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5 가짜고미 vs 원조 아기곰.
“덤벼라! 위대한 이 몸이 네 녀석에게 진정한 곰의 힘을 보여주겠다!”
아기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초콜릿색 솜뭉치가 번개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흥! 쥐방울만한 녀석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것이냐! 위대한 이 몸이 진정한 곰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가짜 고미는, 참으로 뻔뻔하게도 원조 아기곰을 향해 자신이 ‘진정한 곰’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감히 예상컨대, 저 흑곰은 분명 ‘그 나라’에서 왔을 거다.
“네 이놈!”
“네 이놈!”
빌딩처럼 거대한 덩치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흑곰과, 반대로 내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동글동글 초콜릿색 아기곰이 서로를 노려보며 빽빽소리를 질러대는 사이,
- 탓!
나는 재빨리 허곰답보를 활성화해 봉식이와 이강혁 씨를 안고 최대한 먼 곳으로 달아났다.
이대로 놔뒀다가 저 둘의 싸움에 휘말리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테니까.
“이 비실이 녀석! 감히 이 몸을 기습한 비겁한 녀석들을 데리고 달아나는 것이냐!?”
“네 이놈! 덩치만 큰 비실이 녀석이 감히 이 몸의 수하이자 제자이자 가족인 수하를 모욕하는 것이냐!?”
수하이자, 제자이자, 가족인 수하라는 말에, 거대한 흑곰의 귀가 쫑긋 일어서고, 꼬리가 움찔거리며 가볍게 까딱였다.
“뭐, 뭣이!?”
······.
아기곰 관찰일지 3-2. 귀가 쫑긋, 꼬리가 움찔, 눈이 커지고 잠시 말을 멈추는 것은······. ‘놀람’과 ‘감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와중에, ‘수하의 이름이 수하’라는 점에 감탄하고 있다는 소리지.
‘하아······. 또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냐.’
흑암 때도 초월자와 대균열의 수호자의 싸움답지 않게 유치한 말싸움을 해대더니······.
고미와 가짜 고미가 맞붙으니 대화가 아주 우주로 가버리는군.
이 정도면 고미와 말싸움을 벌여 그 정도 유치함에서 끝난 흑암의 건투(?)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 같다.
“수, 수하인 수하라니······.”
내 관찰일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가짜 고미는 날카로운 두 눈을 치켜뜬 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감탄하지 마······. 진심으로 놀란 표정 같은 거 짓지 말라고.
“흥! 그렇다!”
“······.”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가기 앞서서 벌어진 기 싸움(?)에서 승리한 덕일까. 원조 아기곰의 입가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
“어떠냐? 너에게도 이런 멋진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느냐?”
······.
음, 여태 내 이름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건 몰랐네.’
아기곰의 정신 세계에서는 ‘수하인 수하’라는 게 엄청나게 멋진 이름인가 보다.
이름과 캐릭터, 그리고 맡은 역할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느낌이라 그런 건가?
뭐, 그렇게 보면 일관성은 있네.
“흥! 네놈은 친구가 없는 것이구나! 그렇지?! 있다 해도 이런 멋진 이름을 가진 친구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황당한 건, 이 원조 아기곰의 말도 안 되는 공격(?)이 가짜 고미에게 제법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네, 네 이놈!”
음, 말문이 막히니 꼬리를 바짝 세우며 ‘네 이놈!’을 외치는 것까지······.
이거야 원, 덩치만 컸지 정신 연령이나 행동 방식은 원조 아기곰이랑 똑같구만.
“에, 에이잇! 시끄럽다! 탄지곰!”
결국 말싸움에서 패배한 가짜 고미는 분을 참지 못하고 거대한 손가락을 내밀어 선공을 감행했고,
- 콰광!
굉음이 울리며 녀석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크하하하! 역시 조곰한 크기만큼이나 형편없는 실력이구나! 웅졸한 녀석! 위대한 이 몸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것조차 두려운 것이냐!?”
원조 아기곰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하자, 가짜 고미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나한테 썼던 탄지곰은 전력이 아니었어.’
마치 싱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무너져 내린 지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조 아기곰은 대체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조금 더 극적인 연출로 관심을 끌기 위해서인지, 불필요한 파괴를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가 가짜 고미를 상대로 한두 번 정도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 근거도 이것이었다.
그리고 약간만 시간을 벌면, 반드시 원조 아기곰이 정신을 차릴 거라고 믿었다.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들이 위험에 처한 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으니까.
‘이제 고미가 정신을 차렸으니, 괜찮겠지?’
무엇 때문에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고미의 두 눈은 전에 없이 강렬한 전의로 불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다시 아까같은 상태에 빠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원래도 그 힘의 끝을 알 수 없는 슈퍼 아기곰이, 가짜 따위에게 패배할리도 없을 테고.
‘그래도 도울 수 있을 때까지는 같이 싸워보자.’
하지만 기왕 해피곰 포인트를 왕창 쏟아부어 파워 업을 했으니, 나도 원조 아기곰과 함께 저 가짜 고미에게 맞서고 싶었다.
물론 내 힘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될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저 녀석과 싸워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다면, 앞으로 있을 큰 싸움에서 고미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거야.’
이에 나는 이강혁 씨와 봉식이를 적당한 곳에 눕혀놓은 뒤 가짜 고미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흥! 이 비겁한 모리배 놈! 또다시 이 몸에게 기습을 가하려는 것이냐!”
바로 그때, 내가 자신의 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가짜 고미가 하늘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
‘자, 잠깐.’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쭉 뻗은 오른팔과 펼쳐진 손바닥······.
내 기억이 맞다면 저건······.
“불도장!”
“수, 수하!”
- 화르르륵!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젤리 형상의 화염 덩어리에,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 안돼!’
하지만 SS급에 달한 허곰답보로도 원조 아기곰의 그것보다도 더 거대한 불도장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 쾅!
끔찍한 열기를 머금은 붉은 화염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 해피곰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드래곤 스케일의 스킬 등급이 상승합니다. F -> SS / 잔여포인트 2852 >
< 불꽃 망토(S)가 활성화됩니다. >
나는 반사적으로 오래전에 얻은 스킬의 등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왼손에 든 영지버섯으로 머리를 가렸다.
- 콰광!
“크으윽······.”
삼색 영지버섯으로 직격을 막고, SS급의 드래곤 스케일에 S급의 화염 저항 스킬까지 활성화했건만, 여전히 살갗이 녹아버릴 것 같은 같은 열기.
‘아, 안 되겠어.’
- 탓!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박차고 내달리자,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뒤바뀌며 온몸을 불태워버릴 것 같던 열기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휴, 살았네······.’
설마 동해에 놀러 갔을 때 이유찬 씨에게 감자전을 나눠주고 받은 스킬이 이런 순간에 목숨을 구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도 불도장이 떨어질 거라는 걸 미리 읽고 화염을 막을만한 스킬을 전부 최대치로 활용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꼼짝없이 통구이가 됐을 거다.
“우, 우웅!?”
“우, 우웅?!”
무사히 불도장의 범위를 벗어난 내 모습에, 원조 아기곰과 거대한 흑곰은 약속이라도 한 듯 꼬리를 바짝 세운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놀라지 말라고.’
뭐,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에서 살아 남은 게 놀랍기는 하지만 말이야.
“네 이놈!”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원조 아기곰이 분노로 온몸을 바르르 떨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감히 수하에게!”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청각이 마비되며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윽!”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기운이 실린 사자, 아니, 웅자후(熊子吼)에 나는 그대로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고,
- 콰르르릉!
뇌성과 함께 번개처럼 솟구쳐 오른 갈색 솜뭉치가 거대한 흑곰의 정수리를 향해 일장(一掌)을 내리꽂는 장면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녀석의 몸 주위에는 엄청난 기(氣)의 소용돌이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무신과의 대결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실로 압도적인 기운.
‘그, 그때도 전력이 아니었단 말이야?’
하지만 더욱 놀라운 장면은 다음에 펼쳐졌으니······.
- 콰광!
‘마, 막았어?’
가짜 고미가, 원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것 중 가장 강한 힘이 담긴 일격을.
“이, 이놈! 쥐방울만한 주제에 힘이 제법이구나!”
물론 ‘완벽히’ 막아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고미의 공격을 받는 순간, 거대한 기둥같은 두 다리가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원조 아기곰의 공격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진, 대력곰강장!”
하늘 높이 치켜든 솜방망이가 수직으로 떨어지자,
- 쩡!
“컥!”
거대한 흑곰이 완전히 무릎을 꿇으며 던전의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고, 깨지고, 뒤집혔다.
“용서할 수 없다!”
이어서 고미의 동글동글한 주먹 위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조 아기곰의 주먹이 떨어지려는 찰나, 가짜 고미의 몸에서도 시커먼 빛이 폭발하며 녀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쾅!
두 고미의 주먹이 충돌하며 일어난 엄청난 폭풍에, 나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가짜 고미의 힘은 나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고,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천재지변을 방불케 했다.
‘설마 지금까지 힘 조절을 했던 이유가······.’
나는 그제야 고미가 왜 늘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이 녀석이 진짜로 힘을 쓰기 시작하면, 싸움의 승패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지금 고미는 가짜 고미가 자신의 친구들, 특히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네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해주마!”
하늘 높이 날아오른 아기곰이 손을 휘두르자,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눈부신 금광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진, 만천화웅!”
이어서 수만 개에 달하는 금빛 칼날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가짜 고미를 공격했다.
“크, 크아아악!”
이에 가짜 고미 역시 자신의 검은 기를 발산해 원조 아기곰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수만 개의 칼날이 녀석의 기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아, 안돼! 위, 위대한 이 몸이, 어, 어떻게 이런 쥐방울만한 놈에게!”
발악하듯 고함을 내지르는 녀석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경악과 공포가 진하게 묻어났다.
‘마, 말도 안돼.’
분노한 아기곰이 내뿜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이놈!”
- 쾅!
돌연 가짜 고미의 몸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체가 사방으로 터져나갔고,
‘응?’
동시에 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금빛 폭풍이 흔들리며 작은 틈이 생겨났다.
“네, 네 이놈!”
그리고는 그 틈 사이로 이전보다 절반 가까이 줄어든 흑곰이 황급히 빠져나오는 모습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두, 두고 보자!”
간신히 만천화웅에서 벗어난 거대한 흑곰은 원조 아기곰을 노려보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대사를 내뱉었다.
‘잠깐······. 그 대사······.’
설마 도망가려는 거냐?
너, 가짜라도 고미 아니었어?
“이 비겁한 놈! 어딜 도망가려는 것이냐! 네 녀석도 진정한 곰이라면 당당히 맞서란 말이다!”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나려는 듯한 가짜 고미의 모습에 더욱 분노한 아기곰은 그대로 몸을 날려 녀석을 뒤쫓았다.
- 쿠웅······.
그때, 하늘 위에 열려있던 거대한 균열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리며 새카만 먹구름 같은 것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수, 수하! 피해라!”
그 먹구름이 등장하는 순간, 비겁한 가짜의 뒤를 쫓던 고미가 사색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