들을 혼쭐내러 가기 전까지 수하 너는 이 몸과 함께 특훈을 해야할 것이다.”
트, 특훈······.
순간 지리산에서 펼쳐졌던 처참한(?)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물론 그때의 나는 E급이었고, 지금의 나는 명실상부한 SS급이니, 그때 같은 참극은 벌어지지 않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지만······.
이 슈퍼 먼치킨 아기곰이 작정하고 나를 굴리기 시작한다면, SS급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주, 죽었다. 어쩌면 가짜 고미가 아니라 원조 아기곰 손에 죽을지도······.’
불안하다, 전쟁보다 이게 더 무섭다.
“그, 그럼 우선 동이님을 만나러 가자.”
한겨울에 얼음물에 빠진 듯 전신을 휘감아도는 오한에, 나는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돌리고 말았다.
“수하······. 설마 이 몸의 제자가 특훈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호랑이, 아니, 곰 같은 스승님은 자비를 베풀 마음 따위는 없다는 듯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며 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어, 어째서 이런 순간에만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냐!’
평소에는 안 이렇잖아.
매번 눈치없이 굴다가 왜 이런 일에 관해서만!
“그렇군요. 저도 그 사이에 특훈을 좀 해야겠습니다. 어차피 저와 능력이 비슷하시니, 같이 특훈을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특훈’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이강혁 씨가 천마신검을 만지작거리며 특훈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오, 그래. 나도 더 강해져야지.”
봉식이도 가볍게 몸을 풀며 나에게 다가왔다.
“좋다! 검을 쓰는 녀석도 있고, 주먹을 쓰는 녀석도 있으니, 더욱 알찬 특훈이 되겠구나!”
숲속 친구들이 의욕이 가득한 반응을 보이자, 아기곰의 커다란 눈망울이 타오르듯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아, 안돼. 이러지마. 이럴수록 특훈의 강도가 올라갈 거라고!’
하지만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서운 손주분께서 결정타를 꽂아버렸다.
“사숙조와 가짜 웅 노사의 능력은 모두 웅 노사와 비슷하니, 저와 대련하며 약점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
강해지고 싶은 건 맞는데······.
꼭 너랑 대련을 해야 하는 거냐?
강해지기 전에 죽을 것 같은데?
‘아니야, 마음 굳게 먹어야지 김수하. 어차피 목숨을 버릴 각오로 가짜 고미에게 맞서기로 했잖아.’
그래,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때, 나의 불안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메시지가 시스템 창에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
< 메인 퀘스트 : 더 높은 곳으로 (완) >
-지리산의 신령, 수다르 8세는 초월의 가능성을 가진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모종의 이이류 스스로 지리산의 신령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수다르가 더욱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설득하세요.
< 달성 조건 >
1. 수다르를 설득하여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기 (완)
숲속 친구들의 특별 커리큘럼을 만들 당시 주어졌던 퀘스트.
이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한걸음은, 수다르님이 첫 번째 제자를 받는 것이었다.
이게 완료 됐다는 건, 지금 웅왕에서 수다르님이 첫 번째 제자를 받았다는 거겠지.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보상’란의 내용을 보는 순간, 전에 없이 강렬한 불안감이 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 달성 보상 >
전용 특수 스킬 : 피로야, 가라! (Gomi)
‘피로야, 가라’니······. 이건 무슨 드립인가 싶어서 머리를 굴려보니, 커다란 곰을 심벌로 사용하는 모 제약회사의 로고가 떠올랐다.
아마 ‘간 때문이야’도 그 회사에서 만든 노래였지. ‘피로야, 가라’도 그 약품의 홍보 문구고.
심지어 제약회사 이름도 대ㅇ······.
이런 걸 다 알고 있다니, 관리자 양반도 드립을 위해 제법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든, '피로야 가라'는 무려 Gomi 등급의 스킬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입에 귀에 걸려야 할 보상이지.
하지만 스킬의 내용을 보니,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