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2 비엔나 버스의 낭만.
[ 저 문을 열면, 또 새로운 것이 이 몸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냐!? ]
특별한 것이 기다린다는 말에, 모험을 사랑하는 아기곰의 꼬리와 귀가 흥분으로 빳빳하게 곤두섰다.
[ 수하, 어서 가보자! 진정한 곰이라면, 언제나 새로운 모험에 몸을 던져야 하느니라! ]
음,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걸어가는 걸 모험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아기곰에게는 저 작은 문이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처럼 느껴지겠지.
“허허, 그럼 한번 가볼까?”
숲속 친구들의 대장님이 탐험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자, 노인국 씨가 먹을 것이 든 쇼핑백을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3번 칸은 식당 칸이네. 여기서 먹어도 상관없지만, 저쪽이 전망이 더 좋으니 저기서 간단하게 간식이라도 먹지.”
‘관광 열차라더니, 식당 칸까지 따로 있는 모양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 드르륵!
행동파 아기곰이 곧장 통통한 손가락을 움직여 허곰섭물로 문을 열었다.
[ 후후, 제법 높은 곳에 손잡이를 달아놨지만, 위대한 이 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 그 누구도 모험을 원하는 위대한 곰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느니라. ]
으음······. 고미, 손잡이가 너무 높은 곳에 달린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작은 거야. 그거 아니라도 대부분의 문고리에 손이 닿지 않잖아.
여하튼, 기곰술로 첫 번째 장애물(?)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탐험가 아기곰은 당당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 오, 오오오! 괴, 굉장하구나! 봉식이의 버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수하, 너는 이 버스를 사거라! 이 녀석을 타고 이 몸과 함께 온 세계를 누비는 것이다! 어떠냐!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지 않느냐!? 친구들을 모두 싣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것을 잔뜩 잔뜩 먹는 것이다! ]
눈 앞에 펼쳐진 식당 칸의 풍경에, 아기곰은 무릉도원을 발견한 사람처럼 황홀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식당 칸의 구조는 내가 아는 기차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좌측에는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고, 오른쪽에는 차창을 내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창가에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신기하게 생겼네요. 이런 건 처음 봐요.”
기차에 식당 칸이 따로 있다니,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다.
내가 기차를 타 본 건 지방 학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두세 번 정도 ktx를 이용해 본 게 다니까.
나의 한마디에 노인국 씨는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허, 옛날 기차에는 매점도 있었네. 요즘 기차에는 그런 건 커녕 간식 카트까지 없어지고 있으니, 기차 여행하는 재미가 뚝 떨어져 버렸어.”
“정말요?”
한유진 씨가 신기하다는 듯 되묻자, 신이 난 아저씨는 그윽한 눈빛으로 결코 싫지 않은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했다.
“그럼, ktx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편리함 대신 낭만이 있었지. 내가 우리 마누라랑 기차 여행하다가 매점에서 눈 맞았는데.”
확실히 연륜이 있으시니, 우리는 모르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구나. 꽤 흥미롭네.
그나저나, 기차 여행하다가 매점에서 눈이 맞았다니······.
처음 보는 사이인데 눈이 맞았다는 건지, 친구들과 함께 다같이 여행이라도 갔다가 매점에서 사랑이 싹 텄다는 건지, 사소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군.
“간식 카트에서 파는 계란이니, 김밥이니, 사이다니 하는 것들이 또 그렇게 맛있었거든. 평소에도 먹는 것들인데, 이상하게 기차에서 먹으면 각별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뉴스에서 경영상의 이유로 80퍼센트의 노선에서 더 이상 판매 승무원이 탑승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아, 저도 들어본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런 거 팔았다고.”
물론 나에게는 추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에 불과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느라 바쁘니 기차 같은 건 타 본 적이 없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도 기차 여행은 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니까.
하지만 고미에게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나는 못 해보고,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라도, 고미에게는 그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이게 부모 마음이라는 건가?’
나는 못해도 아이에게는 해주고 싶다는 게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던데······. 고미와 함께 하면서 조금이나마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 우, 우웅······. 이야기만 들어도 아쉽구나. 친구들과 이 비엔나 버스 안에서 맛있는 것을 사먹는다면 더욱 즐거웠을 텐데 말이다. ]
그 이야기를 들은 고미는 살짝 입술을 비죽이며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간식 카트까지 있었다면 먹을 것에 탈 것, 새로운 것. 고미가 좋아하는 완벽한 삼박자를 두루 갖춘 여행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지.
“허허허, 내가 그럴까 봐 준비한 게 있네!”
그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고미의 표정을 본 노인국 씨가 기다렸다는 듯 쇼핑백 안에서 검은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설마······.
“짜잔! 대단한 건 아니지만, 김밥에, 사이다에, 삶은 계란을 사왔지!”
[ 오, 오오오! 문어 할아범! 훌륭하다! ]
그러게, 이건 정말 박수라도 쳐 드리고 싶다.
고미를 생각해서 짧게나마 기차 여행을 준비해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이런 배려까지 해주실 줄이야.
“사실은 나도 잊고 있었는데, 아까 수하 씨가 호두과자를 사러 간 사이에 수다르 선생과 얘기를 나누다가 떠오른 거네. 김밥이나 계란을 사가는 건 어떻겠냐고 말이야.”
[ 허허, 역시 기차 여행에는 계란에 사이다 아니겠습니까? ]
음······. 이번에도 수다르 님의 공이 컸구나.
언제봐도 굉장하다. 그런데, 나랑 한유진 씨도 모르는 걸, 어떻게 저렇게 잘 알고 계신 걸까?
‘역시 연륜의 힘인가?’
나이로 따지면 수다르 님은 대한제국 시절에 경전차가 들어섰을 때도 살아계셨을 테니까.
[ 그럼 어서 식사를 하자꾸나! 너희들도 모두 배가 고플 때가 되지 않았느냐! ]
그러나 막상 자리를 잡고 앉자, 노인국 씨는 기차 여행의 핵심이라던 삶은 계란을 집어넣고 사이다 몇 개와 김밥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우, 우웅? 문어 할아범, 기차 여행에는 계란이라더니, 어째서 계란을 쏙 빼버리는 것이냐? ]
기차에서 먹는 삶은 계란의 맛을 잔뜩 기대하던 고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노인국 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실은 내가 또 준비한 게 있어서 말이야. 이 계란은 그때 먹으면 더 맛있을 걸세. 일단은 빵이랑 김밥부터 먹지.”
뭐지, 또 뭘 준비했길래 이러시지······.
이러니까 괜히 나까지 궁금해지잖아.
[ 으음······. 알겠다. 비엔나 버스도, 먹을 것도, 모두 네가 준비해 주었으니, 믿고 기다려 보마! ]
노인국 씨의 제안에 행동파 아기곰은 보기 드물게 ‘기다린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준비해 준 모든 게 마음에 들었으니, 이 안에서의 모든 것은 상대에게 맡기겠다는 의미겠지.
“자, 그럼 빵부터 먹어봅시다.”
말을 마친 노인국 씨는 곧바로 쇼핑백에 들어있던 빵과 음료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단팡 빵에 식빵, 애플파이, 소보루에 크로켓, 나는 뭔지 모르겠는 이름 모를 빵들까지······. 많이도 사셨네. 거기에 호두과자까지 더해지면 양이 상당한데, 이걸 여기서 다 먹을 수 있을까?
[ 우, 우웅? 이 이상한 녀석은 무엇이냐? ]
내가 식탁 위에 줄줄이 늘어선 빵들을 보며 남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을 때, 호기심 많은 아기곰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란 빵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응?”
고미가 든 방망이처럼 생긴 빵은 마치 숯처럼 새카만 색을 띠고 있었고, 빵 사이에는 옅은 상아색을 띤 크림이 들어있었다.
뭐지······. 음식이 왜 새카만 색이지······.
초콜릿은 아닌 것 같은데.
[ 으음······. ]
손에 들린 검은 빵을 요리조리 훑어보던 고미는 작은 코를 두어번 킁킁거리더니 노인국 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어째서 이 녀석에게서 문어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이냐? ]
······.
고미, 그 얘기를 노인국 씨를 보면서 하지 말라고.
너도 지난번에 인정했잖아. 요즘은 문어가 아닌 것 같다며······.
탈모인을 바라보면서 문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악의는 없다는 건 알지만······.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내가 고미 대신 사과의 말을 건네자, 노인국 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아닐세, 전에도 말했지만, 친근감 있어서 좋아. 그나저나, 우리 고미 선생은 참 대단하구만. 냄새만 맡고도 알아차리다니, 그게 먹물 빵이라는 거거든.”
[ 오오! 그렇구나! 먹물로 만든 빵이라 새카만 것이냐! ]
으음······. 바다여행 갔을 때 문어가 뿜었던 먹물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문어 냄새가 난다고 했던 거야.
[ 허허허, 하지만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문어가 아니라 오징어의 먹물이지요. 오징어의 먹물은 음식에 잘 스며들지만, 문어의 먹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문어의 먹물은 종류에 따라 독성이 있기도 하니, 식용으로는 잘 쓰이지 않지요. ]
먹물 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나처럼 숲속 친구들 최고의 미식가, 미식 수달의 짤막한 설명이 양념처럼 곁들여졌다.
[ 호오오······. 그래서 그 문어 녀석의 먹물과는 조금 다른 냄새가 났던 것이구나······. ]
[ 먹물 특유의 짭짤하면서도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 때문에 지중해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요리의 별미로 알려져 있었지요. ]
“허허, 우리 수달 선생은 정말 해박하군. 어찌 그리 아는 게 많은가?”
수다르 님의 식문화 토크를 처음 접한 노인국 씨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그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소확행의 일종입니다. 지식을 쌓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 말입니다. ]
으음,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 걸 공부하는게 취미라니, 역시 천생 학자시구나.
수다르 님의 짤막한 설명이 끝나자, 고미는 말없이 나와 먹물 빵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곧바로 먹물 빵을 몇 조각으로 잘라 그 중 가장 작은 것을 고미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개발한 아기곰 신체 언어 분석 프로그램(Gomi-Body language Analysis Program: GBA Program)에 따르면, 저런 시선은 ‘달지 않을 것 같아서 많이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맛이 궁금하니, 조금만 맛을 보고 싶구나’라는 의미다.
[ 오오, 수하! 역시 너는 이 몸의 마음을 잘 아는구나! ]
아니나 다를까, 고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곧장 작게 자른 문어빵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 으, 으음······. 흥미로운 맛이지만······. ]
그래, 단맛이 부족하겠지.
“자, 이거 먹어봐.”
이에 나는 단팥빵 하나를 작게 잘라 녀석의 솜방망이에 쥐여주었다.
[ 호오, 이것은······. 호두과자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구나. 하지만 지금까지 먹어봤던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단맛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
단팥빵을 처음 접해보는 아기곰은 냄새만으로도 그것이 지금껏 먹어온 것과는 다른 종류의 단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고, 고미처럼 온갖 종류의 단맛을 세밀하게 구분하고 즐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단팥의 단맛이 초콜릿과는 다르고, 호두 과자와 단팥빵의 맛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을 정도니까.
[ 우웅!? ]
아니나 다를까, 단팥빵이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아기곰의 커다란 두 눈이 주먹만하게 커졌다.
[ 이, 이것은······. 놀랍구나. 진하지는 않지만 부드럽고 깊은 단맛이다. 호두과자와 비슷하지만, 무언가 미묘하게 다른 깊이가 느껴지는구나. ]
역시, 단맛에 관해서는 수다르님 못지 않은 시식평이 가능하군.
이어서 우리는 크림빵이니 크로켓이니 하는 것을 나눠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내 걱정과는 달리 쇼핑백 한가득 들어있던 빵을 말끔하게 먹어치웠다.
이후에 이어진 대화는 던전이니, 몬스터니, 앞으로 닥쳐올 전쟁이니 하는 것과는 무관한, 지극히 사소하고, 조금은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으음······. 고미님은 빵을 상당히 좋아하시는군요. 제빵도 배워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취미를 가진 열혈 드래곤, 이유찬 씨는 또다시 자신의 취미 목록에 새로운 종목 하나를 추가했고,
“허허, 고미 선생이 잘먹는 걸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구만. 다음 번에는 좋은 음식점이라도 예약해 둬야겠어.”
노인국 씨는 고미를 위해 또다른 선물을 준비했으며,
“저도 연금술로 고미님이 좋아할만한 선물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토생원 역시 ‘초월자급’ 선물을 마련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를 한참,
“자, 그럼 이제 삶은 계란을 먹으러 가보지.”
마침내 노인국 씨가 기차여행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 오, 오오! 또 새로운 것이 이 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 ]
이미 기차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버린 아기곰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나섰고······.
- 드르륵······.
노인국 씨가 준비한 또다른 선물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 우, 우오옷! ]
“와아!”
“이건 정말 신기하군요.”
고미를 비롯한 숲속 친구들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사가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