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18화 (218/300)

EP.218 좋게 말하면 하청.

< 메인 퀘스트 : 불러봐요, 웅비어천가 (2) >

- 위대한 곰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칭송받기를 바라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곰의 넓은 아량과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세요.

퀘스트의 앞부분은 웅비어천가(1)와 거의 비슷하지만, 뒷부분은 미묘하게 내용이 다르다.

넓은 아량과 따뜻한 마음이라니······. 흑암을 용서하고 바른길로 이끌어 준 걸 말하는 건가?

‘이건 조금 마음에 드네.’

적어도 세 개의 길드를 돌아다니며 ‘우리 애가 이렇게 힘이 세요!’라고 앵무새처럼 외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의미가 있는 일이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건, 고미의 힘뿐만이 아니라 그 따뜻한 마음과 희생이니까.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흐뭇한 마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황당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달성 조건 >

- 블랙 메이지의 길드원들이 흑암과 화해할 것.

- 블랙 메이지의 길드원들이 자신들을 구해준 것이 위대한 곰임을 인지할 것 (완료)

- 흑암이 최소한 다섯 명의 헌터에게 가르침을 줄 것.

- 문어 할아범이 사도로 인정받을 것.

비고 : 본 퀘스트의 내용을 흑암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 달성 보상 >

- 능력치 강화 (+5)

- 스킬 강화 (+3)

비고 : 본 퀘스트는 총 세 개의 퀘스트가 연결된 연계 퀘스트로, 모든 퀘스트를 완료했을 시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게 뭐야······.

이제 나한테 시키는 걸로도 모자라서 퀘스트 하청까지 주는 거냐?

‘점점 더 악덕 기업 사장님 같은 행동을······.’

퀘스트 달성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건 흑암이지만, 보상은 내가 챙긴다. 심지어 흑암은 자신이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하란다.

‘아니야, 이 정도면 하청이라고 말하기도 뭐하지.’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찾아보자면, 퀘스트를 짬 때리는······.

‘황당하네······.’

본래 내 예상은, 저스티스에서 받은 웅비어천가(1)과 비슷한 내용의 퀘스트를 용왕과 블랙 메이지에 가서 반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리자는 블랙 메이지의 퀘스트를 사실상 흑암에게 떠넘겨 버렸고, 나는 그제야 왜 이런 타이밍에 퀘스트가 발생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흑암과 노인국 씨가 화해하고 나서야 퀘스트가 발생한 건가?’

저 새롭게 태어난 츤데레 두더지가 바깥세상에 나가 활동하려면, 그게 최소한의 조건일 테니까.

즉, 이건 애초부터 흑암에게 할당된 퀘스트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세 번째 퀘스트는 누구 몫이지? 수다르 님, 토생원? 아니면 동이님인가?’

가장 먼저 퀘스트 짬을 당한 사람(?)이 흑암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세 번째 퀘스트를 맡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역시 확신하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

< 스킬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5/5) >

< 내 눈에 곰깍지 (Gomi) 스킬이 발동합니다. >

내가 시간을 벌어준 틈을 타 5인의 결사대 중 하나인 제르보나 씨가 암호 해독을 완료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제르보나 씨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럼 이강혁 씨, 저 세 분은 이제 돌려 보내주세요. 일단 저주는 걸어놨으니, 이후의 조치는 모두 이강혁 씨에게 일임할게요.”

순진무구한 아기곰의 꿈과 희망을 지킬 수 있게 되었음을 확신한 나는 곧장 세 명의 배신자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더이상 저 사람들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고, 굳이 붙잡아 놓고 할 이야기도 없으니까.

괜히 눈에 보이는 곳에 두면 스트레스만 쌓인다.

“알겠습니다.”

나의 말을 들은 이강혁 씨는 곧장 세 사람을 데리고 화원을 나서려 했다.

“저도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이에 신중한 레드 드래곤은 또다시 위협적인 눈빛으로 이유찬 씨를 바라보며 따라오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었으나,

“아닙니다. 이미 저주에 걸렸으니, 저 혼자 다녀와도 될 것 같습니다. 유찬 씨와 제르보나 씨는 이곳에서 쉬고 계시죠.”

이강혁 씨는 굳이 두 사람이 나설 필요가 없다며 홀로 세 사람을 끌고 화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무서운 손주분께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들릴락말락하게 혀를 찼다.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세 사람을 베어버려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서늘한 살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사숙조, 어째서 배신자를 살려두시는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내 그의 입에서 참으로 천마다운 대사가 흘러나왔다.

‘이, 이 사람이!’

무협지에서는 사람 죽이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게다가 애가 보고 있잖아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우린 가급적이면 사람은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그리고 이 정도면 안전장치도 충분하잖아.”

나의 대답을 들은 천마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강혁 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어떤 금제도 시체보다 믿을만하지는 않습니다. 시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

워어, 말하는 거 보소.

누가 천마 아니랄까 봐 살벌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게다가 패왕의 첩자면, 사실상 자기 부하 아닌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저거 네 부하들 아니었어?”

나의 질문에 천마는 가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중 하나가 갑자기 A급이 됐던데, 네 도움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야?”

“아마 문경준 그 머저리가 제가 준 영약이나 비급을 이용해 첩자를 기른 모양입니다.”

“그게 그거지. 문경준은 네 부하잖아.”

“저는 푼돈에 문중을 팔아먹는 소인배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임무에 실패했는데 살려달라고 목숨이나 애걸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팔다리 하나 정도 잘라주면 금세 또 다른 쪽에 붙어먹을 놈들을 이용할만큼 아둔하지 않습니다.”

천마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진심이었다.

“그래도 안돼.”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었다.

고미는 앞으로도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정신에, 절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힘을 지닌 존재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살인이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

저 녀석은 배신자니까, 이 녀석은 이런 이유로, 또 다른 녀석은 저런 이유로 죽여도 되고 때려도 된다고 가르치기 시작하면······.

언젠가 고미는 사람들에게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 테니까.

“안돼, 이건 이쪽 세상의 규칙이야.”

“저라면 아무도 모르게 저 셋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지요.”

깔끔한 일처리를 좋아하는 손주분께서는 다시 한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고미의 교육과 관련된 일인만큼,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쫄리기는 하지만······. 아닌 건 아니니까.

“휴······. 알겠습니다. 저는 일개 문객일 뿐이니, 이런 일까지 나서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요. 하지만 저자들의 실력이 형편없기에 살려두는 것입니다. 사숙조나 노사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겠습니다.”

으으, 이 옹고집 같으니!

그 와중에 굳이 사숙조와 노사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표현한 건, 너희들 실력이 없어서 불안하다는 소리잖아!

천마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화원 안에는 잠시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자, 사회생활 만렙의 산신령, 수다르 님이 인자하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허허허, 유찬님, 혹 이 안에도 유진님의 집에 있는 것 같은 멋진 주방을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디로 여행을 가든 유찬 님이 만든 맛있는 요리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확실히 그렇네요. 요리 담당은 저 녀석이니까요.”

이어서 뭔가를 눈치챈 제르보나 씨가 맞장구를 치자,

“하하하!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어디로 여행을 가든 완벽한 요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눈치가 없는 흑룡 셰프도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오! 검은 콩! 역시 너는 이 몸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구나! 훌륭하다!”

먹을 것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눈치를 보며 무슨 말로 나와 무서운 손주분 사이를 중재할지 고민하고 있던 아기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솜방망이를 두드려댔다.

“으음······. 그럼 싱크대의 구조를 한번 살펴봐야겠군요.”

이어서 토생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대화의 흐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싱크대 구조를 왜 살펴봐?’

혹시 여기 있는 가구나 놀이기구가 모두······.

“설마 여기 있는 거 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나의 질문에 토생원은 자못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유찬님과 흑암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제법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

제르보나 씨가 왜 그렇게 이유찬 씨에게 잔소리를 해댔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아무리 연금술사와 토목왕이 있다고는 해도, 이거 제작하는데 시간이 분 단위로 걸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고작 며칠 사이에 이 정도 시설을 갖췄다는 건, 사실상 요즘 일 안하고 여기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의미일 테니까.

“설마 유찬씨, 목공도 하세요?”

“아뇨,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뭘 또 배워, 배우지 마, 더이상 취미를 늘리지 말라고.

“으음······.”

한편, 흑암과 노인국 씨는 어느새 홀린 듯 고미의 작품 세계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흑암은 그 괴랄한 벽화에 대단한 감동이라도 받은 듯 살짝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눈물이라니, 시, 실화냐.’

아무리 스킬 효과 때문에 저 안에 담긴 고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지만, 지금 저 낙서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림을 보고 감동받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막상 대웅전의 벽화를 정면으로 바라보자, 흑암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외로움, 쓸쓸함, 처절함, 두려움, 책임감······.

‘이 몸은 진정한 곰이다!’ , ‘이 몸은 위대하다!’라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외침을 반복하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을,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들.

홀로 수만의 몬스터와 대적하며 아기곰이 느꼈을 온갖 감정들이 화살처럼 마음을 파고 들었다.

“이건······. 굉장하군요. 처음에는 몰랐지만, 계속 보다보니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신교를 지키기 위해 홀로 무림맹의 고수들과 맞섰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심지어 우리가 고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아첨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던 무서운 손주분마저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오, 오오! 작은 살쾡이! 너도 이 작품을 알아봐 주는 것이냐!?”

줄곧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천마의 감상평에, 거장 아기곰 선생의 꼬리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허, 우리 고미 선생이 고생이 많았나 보네.”

이어서 노인국 씨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후훗, 괜찮다! 이제 이 몸에게는 너희가 있지 않느냐! 더 이상 예전처럼 홀로 괴수 군단에 맞서지 않아도 된다!”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흘리며 솜방망이를 불끈 쥐어보이는 아기곰의 모습에, 숲속 친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모두들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더 이상 고미가 이런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게 두어야겠다는 마음.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흑암에게 블랙 메이지를 맡길 수 있지?’

그 마음은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웅왕이라는 연맹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조직에서 각각 하나의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는 연계 퀘스트. 그리고 그 보상.

퀘스트의 난이도나 방식이 지금까지와는 다른만큼, 그 보상 역시 특별하겠지.

‘그리고 그 보상은 앞으로 있을 전쟁의 열쇠가 될 테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흑암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주면 눈치를 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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