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19화 (219/300)

EP.219 김태평 사장님의 날카로운 안목

내가 준비한 ‘선물’은 바로 히드라의 독주머니와 이전에 흑암이 노인국 씨에게 찾아오라던 아이템 큐브였다.

처음에는 그냥 폐기하거나 내가 쓸까 했지만, 역시 흑암에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쓰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이었다.

단, 이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저 작은 흑마법사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New인국 씨처럼 새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게 조건이었다.

‘그게 아니면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녀석 손에 무기까지 쥐여주는 꼴이니까.’

하지만 이제 이 두 가지 아이템을 돌려주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밍도 좋았다. 지금 이걸 돌려준다면, 흑암도 내가 자신에게 뭘 기대하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리겠지.

‘흑암도 머리가 좋은 캐릭터니까, 내가 왜 여태 이걸 가지고 있었는지, 왜 하필 지금 돌려주는지, 충분히 이해하겠지.’

숲속 친구들이 큰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건, 흑암 역시 알고 있다.

그걸 위해 웅왕 소속의 각 길드를 돌아다니며 헌터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흑암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블랙 메이지의 전력을 수직으로 상승시켜줄 수 있는 인물이고.

우리 중에서 흑마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흑암이고, 동시에 블랙 메이지의 후원자이기도 하니까.

“저기, 흑암님······.”

내가 막 선물을 내밀려는 찰나, 흑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미, 내가 너를 돕기 위해 무얼 해주면 되겠느냐?”

지, 진짜냐? 나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저 그림들을 보고 느꼈다. 네 녀석도 나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외롭고 슬펐다는 것을. 하지만 너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홀로 열심히 싸워왔지. 그것도 얼굴 한번 보지 않은 타인을 위해서 말이다.”

놀랍게도, 흑암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저 예술의 심연 가장 밑바닥에 존재할 것 같은 웅티스트 선생님의 초기작이었다.

“게다가 너는 네가 그토록 오래 지켜오던 것을 파괴하려던 나를 용서해 주었지. 이제 내가 은혜를 갚을 차례다.”

흑암의 작은 눈동자에는 지금껏 본 것 없는 결연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에서 처음에는 악의 편에 서 있던 악당이 정의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 같은 눈빛.

“오, 오오! 흑암! 드디어 이 몸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냐!”

흑암이 자신의 걸작을 알아봐 주었다는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인간을 멸망시키려던 저 츤데레 두더지가 진정한 정의의 용사로 거듭났기 때문일까. 고미의 꼬리는 끊임없이 옆으로 누운 8자를 그렸다.

평소에도 짤막한 꼬리를 흔들 때마다 그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함께 춤을 추곤 했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광란의 엉덩이 춤이군, 굉장해.’

어쩌면 흑암이 정의의 용사가 된 계기가 자신의 작품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쁨이 배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고미의 꼬리콥터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흐, 흥, 너무 좋아하지 마라! 만수왕과 황금의 군주를 꺾기 전까지는 결코 안심할 수 없으니까.”

흑암은 못마땅한 척 입술을 비죽 내밀며 또다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녀석의 입가에는 여태 본 적 없는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으음······. 타이밍 놓쳤네.’

뭔가 내가 아이템 큐브와 히드라의 독주머니를 건네주면 흑암이 ‘이런 나를 믿어주는 것이냐······.’ 같은 대사를 내뱉고, 감동적인 합류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다기에는 일이 너무 잘 풀렸고, 아쉽지 않다기에는 활약을 못했다는 느낌.

‘에이, 모르겠다. 언제부터 멋있는 장면이 나한테 할당됐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니 딱히 멋있는 장면을 차지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 결과가 좋으면 된 거지. 중요한 건 내가 활약하는 게 아니라, 고미의 행복과 세계 평화를 지키는 거니까.

“흠흠, 흑암님!”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번 흑암을 부르자, 딴사람처럼 맑아진 콩알만한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뭐, 뭐야. 갑자기 눈이 왜 이렇게 맑아졌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흑암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왠지 모르게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갑자기 이렇게 반짝거려도 되는 거냐!

눈이 무슨 먼지 쌓인 유리창도 아니고, 먼지 한번 걷어냈다고 이렇게까지 맑아져도 되는 거냐고!

“왜 그러지?”

“이거요. 흑암님에게 돌려드리려고요.”

내 손에 들린 히드라의 독주머니와 아이템 큐브를 확인하는 순간, 흑암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흑암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에 들린 큐브와 독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노인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내가 블랙 메이지를 찾아가도 되겠나?”

뒤에 이어질 말은, 굳이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블랙 메이지의 헌터들이 날 용서해 준다면, 그들과 함께 싸우고 싶다든가, 뭐 그런 멘트겠지.

“그럼, 다들 자네를 보고 싶어한다고.”

“인간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르군.”

흑암이 혼잣말을 하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자네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물러. 그래서 좋네.”

New인국 씨는 환히 웃으며 애써 시선을 피하는 흑암을 바라봤다.

그 순간, 꿀태창이 반짝거리며 퀘스트 달성 조건 중 일부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왔다.

이어서 노인국 씨가 놀란 듯 두 눈을 치켜뜬 채 흑암을 바라봤다.

“흑암, 자네······.”

“그간 괴롭혀 온 보상이라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니까.”

대화의 흐름으로 보나, 상태창의 반응으로 보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 오오! 흑암! 문어 할아범을 너의 사도로 만들어 준 것이냐! 갑자기 할아범의 마력이 더욱 강해졌구나!”

그리고, 고미의 반응은 나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역시, 내가 뭘 원하는지 눈치챈 것 같네.’

이걸로 블랙 메이지는 굳이 고미와 내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겠군.

뜬금없지만, 행복하다.

드디어 내 인생에도 워라밸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태양의 빛이 내리쬐는 건가.

“그럼 오늘은 케르베로스에게 이 독주머니를 달아주어야겠군.”

흑암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New인국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도 되겠나?’라고 묻는 듯한 몸짓.

“허허, 좋네. 그럼 내일 내가 다시 찾아오지.”

흑암의 제스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낸 New인국 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우리 와이프가 내가 늦게 들어오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아참, 그 불판이랑 가스레인지는 이곳에 두도록 하지. 자네들 고기 구워 먹고 싶을 때 쓰라고.”

이후 노인국 씨는 불판과 가스레인지를 선물로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고, 야채가게 식구들 – 흑암, 토생원, 수다르, 사랑이들과 케르베로스 – 과 삼룡이 패밀리는 옹기종기 모여 대웅전을 어떻게 개조할지 회의에 들어갔다.

이제 대웅전은 야채 가게 식구들의 집이자, 숲속 친구들이 함께 이용하는 이동식 호텔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에 방을 만들고······.”

“여기에 주방을 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일단 유찬 씨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컹!”

“컹컹!”

잠시 그 회의를 지켜보던 고미와 나는 가게에서 기다릴 부모님과 아웅이, 다웅이를 위해 호두과자를 손에 들고 화원을 나섰다.

* * *

게이트 밖으로 나온 고미와 나는 곧바로 뒷문을 통해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뒤에는 예상 밖의 인물이 하나 서 있었으니······.

‘왜, 왜 따라온 거야.’

바로 천마, 위백천이었다.

「사숙조의 부모님이자, 웅 노사님의 부모님이라면, 마땅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지요.」

「오오! 작은 살쾡이! 역시 너는 예의를 아는 녀석이구나! 살쾡이가 너를 아주 잘 가르친 모양이다!」

그 짤막한 대화로, 나는 무려 천마를 달고 무협지 마니아인 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아들! 퇴근했어?”

뒷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응?”

천마를 발견한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아주 잠깐 놀랐다가,

“우리 아들들한테 또 새 친구가 생겼나 보네. 안녕하세요, 수하 엄마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네셨다.

수다르 님과 토생원, 고미를 봤을 때도 잠깐 놀라고 말았다지만······.

갑자기 무협지풍의 도복을 입은 장발의 사내가 나타났는데,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적응력이 뛰어나신 걸까.

“위백천이라고 합니다. 웅 노사님과 사숙조를 도와 잠시 웅왕의 문객으로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천마가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아버지가 주방으로 들어오셨다.

“응?”

“위백천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천마가 어머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로 자신을 소개하며 포권을 하자,

“설마······.”

아버지는 두 눈을 치켜뜨며 나와 천마, 그리고 고미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이어서 아버지의 입에서, 실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처, 천마!?”

······.

대체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호오······.”

한눈에 자신의 정체를 간파한 무협지 마니아의 날카로운 안목에, 무서운 손주분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아빠, 어떻게 알았어?”

“정말 천마야!?”

나의 질문에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포권을 취하며 눈을 반짝였다.

“고미와 수하의 아버지인 김태평이라고 하오. 이렇게 직접 천마 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

부끄럽다.

아버지의 기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부끄럽다.

“아웅!”

“다웅!”

바로 그때, 아웅이와 다웅이가 주방으로 달려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천마의 힘을 느끼고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것 같은 반응.

“흠, 과연 웅 노사의 양친께서 운영하는 객잔답게 예사롭지 않은 고수들이 지키고 있군요. 한데, 이분들은 누구입니까? 이분들도 웅 노사의 문하입니까? 기운이 웅 노사와 아주 비슷한데······.”

한눈에 아웅이와 다웅이의 실력을 간파한 천마의 질문에, 고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녀석들은 이 몸의 동생들이다. 하얀 녀석이 아웅이, 저 점박이가 바로 다웅이니라!”

동생이라······. 전에는 분명히 분신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설마 도원결의로 인해서 피, 아니, 꿀로 맺은 의형제가 된 건 아니지?

“흐음······. 그래서 이렇게 웅 노사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었군요.”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다웅이를 뚫어져라 바라봤고, 다웅이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천마를 마주봤다.

‘설마,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는 건가?’

생각해보면, 꽤 말이 되는 라이벌 구도였다.

천마는 무협지의 전통적인 강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웅이는?

무협의 뉴웨이브, 전통적인 무협의 클리셰를 비틀고 부숴버린 걸작의 주인공과 상당히 흡사한 외모와 캐릭터를 가진 녀석이다.

물론, 뚱보 판다보다는 아기판다인 다웅이 쪽이 훨씬 더 귀엽지.

귀여움만으로 따지자면 다웅이의 압승이다.

여하튼, 이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라이벌 구도였다.

신구의 대결은 비단 무협지가 아니라도 모든 장르에서 폭넓게 활용되는 클리셰니까.

“다웅이! 그 눈빛은 무엇이냐! 작은 살쾡이는 우리를 돕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무협지 마니아 판다의 눈빛을 읽은 곰돌이 삼형제의 큰형이 자신을 나무라자, 다웅이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이내 천마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천마 역시 눈을 번득이며 다웅이를 향해 포권으로 답했다.

‘불안하다, 불안해.’

눈은 왜 번득이는데, 설마 ‘이런 강자가 또 있을 줄이야, 꼭 한 번 붙어보고 싶군’ 같은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라.

“후훗, 좋다. 훌륭하구나, 다웅이. 이 몸의 동생이라면 마땅히 신의와 예의를 알아야 하느니라. 너도 점점 더 진정한 곰다운 품격을 갖추어가고 있구나.”

한편, 언제나처럼 미묘한 분위기 따위는 읽어낼 마음도, 능력도 없는 순진무구한 아기곰께서는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이 몸이 너희와 엄마 아빠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하사하겠다.”

말을 마친 고미는 곧장 내 손에 들려있던 호두과자 세트를 낚아채 한껏 오만한 표정으로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 안에 온 세상이 다 들어있을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몸짓이었다.

“아웅!?”

“다웅!?”

그러자, 아웅이와 다웅이는 그 안에 무언가 굉장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음, 역시 굉장한 후각이군.’

고미의 분신, 아니, 동생들이라 그런지, 열어보기도 전에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차리는구나.

그때, 머릿속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곰돌이 삼형제가 상자 안에 맛있는 게 들어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건, 뛰어난 후각 덕분이다.

그런데, 김태평 사장님은 어떻게 특별한 능력도 없이 저 무서운 손주분이 천마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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