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6 강해지고 싶은 이유.
- 쿠르르릉······.
머리 위로 몰려든 먹구름에서 뇌성이 울리는 순간, 어떤 본능적인 감정 하나가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모든 인간이 가진 가장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감정.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순간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커먼 먹구름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전광(電光)이 나를 향해 날아들려는 찰나,
“수하!”
눈부신 금빛을 내뿜는 아기곰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검은 전광을 향해 달려들었고,
- 콰르르릉!
“이야압!”
검은 전광과 금빛 섬광이 맞부딪히며 텅 빈 하늘 위에 수백 갈래의 가느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네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아기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오고, 느려졌던 시간이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 콰르릉!
검은 전광을 부숴버린 아기곰은 그대로 금빛 섬광을 응집시켜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고 있는 가짜의 등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고미의 기로 만들어진 금색 투창은 검은색 번개를 뱉어낸 구름에 의해 그대로 막혀버리고 말았다.
- 쿠르르릉!
금색 투창에 꿰뚫린 먹구름은 굉음과 함께 흩어져 사라졌으나, 가짜 고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으아아아아! 이 비겁한 놈!”
가짜 고미를 집어삼킨 균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원조 아기곰은 보송보송한 초콜릿색 솜털을 고슴도치처럼 곤두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이 비겁한 가짜 놈! 감히 이 몸의 가족과 친구들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네 놈이 어느 곳으로 달아나든 반드시 따라가 혼쭐을 내줄 것이다!”
“고미,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그리고 살려줘서 고마워.”
나는 노발대발하며 허공에 대고 솜방망이를 휘두르는 아기곰에게 다가가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하, 하지만 봉식이와 허수아비가······.”
그러나 고미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커다란 두 눈을 굴려댔다.
아마도 자신 때문에 친구들이 다쳤다고 자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두 사람도 무사해. 생각보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
“미, 미안하다. 위, 위대한 이 몸이 조금만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걱정하지 마, 누구도 네 잘못이라고 생각 안해. 우리끼리 저 녀석을 물리치지 못해서 미안해.”
나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오히려 고미에게 제대로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 이었다.
‘강해지고 싶어.’
적들은 자꾸만 강해지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는 생각에 절로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초월자나 가짜 고미 정도는 혼자서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다.
그래서 고미처럼 친구들을 지켜주고 싶다.
더이상 고미에게 보호받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의 등 뒤를 지켜줄 만큼 강해지고 싶다.
그때, 웅톡방을 통해 이강혁 씨와 봉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곰 선생님, 저희는 무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 고미, 괜찮아. 모기에 물린 정도 밖에 안돼. ]
그러나 완전히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일렀다.
‘이주혁 씨랑 신 팀장님은······.’
생각해보니, 두 사람의 실력으로는 이 싸움의 여파만으로도 중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문자 그대로 천재지변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었으니까.
“고미! 이주혁 씨랑 신 팀장님은?”
두 사람의 안위를 묻자, 고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통통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이 저 비겁한 가짜 놈을 혼내주러 오기 전에 조치를 취해두었느니라.”
나는 그제야 녀석의 목에 언제나 둘러져 있던 꿀 스카프가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 ???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습니다. >>
<< 던전이 붕괴됩니다. >>
<< 던전 붕괴까지 남은 시간 5분 32초 >>
<< 5 분 30 초 >>
그렇게 죽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이 던전이 사라진다는 메시지가 시스템 창에 떠올랐다.
“휴······. 잘했어, 얼른 두 사람 챙겨서 밖으로 나가자.”
이에 나는 고미와 함께 봉식이와 이강혁 씨를 챙긴 뒤 신 팀장님과 이주혁 씨를 데리고 던전을 벗어났다.
* * *
밖으로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쇄형 던전 특유의 붉은 빛이 빠르게 사라지며 던전이 완전히 소멸되었음을 알렸다.
“뭐, 뭐야! 어, 어떻게 된 거야!”
던전을 관리하던 패왕의 길드원은 사색이 되어 우리를 노려봤으나, 차마 계약 위반이니 어쩌니 하며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개방형 던전이 갑자기 폐쇄형 던전으로 바뀌었다는 건 안에서 무언가 큰 사고가 벌어졌다는 의미니까.
그리고 그 ‘사고’는 던전에 입장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계약 위반을 논하기는 어렵지.
“죄송합니다. 일이 그렇게 됐네요. 문경준 씨에게는 제가 직접 연락을 드리죠.”
나의 해명 아닌 해명에, 던전 관리자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타 길드의 던전에서 일어난 사고인만큼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하는 게 예의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이상 정중하게 말을 할 정신이 없었다.
봉식이와 이강혁 씨는 부상을 입었고, 가짜 고미의 실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달아날 때 나타났던 검은 번개의 위력은······.
‘가짜 고미의 공격보다 더 강했어.’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번개의 주인은 틀림없이 가짜 고미보다 강했다.
‘휴, 가짜 고미를 놓친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럼 얼른 돌아가자.”
말을 마친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패왕의 길드원을 뒤로 한 채 가게의 뒷마당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 * *
뒷마당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토생원의 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는 수다르 님과 토생원이 있으니까, 이강혁 씨와 봉식이의 부상 정도는 금방 치료할 수 있겠지.
하지만 화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 우웅? 수하, 뭔가가 이상하다! 친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화원에는 야채 가게 식구들도, 삼룡이 패밀리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어디 가셨나?’
흑암은 블랙 메이지에 찾아가기로 했으니 그렇다 쳐도, 토생원과 수다르님, 무신까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야채 가게 식구들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언제나 화원에 있다.
오늘처럼 아무도 남지 않고 화원을 비우는 일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수하, 안되겠다. 이 몸이 친구들을 소환하겠다.”
파리해진 이강혁 씨의 안색을 본 다정한 아기곰은 불안한 표정으로 꼬리를 움찔거리며 곧바로 얼마 전 생긴 스킬을 사용해 수다르님과 토생원을 소환하려 했으나,
“괜찮습니다. 부상이 심각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제가 가진 포션으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볼 일이 있어서 나가신 것 같으니 조금 기다려 보시죠.”
이강혁 씨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들었다.
“나도 괜찮아.”
이어서 봉식이도 고미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봉식이의 안색은 이강혁 씨보다는 훨씬 멀쩡해 보였다.
녀석의 스킬 중 하나인 ‘야수의 심장’은 전투에서 벗어나면 빠르게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스킬이니, 이미 어느 정도는 상처가 치료된 모양이었다.
“멍, 멍멍!”
“멍!”
이강혁 씨가 자리에 앉아 포션을 들이켜는 사이,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사랑이들과 작은 삼돌이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응?”
그런데, 녀석들의 모습이 뭔가 달라져 있었다.
‘뭐지?’
작은 삼돌이의 덩치는 불과 하루 사이에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작은 삼돌이 뿐이 아니었다.
녀석만큼은 아니지만, 사랑이들도 불과 하루 사이에 눈에 띄게 자라 있었다.
‘뭐지? 왜 갑자기 커진 거지?’
그리고 우리를 향해 달려온 작은 삼돌이의 입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명패같은 것이 물려 있었다.
<<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곧 돌아올 예정이오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삼돌이와 사랑이들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
······.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시스템이지.
“멍! 멍멍!”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삼돌이의 머리 중 하나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서 필요한 걸 말해줘!’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마치 자신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럼 이강혁 씨가 좀 다쳐서 그런데, 회복 포션을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이에 나는 이강혁 씨의 상태를 살핀 뒤 삼돌이에게 포션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는 있지만, 포션을 마셨음에도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자 삼돌이의 머리 중 대장격인 늑돌이가 사랑이들을 바라보며 뭔가 지시를 내렸고,
“멍!”
“왈왈!”
“멍멍!”
이내 네 마리의 늑대들이 빠르게 창고로 달려가 단약과 포션을 물고 돌아왔다.
“멍!”
이어서 사랑이들의 대장격인 흑랑이 앞발로 단약 하나와 포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먹으라고?”
“멍!”
흑랑이의 대답을 들은 이강혁 씨는 피식 웃으며 의심없이 포션과 단약을 복용했고,
“으음······. 이번에는 선지 맛이 나는군요.”
그 단약이 산신령님이 직접 만든 것이라는 증거와도 같은 시식평(?)을 내놓았다.
산신령님의 단약과 토생원의 포션을 복용하자, 창백하게 변해있던 이강혁 씨의 얼굴에 빠르게 혈색이 돌아왔다.
“역시 효과는 좋네요.”
이강혁 씨의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을 확인한 고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글동글한 솜방망이를 들어 사랑이들을 쓰다듬어 주었고,
“오오, 참으로 훌륭하구나. 어찌 허수아비에게 딱 맞는 약을 골라왔느냐? 네 녀석들도 수다르와 토생원에게 의술을 배운 것이냐?”
“멍! 멍멍!”
“오오, 그래그래, 참으로 고맙다! 너희들 덕분에 허수아비가 기운을 차린 것 같구나.”
고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사랑이들은 연신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음······. 대단하군.’
대체 무슨 훈련을 하면 진단과 처방이 가능한 강아지, 아니, 늑대들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초월자의 연금술로 만든 생명체라고는 해도,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속으로 사랑이들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이강혁 씨가 살짝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흠······. 역시 의료팀은 저희가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나 역시 이강혁 씨와 같은 생각이었다.
사랑이들에게 이런 훈련을 시킨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응급환자들은 토생원과 수다르님이 직접 치료하고,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은 부상이나 중독, 저주 같은 것은 미리 약을 만들어 두었다가 사랑이들에게 처방받은 약과 포션으로 해결한다.
이렇게 하면 비교적 적은 인원으로도 상당히 효율적인 대응이 가능했다.
“설마 저 창고, 전부 포션이나 단약을 저장해 두려고 만든 거야?”
나의 질문에, 삼돌이는 세 개의 머리를 동시에 끄덕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랬구나······.’
그냥 숲속 친구들의 대장인 고미의 취향에 맞춰 노천 키즈카페를 만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의미가 있는 배치였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수다르님과 토생원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착실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비하고 계셨구나.
화원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약초들과 그 약초들로 만든 포션과 단약을 저장하기 위해 세워진 십여 개의 창고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래, 이렇게 좋은 동료들이 있잖아.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야채 가게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 축하합니다. 퀘스트가 완료 되었습니다. >
< 웅비어천가(2) (완료) >
또 다른 숲속 친구가, 훌륭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뭐야, 벌써?’
가장 많은 괴롭힘을 당한 노인국 씨가 흑암을 용서하고, 사도까지 되었으니 곧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일을 마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정말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에 떠오른 메시지였다.
< 축하합니다. 특별 던전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
< 목표치 초과 달성으로 인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
< 가짜 고미와 맞서는 동안 사용한 스킬의 등급이 향상됩니다. >
< 히든 퀘스트로만 익힐 수 있는 특별 스킬이 지급됩니다. >
< 새로운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
그리고 스킬 선택창을 보는 순간······.
‘어, 잠깐······. 이걸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도 쓸 수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