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0 갓-고미도 가끔은 두려움을 느낀다.
“안 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느니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에, 당사자인 나보다 고미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고슴도치처럼 곤두선 솜털과 꼬리에 앙다문 입, 빳빳하게 일어선 귀까지.
굳이 고미 학자가 아니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굳이 나를 딱 집어 말한다는 건, 그 ‘무기’라는 게 오직 나에게만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용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무기라는 게 뭔데요?”
“내 생각이 맞다면, 그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하아······.”
흑암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 웅왕빔이라는 걸 쓸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필살기의 이름을 유치하다고 평하는 듯한 그 태도에, 스틸맨 마니아 아기곰은 솜방망이를 바르쥐며 벌컥 성을 냈다.
“네 이놈! 감히 스틸맨의 웅혼한 기상이 깃든 위대한 기술을 한심하다고 여기는 것이냐!?”
하지만 숲속 친구들 중 ‘꿈’이나 ‘희망’ 따위와는 가장 거리가 먼 캐릭터인 흑암은 그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김수하, 그 녀석이 마지막에 검은빛을 폭발시켜 고미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했지? 그걸 보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없었나?”
그 질문에 고미와 일전을 벌일 때 거대 두더지로 변했던 흑암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분명히 다르지만, 상당히 비슷했어.’
다만 흑암의 것은 자신의 몸 위에 무언가를 두른 느낌이었다면, 가짜 고미의 그건······. 그 검은 기운 자체로 몸을 만든 느낌이랄까.
“설마 흑암님이 고미와 싸울 때 썼던 능력과 가짜 고미의 능력이 비슷하다는 건가요?”
“아니, 나와는 다르다. 나는 그저 미리 내 마력을 주입해둔 제물들을 사용해 갑옷을 만들 뿐이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다른 생명체의 마력을 흡수해 자신의 육체와 마력으로 환원하는 걸 테지.”
그 순간, 가짜 고미가 나타났을 때 녀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우하하하! 도망가지 말거라! 너희는 모두 위대한 이 몸의 먹이가 되어야 하느니라!」
드라고니아산 미스릴처럼 다른 능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게······. 그런 의미였나?
“다른 몬스터를 먹어서, 그 마력을 자기 걸로 삼는다고요?”
“그래, 그것만큼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아마도 그 악몽이라는 자는 나보다도 더 흑마법에 조예가 깊은 것 같군.”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봉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웅왕빔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내가 듣기에, 그건 퍽 상당히 타당한 의문이었다.
확실히 남자의 로망이 담긴 기술이기는 하지만, 꼭 웅왕빔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흑마법사의 대가인 흑암은 그 질문을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아······. 설마 너희들······. 그 빔인지 뭔지 하는 것에 담긴 힘이 뭔지 모르는 거냐?”
······.
웅왕빔이 웅왕빔이지, 정체까지 필요한 겁니까.
“아!”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이유찬 씨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파마(破魔)의 빛!”
“우웅?”
그러나 정작 빔을 쏘는 슈퍼 아기곰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제르보나가 그랬습니다. 웅왕빔에 흑마법이나 사악한 기운을 소멸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고.”
그러고 보니, 고미가 빔으로 흑암의 몸을 소멸시켰을 때, 제르보나 씨가 이상한 말을 했었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투가 끝나고 고미님과 얘기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흑암은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
설마, 악당들을 물리치는 스틸맨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사악한 기운을 멸하는 빔을 만들어낸 거냐?
그것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 오오! 그렇구나! 그 사악한 녀석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마음이 가득 담긴 필살기가 필요한 것이구나!”
그제야 웅왕 빔에 담긴 비밀을 깨달은 아기곰은 잔뜩 흥분해 연신 솜방망이를 두드렸고,
“하아······. 미치겠군. 김수하, 넌 어떻게 이 녀석을 데리고 나를 찾아낸 거지?”
늘 그랬듯 자기가 뭘 해냈는지도 모르고 감탄하는 순진무구한 아기곰의 모습에 흑암은 황당함과 감탄, 답답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하튼, 망자의 갑옷은 본래 물리력으로는 파괴할 수 없다. 보다 정확히는, 파괴해도 금세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오직 파마의 힘이 담긴 공격으로만 소멸시킬 수 있다.”
이후 흑암은 전공지식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 애쓰는 교수님처럼 긴 한숨을 내쉬며 그나마 말이 통한다고 느끼는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비유가 왜 이러냐고?
내가 저 눈빛 받고 대답 잘못했다가 대학원 갔거든.
아니, 잘했지. 잘했는데, 세상 일이라는 게, 정답을 말하거나 잘하는 게 잘못된 선택일 때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혹시 수업 중에 저런 눈빛을 받는다면, 모르는 척 눈을 피해라.
대학원생 되는 수가 있으니까.
“게다가 녀석의 마력은 나보다 훨씬 강하고, 회복도 빠를 테지. 가짜라고는 해도, 저 괴물 아기곰의 가짜니까. 그러니 녀석을 상대로 승부를 내려면, 반드시 그 파마의 힘이 필요하다.”
흑암이 설명을 마치자, 이번에는 이강혁 씨가 또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곰 선생님은 이번 싸움에서 빔을 쏜 적이 없습니다.”
“그거야 녀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내 짐작이 맞다면, 그 관리자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놈이 완성되기 전에 손을 쓰려한 것 같은데.”
내 생각 역시 흑암과 같았다.
힌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일목요연했지만, 정작 원조 아기곰과 마주친 가짜는 원조의 능력을 흡수하지 못했다.
답은 간단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다.
아니면 무언가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든지.
“가능하면 녀석이 완성되기 전에 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대비책이라도 마련해라. 아마 관리자의 의도는 그런 거겠죠.”
내가 추측한 바를 간략하게 전달하자, 흑암은 이제야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는 듯 보기 드물게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다. 김수하, 역시 너는 말이 좀 통하는군. 아마 녀석들이 아직 현세를 침공하지 않은 것도, 그 가짜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흑암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가짜 고미는 악몽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다.
그게 완성됐다면, 이미 현세를 침공했겠지.
모든 게 준비됐는데 전쟁을 벌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천마가 입을 열었다.
“흥, 참으로 허술하고 얄팍한 생각이구나. 네 말대로 그 가짜가 웅 노사를 잡아먹으려면, 먼저 웅 노사를 꺾어야 한다. 하지만 힘을 흡수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면, 굳이 힘을 빼앗을 이유가 무엇이더냐?”
질문을 던지는 무서운 손주분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 묻어났다.
지금 흑암의 발언은 가짜 고미가 완성됐다면 원조 아기곰이 패배했을 거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스스로를 무신이라 칭하는 천마로서는 적잖이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겠지.
“흥, 너야말로 생각이 짧군. 그 녀석이 완성됐다면, 잡아먹지 않고도 고미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음, 이 두 사람······.
궁합이 안 맞는구나.
‘하긴 둘 다 그렇게 성격이 좋은 캐릭터는 아니니까······.’
흑암의 답변을 들은 천마는 상대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꼈는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미간을 찌푸릴 뿐, 더이상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말싸움하다가 주먹이 오갈 줄 알았더니.’
물론 그랬다가는 평화를 사랑하는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에게 곧바로 응징을 당하겠지만.
아니, 그럴까 봐 주먹 싸움을 하지는 않은 건가?
천마가 입을 다물자, 흑암은 살짝 거만한 말투로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내 예상이 맞다면, 그 가짜가 완성되는 순간, 고미는 녀석과 싸울 때마다 계속해서 마력을 빼앗길 것이다. 지금 몸집을 불리고 있는 건, 아마 고미의 마력을 감당할만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일 테고.”
이 대목에서 흑암은 선글라스를 고쳐쓰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장 나쁜 건, 설령 그릇이 완성되지 않았다 한들 궁지에 몰리면 자기 몸이 터져나가더라도 최대한 타격을 주고 자폭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끔찍하군······. 하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이번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건, 아직 달아날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정말로 막다른 길에 몰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법이지.
‘역시, 내가 상대해야 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가짜 고미가 원조의 힘을 절반, 아니, 4분의 1만 흡수해도, 악몽과의 일전에서 녀석을 막을 사람이 남지 않을 테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악몽의 지배자가 노림수도 이거일 테고.
“그래도 너희가 어느 정도 타격을 줬다고 하니, 이번만큼 강하지는 않을 거다. 마무리를 김수하가 해야 한다는 것이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흑암이 말꼬리를 흐리자, 무신이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대신했다.
“그 녀석도 멍청이가 아니니, 당연히 사숙조를 최우선으로 노릴 거다. 그런 의미군.”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 우웅······. 그렇지만······.”
그러나 정작 악당들을 혼내 주겠다며 흥분해서 솜방망이를 휘둘러야 할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은, 커다란 눈알을 데록데록 굴려가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저러고 있는 거겠지.
이에 나는 애써 용기를 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정한 아기곰을 달래주었다.
“고미, 난 괜찮아.”
솔직히 말해서, 괜찮지 않다.
백번 목숨을 걸어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 못할 괴물에게 맞서야 하는데, 누군들 괜찮겠나.
게다가 지금껏 줄곧 워라밸이나 챙기는 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소시민 따위에게, 덜컥 목숨을 걸 용기 따위가 생길 리가 없다.
하지만······.
“난 정말 괜찮다니까, 당장 내일 싸우라는 것도 아니잖아. 퀘스트도 몇 개 남아있고, 그것만 완료되면 또 새로운 스킬이 생길 거야.”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오늘도 삼 대 일이기는 해도, 그럭저럭 버텨냈잖아. 게다가 그 녀석은 너한테 당해서 약해졌고, 나는 아직 더 강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을 거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이 다정한 슈퍼 아기곰의 도움을 받아왔다.
이 녀석 덕분에 가족을 되찾았고, 웃음을, 그리고 소박한 행복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녀석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 되어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가장 강한 적은 이 슈퍼 아기곰이 상대했고,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것도 이 녀석이니까.
“하, 하지만······.”
“고미, 네가 그랬잖아.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엄마와 아빠가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언젠가 고미가 했던 말.
긴긴 시간을 외로움 속에 살던 아기곰이, 처음으로 가족을 얻은 다음 했던 그 말.
그 말은 여전히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이런 착한 마음을 가진 녀석을 또다시 홀로 싸우게 둘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외로운 아기곰에게 처음 생긴 가족이자, 제자이자, 친구이자, 수하인 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
거창한 정의감이나 사명감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그저 최소한의 염치를 가진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날 지키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난 죽지도 않을 거고.”
그때, 이강혁 씨와 봉식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곰 선생님, 제가 책임지고 수하 씨를 지키겠습니다.”
“그래, 나도 도울게.”
이어서 이주혁 씨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 저도 더 강해져서 반드시 도움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 팀장님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논리적인 답변을 덧붙였다.
“어차피 곰 선생님이 그 가짜에게 힘을 빼앗기면 저희는 다 죽은 목숨 아닙니까? 그럴 바에는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보는 편이 나을텐데요.”
“그래, 어차피 네가 당하면 모든 게 끝이야. 그러니까 그 가짜는 내가 맡을게. 대신 그 전까지 네가 날 더 강하게 만들어주면 되잖아. 가짜 따위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우, 우웅······.”
그러나 처음으로 얻은 제자이자 가족인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고미는 언제나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째서 아무리 강한 적이 나타나도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는 용기를 가진 녀석이, 친구와 가족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걸까.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게 죽기보다 무서운 거겠지······.’
어쨌든, 이런 상태인 고미에게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해. 내게 승산이 있다는 걸 보여줄······.’
그렇게 겁에 질린 아기곰을 설득하기 위해 머릿속에 나열된 변수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는 사이, 이유찬 씨가 고미를 달래기 위해 ‘든든한 지원군’의 존재를 언급했다.
“걱정 마십시오, 고미님. 저의 주군께서도 도와주겠다고 하셨으니, 수하 님은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동이 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잠깐. 웅비어천가(2)에 왜 동이님을 다시 만나라는 얘기가 있었던 거지?’
가장 나답지 않은, 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해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