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28화 (228/300)

EP.228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고미보다 나은 점은, 곧 고미에게 부족한 점이기도 했다.

인내심.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면서 행동하는 주도면밀한······. 고미의 표현에 따르자면 ‘모리배’ 같은 면이랄까.

‘그래도 모리배는 너무한 거 아니냐.’

책략가, 모략가, 꾀주머니, 수갈량······.

얼마나 좋은 표현이 많은데 하필 모리배냐.

역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첫 만남에 나쁜 인상을 남긴 게 조금 후회된다.

‘아, 아니지, 이게 중요한 건 아니구나.’

여하튼, 저 몸이 너무 좋아 머리가 고생할 일이 없는 슈퍼 아기곰은, 일이 생기면 일단 몸부터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아니, 애초에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니 굳이 머리를 쓰는 법을 배우지 않은 거겠지.

숫자에 약해서 그렇지, 머리는 제법 좋은 녀석이니까.

특히 먹을 것과 노는 것에 관한 기억력만큼은 명실공히 영재곰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흥! 그 먹구름과 번개가 악몽의 새로운 능력이라 해도 상관없다! 이 몸에게도 새로운 필살기가 생겼으니 말이다! 위대한 이 몸의 가족을 해치려 한 그 녀석에게 웅왕빔의 위력을 보여주겠다!”

- 키이이잉!

초콜릿색 솜털이 보송보송 돋아난 솜방망이가 전방을 향하자, 분홍빛 젤리 위로 눈부신 빛이 모여들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오, 오오! 정말 굉장하네요, 교관님! 이게 그때 그 무신을 쓰러뜨렸던 웅왕빔이라는 건가요!?”

‘빔’이 등장하자, 줄곧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던 이주혁 씨가 흥분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오, 오오!’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감탄사 같은데.

설마 벌써부터 고미 흉내를 내는 거냐.

반면, 신 팀장님은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밖에 없는 저 엄청난 기술을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어, 엄청나군.’

빔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니, 이 시대의 진정한 차도남이다.

문득 지금 가지고 있는 병(?)이 치료되고 나서도 그런 무뚝뚝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군.

“후후, 그렇다. 수하가 악몽을 찾아내기만 하면, 이 몸이 곧장 이 빔으로 녀석을 혼쭐내주겠다!”

웅왕빔의 멋짐을 알아보는 꼬꼬마 신도의 반응에, 잔뜩 신이 난 아기곰의 콧대가 하늘을 뚫을 듯 높아졌다.

‘으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계획으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다니······.’

마치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 같은 행동이군.

‘그래, 저런 성격이라면 함정인지 아닌지 따져보지도 않고 가짜 고미와 맞섰다가 힘을 빼앗겼을 가능성이 높지······. 어쩌면 그때처럼 충격을 받아서 그대로 굳어있다가 기습을 당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고미가 힘을 빼앗긴다면, 그걸로 게임 오버다. 이건 생각할 필요도 없지.

‘설마, 관리자는 처음부터 그 결말을 내다보고 나를 고미와 만나게 한 건가?’

아니, 설마가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

그래서 사소한 일 하나에도 사서 걱정하며 계획을 짜는 나를 고미에게 붙여주고, 온갖 퀘스트와 보상을 주며 여기까지 유도한 거겠지.

아마 이강혁 씨가 경험한 세 번의 멸망은, 나와 만나지 못한 고미가 홀로 적들과 맞선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숲속 친구들과의 첫만남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화살처럼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강혁 씨, 고미랑 제가 지리산 던전을 예정보다 일찍 클리어하지 않았다면, 저희가 만날 일도 없었겠죠?”

나의 질문에 이강혁 씨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사건은, 알게 모르게 이강혁 씨의 인도를 받아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회귀자인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짜왔으니까.

‘고미와 내가 나타나면서 달라진 지점들을 제외하면, 큰 틀은 언제나 이강혁 씨가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였으니까.’

고미와 내가 만나면 가장 먼저 벌어질 일은, 너무나도 뻔했다.

부모님을 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수다르를 만나야 한다.

수다르 님을 만나서 던전을 클리어하면, 이강혁 씨가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멸망의 시작은 언제나 수다르님의 죽음으로 시작됐다고 했으니까.

‘왜 이걸 이제 깨달았을까.’

이제 와 돌아보니, 고미를 만난 순간부터 이강혁 씨를 만나는 건 정해진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이강혁 씨는 우리의 인도자라는 포지션으로 가장 먼저 숲속 친구에 합류한 것일 가능성이 컸다.

한유진 씨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미와 다니려면, 펫 등록은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펫 등록을 하는 과정에서 임성한 씨를 만났고, 이 인연은 다시 한유진 씨와 이어졌다.

그리고 한유진 씨가 우리를 인도한 곳은, 동이님의 이공간이었다.

“고미, 한유진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동이 님을 다시 만날 수도 없었겠지?”

“후훗, 그렇지. 삼룡 어멈과 검은 콩에게는 아직도 고마워하고 있느니라. 그때는 위대한 이 몸의 소중한 초코바를 불태워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말이다.”

동이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미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그 후에 이 몸에게 매일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수하 너의 무기를 만드는 데도 도움을 주었으니, 관대한 이 몸은 이미 모든 걸 용서했느니라.”

으음······. 초코바 하나로 너무 많은 걸 받아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냐······.

아무리 봐도 편의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천오백 원 짜리 초코바 하나를 불태운 것치고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신 것 같은데.

어쨌거나, 동이님은 확실히 가장 강력한 아군 중 하나이자, 고미의 오래된 친구였다.

하지만 관리자가 단순히 그런 이유로 동이님을 만나게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관리자의 진짜 목적이 세상을 지키는 거라면······. 단순히 고미를 옛 친구와 재회시키기 위해 내 등을 떠밀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이례적인 보상을 제시하며 동이님을 만나러 가게 부추겼던 이유를 가짜 고미의 정체나 대응법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면······.

“고미, 알틴한테서도 동이님 냄새가 나?”

내 코로는 작은 금동이와 금동이의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추측이 맞다면, 그 둘의 냄새는 분명히 비슷하지만 다를 것이다.

“아니다, 동이와 비슷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똑같지는 않느니라.”

그래, 그렇겠지.

알틴은 동이님의 부하이자 친구였다는 그 드래곤의 영혼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아이니까.

즉, 그릇은 동이님이 만들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건 타인의 영혼이다.

‘비슷해.’

가짜 고미가 어떤 존재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나니, 알틴과 녀석은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짜 고미와 비슷한 건 알틴 뿐이 아니었다.

아웅이, 다웅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꿀콕으로 맺어진 꿀보다 진한 의형제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 생명의 근원은 고미의 기가 담긴 ‘털’이니까.

이에 내 생각은 자연스레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처럼 한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고미, 혹시 악몽의 지배자와 싸울 때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어?”

알틴의 생명을 유지해주고 있는 건 동이님의 뿔.

아웅이와 다웅이의 몸을 유지해주고 있는 건 고미의 털이다.

그러니까, 가짜 고미에게도 그것에 해당하는 기관이 존재하겠지.

“흐, 흐흠······. 녀석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그만 발톱과 이빨이 부러지고 말았다.”

······.

들을수록 소름이 돋는군.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미스릴과 비브라늄마저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슈퍼 아기곰의 이빨을 부러뜨릴 수 있는 거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튼튼하고 강하게 자랐다! 보거라!”

악몽에게 당해 이빨이 부러졌다는 사실이 분했던 걸까? 자존심이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기곰께서는 곧장 앙증맞은 입을 벌려 자신이 치과 치료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 건치(健齒) 아기곰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단 걸 그렇게 먹는데도 썩은 곳이 없다니, 여러모로 굉장하군.’

음······. 모든 걸 깨닫고 나니, 새삼 관리자가 왜 날 붙여줬는지 이해가 간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됐는데도 그때 잃은 자신의 손톱과 발톱이 가짜 고미의 핵이 됐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하지만 가짜 고미의 정체를 알아냈다 한들, 녀석이 어떻게 원조의 힘을 빼앗으려 하는 것인지, 또 어떻게 하면 그걸 막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에 나는 또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강혁 씨, 이제 괜찮으시죠?”

“네, 충분히 움직일 수 있습니다. 뭔가 떠오른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 수다르님과 토생원을 만나봐야겠어요.”

- 띠링.

그때, 시스템 창이 나에게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 메인 퀘스트 : 불러봐요, 웅비어천가 (3) >

퀘스트 설명은, 앞선 두 개의 퀘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성 조건 역시 큰 차이는 없었다.

< 달성 조건 >

- 용왕의 길드원들이 수다르와 토생원의 실력을 인정할 것

- 용왕의 길드원들이 삼룡이 패밀리가 강해진 것이 위대한 곰의 업적임을 인지할 것(완)

- 토생원과 수다르가 각각 다섯 명의 제자를 거둘 것.

- 동이를 다시 만날 것.

마지막 줄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모든 추측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동시에, 야채 가게 패밀리들이 왜 화원을 비웠는지를 깨달았다.

화원에 포션과 창고를 만들어둔 것처럼, 스스로 고미의 힘이 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면 다른 곳부터 가봐야겠는데.’

이에 나는 곧장 목적지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강혁 씨, 계획을 바꾸죠. 흑암을 만나야겠어요.”

* * *

화원을 나선 나는 곧바로 한유진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유진 씨, 혹시 지금 이유찬 씨를 화원으로 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왜요?”

“지금 급하게 블랙 메이지 건물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무려 블랙 드래곤씩이나 되는 존재를 깨깨오 택시 취급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지만, 블랙 메이지의 본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면 한 시간도 넘는 거리에 있다. 게다가 퇴근 시간도 제법 가까워진 터라, 어쩌면 두 시간 이상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처럼 한시가 급할 때,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찬 씨나 한유진 씨 역시 사정을 알고 나면 충분히 이해해줄 테고.

“아, 네. 바로 보내드릴게요.”

조금 무례한 부탁일 수 있었지만, 한유진 씨는 흔쾌히 나의 요구를 받아들여 주었다.

“야, 이유찬! 너 화원에 좀 가봐!”

이어서 수화기 너머로 한유진 씨의 괄괄한 목소리가 울리고,

- 우웅······.

화원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일렁이며 그 안에서 이유찬 씨가 걸어 나왔다.

토생원이 곁에 있으니, 바로 화원으로 통하는 토끼굴을 파준 거겠지.

“감사합니다. 일단 블랙 메이지에서 일 보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때까지 용왕에서 대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한유진 씨는 이번에도 이유조차 묻지 않고 곧장 대답을 했다.

통화를 마친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나와 고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유찬 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무서운 손주분이 서 계셨다.

‘음, 이분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셨네.’

그런데, 대체 왜 온 걸까.

싫은 건 아니지만, 심히 이유가 궁금하다.

“오오, 검은콩! 작은 살쾡이, 와주었구나!”

“하하, 고미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가야죠. 사실 조금 지루하기도 했고요.”

어째 너무 빨리 오셨다 했더니, 농땡이가 피우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저도 지루해서 왔습니다.”

으음, 이유찬 씨야 그렇다 치고······. 우리 천마님께서는 확실히 빈말은 못하는 캐릭터구나.

그래도 저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나.

“수다르님과 토생원이 뭔가 연금술이나 의술에 대해 계속 얘기를 나누시는데, 저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제르보나는 좀 알아듣는 것 같던데.”

이어서 이유찬 씨는 마치 교수님들 사이에 껴있던 학부생이나 대학원생 같은 표정으로 살짝 불만 어린 말을 내뱉었다.

‘제르보나 씨는 마법사, 이유찬 씨는 전사라고 했지······. 드래곤이라고는 해도 전공이 달라서 그런 건가?’

용족은 모두 마법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초월자 수준에 도달한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는 건 드래곤이라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무신이야 이런 쪽은 문외한일 테니, 당연히 끼어있는 것만으로 고문이었겠지.

‘조금은 납득이 가는 이유군.’

그렇게 무서운 손주분이 왜 자리를 떴는지 조금은 공감하고 있을 때,

“사숙조, 설마 저만 빼놓고 큰 싸움이라도 하고 오셨습니까?”

싸움이라면 아주 환장을 하는 우리 질풍노도 손주분께서 조금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어, 어떻게 알았어?”

“이 노사의 진기가 조금이지만 흐트러져 있군요. 게다가 검도 부러지셨고. 웅 노사가 함께 있는데 검이 부러지고 내상을 입을 정도면,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였겠지요.”

으으,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 묻어난다.

대체 왜 자기 없는 곳에서 싸움을 했다는 대목에서 이렇게까지 삐지는 거냐.

“후······.”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자, 무서운 손주분께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쥐었고,

- 콰드드득······.

허공에 새까만 균열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 백천!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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