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29화 (229/300)

EP.229 세상을 지키기 위해 걸어야 할 것.

숲속 친구들은 모두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다.

아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럼 지금 자기만 빼놓고 싸움을 하고 왔다는 사실에 분개해 검까지 빼드는 이 손주분의 역할은, 대체 뭘까?

“배, 백천, 왜 그래, 미안해. 우리도 그렇게 큰 싸움이 될 줄은 몰랐어. 다음에는 꼭 너도 데리고 갈게.”

당황한 내가 앞으로는 꼭 같이 놀아주겠다는(?) 말을 건네자,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손주분은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왜 이러십니까, 사숙조. 저만 빼놓고 재미있는 일을 하신 것 같아 조금 섭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감히 노사들 앞에서 칼을 빼들고 난동을 부릴 수야 있겠습니까?”

······.

그렇지, 그게 상식적인 행동이지.

그럼 그 칼은 왜 꺼내신 건데······요.

“이 검은 그저 이 노사에게 빌려드리고자 꺼낸 것입니다. 제가 현세에 머무는 동안은 이 검을 쓰시지요.”

말을 마친 천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새카만 검집에 든 장검을 이강혁 씨에게 내밀었다.

‘우씨······. 그런 거면 미리 말을 하지.’

선 설명, 후 행동, 그게 그렇게 어렵나······.

게다가 네 실력으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면, 솔직히 말해서 너무 무섭다고.

“어차피 저는 무검지경에 오른지 오래라 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나 검은 쓰여야만 의미가 있는 법이니, 검에 붙은 녹이나 뗄 겸 이 노사에게 빌려드리겠습니다.”

이강혁 씨가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천마는 얼른 받아가라는 듯 한 번 더 장검을 내밀었다.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마따나, 천마가 내민 장검은 한 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옻칠을 한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손잡이와 그에 대비되는 은은한 금색의 검병과 칼머리까지······.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장검이 아니라는 것만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무검지경에 올랐다는 양반이 굳이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무협지에 나오는 절세신병이나 기물이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본교의 신물을 천마인 제가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 잠깐! 본교의 신물이라니, 설마 그거······.

“백천, 설마 그 검······. 천마신검이야?”

“그렇습니다.”

이, 이런 미친······. 천마신검을 그렇게 집에서 사과 깎는데 쓰는 칼 넘겨주듯 슥슥 넘겨줘도 되는 거냐!

“그거 8대 천마한테 물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검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 실력도 못 내는 녀석이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어 제가 가지고 나왔습니다.”

······.

굉장하다. 성격이 보통이 아닌 건 알았지만,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흐으음······. 그렇지, 확실히 무기가 너무 뛰어나면 실력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는 법이지.”

천마의 말을 들은 고미는 감탄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안돼, 이상한 거에 감화되지 말라고.’

지금 저 발언,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꼬장 좀 놨습니다’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거잖아.

예비역 병장이 중요한 물건 하나 숨겨 놓고 전역하는 거랑 비슷한 수준의 꼬장이잖아!

하지만 천마의 말에 감화된 아기곰은 이미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무기를 뺏어야 위대한 이 몸의 제자가 더욱 강해질 수 있겠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거기에 ‘위대한 이 몸의 제자라면 역시 무기 따위에 의지해서는 안 되느니라’가 보태질 것 같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아기곰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 고미. 네 말대로 난 비실이잖아. 이 엄청난 무기들이 없었다면 이미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실 여태 다치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야. 오늘만 해도 봐, 네가 만들어준 방패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숯덩이가 됐을 거라고.”

우선 명공, 아니, 명곰 갓-고미 선생의 작품을 칭찬하자. 이 녀석의 가장 큰 약점은 칭찬에 약하다는 거니까.

“흐으으음······.”

자신의 걸작을 칭송하자, 명곰 갓-고미 선생께서는 고민에 빠진 듯 침음을 흘렸다.

‘으으, 이걸로는 부족한 거냐.’

이런 논리로는 이미 무협지 스승 모드에 들어간 아기곰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미, 생각해 봐. 내가 다치면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아니, 단순히 걱정하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걸?”

“우, 우웅!?”

공포의 군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세상 거칠 것 없는 슈퍼 아기곰의 눈동자가 숨길 수 없는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 그렇구나! 어, 엄마를 걱정시킬 수는 없지!”

역시, 이게 직빵이구나.

왠지 엄마에게 이른다고 외치며 울먹이는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지. 목숨보다 귀한 게 세상에 어딨겠나.

“자, 허, 허수아비! 너도 비실이니 좋은 검이 필요하다! 어서 그 무기를 받거라!”

천마에 이어 곰 선생님까지 검을 받으라고 하자, 이강혁 씨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천마신검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호칭은 이 노사인데, 이 그림은 어떻게 봐도 이강혁 씨가 아랫사람이잖아.

“검령이 깃들어 있기는 하나, 이 노사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무공 역시 크게 진보할 터이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천마는 이 기괴한 상하관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천마신검에 대해 설명했다.

“감사합니다. 아마 제 생에 가장 훌륭한 검을 만난 듯 싶군요. 반드시 검령을 제압해 보이겠습니다.”

이강혁 씨의 말에 새카만 검의 손잡이와 검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괜찮으려나, 마검 같은 건 아니겠지?’

주인만큼이나 검도 한성깔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파천대웅검결까지 익힌 이강혁 씨라면 저 검령이라는 걸 잘 제압할 수 있겠지.

고미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럼 난 노인국 씨한테 연락을 좀 할게.”

이후 나는 노인국 씨에게 전화를 걸어 고미와 함께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했고,

“그, 그럼 어서 흑암을 만나러 가자꾸나!”

통화를 마치자, 아기곰은 황급히 깨깨오 블랙이 되어버린 유찬호를 재촉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치 방금 전 그 대화를 공포의 군주가 엿듣기라도 했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 * *

“그나저나, 노사들께서는 참으로 선인 같은 생활을 하시는군요.”

유찬호의 등에 올라 하늘을 날아가는 사이, 천마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그래?”

“기약영초가 가득한 곳에 기거하며, 인간과 신비한 힘을 가진 영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평화로이 살아가고, 용을 타고 원하는 곳을 오가니, 이게 선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음······. 이게 또 뭐든지 갖다 붙이기 나름이라고,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겉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우리 앞에는 커다란 산이 남아있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정말 숲속 친구들이랑 신선놀음이나 하면서 살고 싶네.’

아기곰 삼형제와 댕댕이 오형제, 아기용이 풀밭을 뒹굴며 뛰어다니고, 미식가 수달이 흑룡 셰프의 요리를 맛보고, 새하얀 토끼와 두더지가 정성껏 기른 과일과 채소로 디저트를 만들어 다 같이 모여 티타임을 즐기는, 그런 생활.

‘생각만 해도 즐겁군.’

나에게 행복과 여유로움은 같은 말이다.

꼭 엄청나게 즐거운 일이 없어도, 그냥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이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그렇게 무사히 이 싸움이 끝나고 숲속 친구들과 여유로운 워라밸 라이프를 만끽하기를 기원하고 있을 때······.

“오, 오오! 수, 수하! 저것 보거라! 문어 할아범의 집이!”

잔뜩 흥분한 아기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자,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빌딩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심지어 건물 근처에 커다란 조명까지 설치해 건물의 화려함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불규칙하게 구획을 나눠 빨강과 노랑,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해놓은 사각형의 빌딩에,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조명까지······.

‘설마 리모델링을 한다는 게 이렇게 한다는 거였냐!’

컬러 메이지로 바꿀까 고민 중이라더니, 확실히 건물 모양만 봐서는 더이상 블랙 메이지라고 하기는 어렵겠군······.

유찬 호가 빌딩 앞에 내려앉자, 컬러 메이지의 수장인 New인국 씨와 그 오른팔인 이희정씨, 그리고 몇몇 길드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어, 고미 선생! 왔는가!”

“우, 우웃! 수, 수하! 흑암이! 흑암이!”

흑암의 모습을 본 고미는 무언가 엄청난 것을 본 아기곰처럼 잔뜩 흥분하여 또다시 나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괴, 굉장해.’

고미를 따라 흑암과 New인국 씨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는 아기곰의 솜방망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말았다.

“흐, 흐흠! 바깥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흑암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마주친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왜냐하면 지금 흑암은······.

애니메이션에서나 본 것 같은 끝이 날카로운 삼각형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니까.

‘아니지, 저 정도면 삼각형도 아니야.’

심지어 안경테 끝부분이 너무 심하게 올라가 있어서, 선글라스가 V자로 보일 정도다.

‘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을 구한 거지?’

전국을 다 돌아다녀도 흑암에게 맞는 사이즈에 저런 모양을 한 선글라스는 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흐, 흑암! 그 멋진 물건은 어디서 난 것이냐!? 설마 문어 할아범이 선물해 준 것이냐!?”

하지만 나와는 달리, 고미는 그 선글라스가 제법 멋지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새삼 궁금해진다.

대체 이 녀석에게 ‘멋’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인 걸까?

“허허, 흑암이 아직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걸 조금 어려워해서 말이야. 내가 하나 선물해줬지.”

New인국 씨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왼쪽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흑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흐, 흠······. 인간들은 편리한 물건을 제법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어깨 위라니, 저 포지션······. 조금 익숙한데.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고미는 목마를 타듯 두 다리를 내 어깨에 걸쳐놓고 머리 위에 배를 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가 봐도 고미가 내 머리 위에 있는 그림이지.’

반면 흑암은 그냥 왼쪽 어깨 위에 서 있는 거니까. 조금 더 대등해 보이는 위치선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찾아온 거지?”

너무나 사이가 좋아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흑암이 나에게 용건을 물었다.

“던전에서 가짜 고미를 만났어요.”

나의 대답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자리에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렇군······. 녀석을 죽이는 데 성공했나?”

잠시 후, 흑암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뇨, 놓쳤어요.”

이후 나는 흑암에게 가짜 고미의 생김새와 언행은 물론이고 능력까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전해주었다.

그리고는 녀석이 고미의 힘을 빼앗을 수 있는지, 만일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글쎄······.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다.”

“그 짚이는 구석이 뭔데요?”

“사실 너희에게 패한 이후로 줄곧 케르베로스에 대해 다시 연구를 해보았다.”

이 대목에서 흑암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V자의 선글라스를 살짝 밀어 올렸다.

“흐흠······. 너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연구한 것은 아니다. 그, 그냥, 세 번째에게 놀아났다는 기분이 들어서 불쾌했을 뿐이지.”

음······. 우리를 위해 연구한 게 맞구나.

하여간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그리고 히드라의 주머니와 그 아이템을 돌려받고 나서, 불완전하지만, 제법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흑암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불과 하루 사이에 부쩍 덩치가 커져있던 작은 삼돌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그 결과가 뭔데요?”

나의 질문에 흑암은 한참을 망설이다 선글라스 너머의 작은 눈으로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입을 뗐다.

“어쩌면 너희에게는 이미 그 가짜 고미를 막아낼 방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김수하, 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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