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13화 (213/300)

EP.213 힐링 인 더 비엔나 버스.

<< 달리는 족욕 카페 >>

숲속 친구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 것은 바로 ‘족욕실’이었다.

열차 안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칸막이들이 세워져 있었고, 칸막이 안에는 무릎 담요와 방석이 놓여있었다.

[ 오, 오오오! 이, 이것은 무엇이냐! ]

음, 족욕이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흥분부터 하다니, 역시 새로운 걸 좋아하는 아기곰다운 반응이군.

“허허, 우리 고미 선생이 아직 족욕을 안해 본 모양이군. 이 족욕 칸에서는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바깥 풍경을 구경할 수 있네.”

열차 안에서 족욕이라니, 뭔가 낭만적이라 좋다.

“허허허, 어때, 마음에 드는가?”

[ 그렇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문어 할아범, 너는 어찌 이리 재미난 것을 많이 아는 것이냐! 참으로 훌륭하구나! ]

잔뜩 신이 난 초콜릿색 솜뭉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음, 확실히 경험이 중요하군.’

놀아본 경험이 워낙 없어서, 이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숲속 친구들이 모두 이강혁 씨나 나처럼 노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유진 씨도, 노인국 씨도, 이유찬 씨나 수다르 님도, 모두 분야는 다르지만 고미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나도 좀 더 열심히 놀아봐야겠어. 뭐라도 아는 게 있어야 재밌게 놀아주지.’

그렇게 앞으로는 최대한 열심히 놀아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계산을 마친 노인국 씨가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족욕실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하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고미 선생 족욕은 수하 씨한테 맡기지. 우리는 우리대로 즐기고 오겠네.”

조금 아쉽게도, 족욕실은 2인 1실로 구성되어 있어 열 명에 달하는 숲속 친구들이 한 자리에서 족욕을 즐길 수는 없었다.

이에 우리는 2인 1조로 갈라져 각각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유진 씨는 알틴과, 유찬 씨는 제르보나와 같은 칸막이로 들어갔고, 수다르 님과 토생원이 한 조, 그리고 마지막 조는······.

‘괜찮을까?’

천마와 노인국 씨였다.

아무리 새로워진 New인국 씨라지만, 저 무서운 손주분을 상대로도 인싸 기질을 발휘할 수 있을까.

“허허허, 우리 천마님은 나랑 같은 방에 들어가면 되겠구만.”

“그러지요, 노 노사.”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하지만 천마를 대하는 New인국 씨의 태도는, 우리를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허허, 나도 소싯적에 무협지 좀 읽어봤는데. 진짜 천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역시 천마는 눈빛부터 다르구만.”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까지······.

역시 괜히 New인국 씨가 아니군.

‘뭐······. 괜찮겠지.’

눈이 조금, 아니, 많이 무섭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짜증을 내긴 하지만,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니까.

“자, 가자 고미.”

나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아기곰을 자리에 앉힌 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 오, 오오······. 비엔나 버스는 참으로 대단하구나. 어째서 버스인데도 집에서처럼 물이 나오는 것이냐? ]

순진무구한 아기곰은 기차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했고, 이내 오목하게 파인 족욕통 안에서 뜨끈한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미, 살짝 발 한번 담가봐. 뜨거우면 말하고.”

적당히 물 온도를 맞춘 뒤 고미에게 온도를 확인해 보라고 말하자,

[ 으, 으음······. ]

솜방망이로 가볍게 물을 휘휘 저어본 아기곰은 잠시 고민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

“그래?”

내 기준에서는 조금 뜨거운 것 같은데······. 의외로 뜨끈한 걸 좋아하는구나.

이어서 준비된 입욕제를 풀어주자, 기분 좋은 향기가 솔솔 올라오며 물통 안에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 우, 우웃! 수, 수하! 이것은 무엇이냐? 맛있는 냄새는 아니지만, 제법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

난생 처음 맡아보는 아로마 향에, 초킬릿색 솜뭉치는 눈까지 지그시 감은 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이 녀석에게 맛있는 냄새라는 건, 단 냄새라는 걸 의미하는 거니까······. 초콜릿향 입욕제라는 게 있으려나. 그런 게 있다면 엄청나게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물통에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고,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방석을 바짝 당겨 물통 앞에 놓아주자, 아기곰은 호기심과 조심스러움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방석 위에 자리를 잡은 뒤 조심스레 족욕통 안에 발을 집어넣었다.

[ 오, 오오······. ]

그리고는 이내 귀를 눕힌 채 녹아내린 초콜릿같은 상태가 되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오, 오오오······. ]

평소에는 즐거운 일을 할 때면 잔뜩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곤 하는데, 이건 또 새롭군. 이 녀석이 이렇게 얌전히 족욕을 즐길 줄이야.

워낙에 다리가 짧은 탓에 거의 모서리에 걸치듯 앉아야 간신히 발을 담글 수 있기는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귀엽네.’

물에 젖은 발을 가볍게 휘적거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기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 호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뭔가 온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구나. 아주 마음에 든다. ]

음, 느낌표가 아니라니, 이렇게 차분한 건 처음 보는군.

‘그러고 보니 물을 꽤 좋아한단 말이지.’

고양이나 강아지들은 물을 싫어하는데, 원래 곰이 물을 좋아하던가?

그때, 차내에 족욕실에서 사용하는 물은 아산의 온천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음 번에는 부모님이랑 아웅이, 다웅이까지 데리고 온천이라도 가볼까?’

지금 사는 집에는 욕조가 없어서, 이 녀석이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다.

“고미, 집에 욕조라도 하나 놔줄까?”

[ 오오, 집에서도 이런 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이냐? ]

욕조를 놔준다는 말에, 반쯤 눈을 감은 채 족욕을 즐기던 아기곰의 눈이 다시 반짝 반짝 빛났다.

“응, 몸 전체를 담글 수 있는 욕조도 있어. 그럼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쉴 수 있어.”

[ 오, 오오! 좋다! 아웅이 다웅이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

음······. 확실히 지난 번 도원결의 이후로 사이가 엄청 좋아진 것 같네.

‘아웅이는 북극곰이니까 뜨거운 물은 안 좋아할 것 같지만······.’

일단 새집에 가면 욕조를 하나 사는 게 좋겠군. 아기곰 삼형제가 모두 들어가서 놀 수 있는 큰 걸로.

지금 집은 욕조를 놓기에는 조금 작으니까. 게다가 곧 이사도 갈 건데 이제와서 욕조를 놓기도 애매하고.

“새집에 가면 욕조 사줄게. 그럼 매일매일 따뜻한 물에서 쉴 수 있어.”

[ 오오! 수하, 역시 너는 최고구나! 이 몸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 몸과 네가 번 돈을 열심히 모아서 우리도 이런 비엔나 버스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떠냐! ]

······.

열심히 돈을 벌어서 보태주겠다는 말은 참 사랑스럽기는 한데, 기차를 사는 건 무리라니까······.

욕조를 사준다는 말에 잔뜩 신이 난 아기곰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천천히 지나가는 차창 밖의 녹음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아무 것도 없는 논밭과 들판이 지나가는 풍경이 뭐가 그리 좋은지, 녀석의 입가에는 줄곧 행복한 미소가 머물렀다.

“고미, 그냥 지나가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아?”

무심코 던진 질문에, 아기곰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그렇다. 바깥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운 걸 보면, 이 몸이 오랫동안 대균열을 지킨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니 말이다. ]

담담한 말투로 답하는 고미의 맑은 눈동자에는, 평화롭다 못해 한가하게까지 느껴지는 논밭의 풍경이 비추고 있었다.

‘그냥 신기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제야 고미가 왜 그렇게 세상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내 눈에는 지루하고 평범한 풍경일지라도, 이 아기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앞으로도 더 많이 놀러 다니자.”

관광 열차가 그리 빠르지 않다는 사실이, 흘러가는 풍경이 바쁘지 않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웠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차창 밖의 풍경 하나하나를, 조금 더 확실히 눈에 담을 수 있을 테니까.

바로 그때,

- 삐빅! 삐빅!

족욕 시간이 끝났다는 아쉬운 알람이 울렸고, 숲속 친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 우, 우웅? 벌써 끝난 것이냐? ]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아기곰의 모습에, 나는 다음에는 사우나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즐거움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 후훗, 좋다! 그렇다면 또 다른 곳으로 가보자꾸나! 아직 삶은 계란을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 ]

그 말을 들은 아기곰은 이내 아쉬운 표정을 지우고 꼬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삶은 계란, 그러니까, 이 기차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군. 우리 애가 이렇게 똑똑하다.

“자, 그럼 이제 삶은 계란을 먹으러 가볼까?”

아니나 다를까, 족욕을 마친 노인국 씨가 웃으며 삶은 계란과 사이다가 든 봉투를 흔들며 다음 칸으로 넘어가자고 말했다.

* * *

[ 우, 우웅!? ]

다음 칸으로 넘어가자, 모험을 사랑하는 아기곰은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좁은 통로를 바라보았다.

“여기도 신기하게 되어 있네요.”

통로가 한쪽으로 모두 쏠려있고, 한옥방 같은 구조를 가진 객실의 모습에, 여행 짬밥이 제법되는 한유진 씨마저 어서 빨리 그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 오, 오오. 저 안에 무언가 엄청난 것이 이 몸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는 객실의 모습에 모험가 아기곰의 두 눈이 더욱 형형한 빛을 발했고,

[ 어서 이 몸이 들어갈 방으로 안내해다오! ]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노인국 씨에게 우리의 방은 어디인지를 물었다.

“허허허, 이게 바로 온돌 열차네. 주말에는 돈이 있어도 예약이 꽉 차 있어서 타기가 어려운데, 다행히 평일이라 자리가 좀 남아 있더군.”

말을 마친 노인국 씨는 곧바로 객실 중 하나를 골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돌 방의 구조는 객실이라기보다는 작은 한옥 집의 방처럼 보였다.

문도 한옥풍이고, 황토빛 바닥에 벽면과 장식품 모두 한옥처럼 꾸며져 있어 창밖으로 비추는 풍경만 아니면 이곳이 열차라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 오, 오오오! 이, 이곳은······. 이 몸의 대웅전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구나! ]

방안을 훑어보던 아기곰은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잽싸게 방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 그 와중에도 정확히 중앙에 해당하는 지점에 자리를 잡다니, 과연 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녀석다운 모습이군.

이어서 숲속 친구들이 하나둘 고미의 곁에 자리를 잡았고, 노인국 씨가 봉투 가득 들어있던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꺼냈다.

“자, 기차여행과 찜질방의 기분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회심의 코스라네. 여기서 삶은 계란을 까먹으면 딱이지!”

그렇군. 찜질방은 맥반석 계란에 식혜라고 알고 있지만, 대충 비슷한 느낌이니 넘어가자. 디테일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한 거니까.

[ 오, 오오! 그렇구나! 과연, 삶은 계란과 어울리는 장소다! ]

노인국 씨의 말을 들은 고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삶은 계란 =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그리고 이 방은 자신의 대웅전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데다가, 주위가 온통 노란색에 바닥까지 황토색의 온돌이니, 자신의 위대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서 하이라이트를 맞이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자, 그럼!”

탁!

말을 마친 노인국 씨는 곧장 삶은 계란을 가볍게 두드린 뒤 그것을 바닥에 굴리기 시작했고,

[ 오오! 이 몸도! ]

흥분한 아기곰은 곧장 삶은 계란을 하나 집어들고 노인국 씨를 따라하려 했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으, 으음······. 안될 것 같은데······.’

힘 조절에 실패하면 온돌방에 으깨진 계란이 굴러다니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은데······.

“고미, 그러지 말고······.”

이에 나는 참사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얼른 계란을 붙잡은 고미의 손을 붙잡았다.

“나랑 같이하자, 전에 주먹밥 만든 거 기억하지? 그때처럼 아주 살살 굴리는 거야.”

매번 안된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같이 하면서 천천히 힘 조절을 익히게 해주는 게 낫겠지.

[ 오, 오오! 그렇구나! 계란을 까는 것도 함께 하면 더욱 즐거울 테니 말이다! ]

뭐든지 함께 하면 더 즐겁다는 철학을 가진 아기곰께서는 흔쾌히 나와 함께 계란을 굴렸고······.

[ 우, 우웃! 시, 신기하구나. 어찌해서 굴리기만 하는데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냐!? ]

조금씩 금이 늘어나는 계란을 보며 마치 대단한 마술을 본 것처럼 커다란 눈을 치켜뜨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게 고미와 함께 즐거운 계란 까기를 시도하고 있는 사이, 무언가 이상한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러시지?’

지금 온돌방 구석에는, 밝은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 하나가 벽을 마주 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상하네.’

평소라면 고미의 계란까기를 보고 가장 열렬한 리액션을 보여야 할 사람이 바로 한유진 씨인데······.

“한유진 씨, 왜 그래요?”

심지어 내가 자신을 불렀는데도 못 들은 척 온 정신을 집중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살짝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안색을 살피려던 순간······.

그녀의 손에 ‘엄청난 것’이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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