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11화 (211/300)

EP.211 비엔나 버스 투어.

- 파직, 파지지직!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들었다.

그걸 주마등이라고 하지 아마.

갑자기 눈앞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착각이 드는 걸 보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가 보다.

알틴, 왜 눈앞에 있는 아저씨한테 번개를 쏘려고 하는 거니.

그 아저씨 무서운 아저씨야.

고미랑은 다르단다.

번개를 맞고도 ‘오오오! 제법 쓸만한 번개를 내뿜는구나!’하고 웃어주지는 않을 거야.

“알틴! 안돼!”

바로 그때, 한유진 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승강장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고,

“삐이······?”

알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새파란 전광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알틴! 이리와!”

알틴의 돌발행동에 잔뜩 화가 난 한유진 씨는 전에 없이 성난 목소리로 녀석을 불러들였다.

- 찰싹! 찰싹!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꼬마 드래곤을 덥석 끌어안아 못 움직이게 고정시켜 놓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엉덩이를 세차게 두드렸다.

- 찰싹!

“삐, 삐이!”

“이런 곳에서 번개를 뿜으면 어떻게 해! 응!? 뭐하는 짓이야 이게! 네가 번개 뿜었으면, 얼마나 큰일이 벌어졌을지 알아!?”

“삐!”

으, 으음······. 조금 충격적이군. 혼날 짓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실 줄이야.

게다가 알틴은 동이님의 분신 비슷한 거 아니었나. 저렇게 때려도 되는 거야?

‘되, 되는 거겠지. 되니까 때리는 거겠지.’

조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제르보나와 이유찬 씨의 반응을 보니, 이런 일이 종종 있는 모양이다.

여하튼, 나이로 보나, 화려한 외모로 보나,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나, ‘삼룡 어멈’이라는 구수한 호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고미가 상당히 별명을 잘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얼핏 맹해 보이지만, 상당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단 말이지.

“삐, 삐이이이······.”

호되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은 꼬마 드래곤이 반성의 눈물을 글썽이며 애처롭게 우는 사이, 한유진 씨는 잽싸게 천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약한 사람한테는 안 그러는데, 번개를 맞아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한테는 놀아달라고 번개를 뿜을 때가 있거든요. 여태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거기다 알틴이 술래잡기를 좋아해서······. 고미님이랑 같이 뛰어다니니까, 천마님도 자기랑 놀아주는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

놀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번개를 뿜다니, 너무 참신하지 않아?

그 순간, 동이님을 만나고 온 뒤 한유진 씨의 정원에서 고미에게 번개를 뿜던 알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하긴, 그날도 술래잡기하다가 고미한테 번개를 뿜었었지······.’

그게 저 꼬마용의 놀이 방식이었구나.

설마 평소에는 이유찬 씨나 제르보나 씨한테 번개를 쏴댔던 걸까?

‘그래도 백천이 이걸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 성질머리에 자기를 공격하려고 했던 걸 그냥 넘어가 줄 리가 없지.

그러나, 정작 천마님의 반응은 내 생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닙니다, 한 노사. 저도 적의가 없었음을 느꼈습니다. 이 정도는 귀여운 장난이지요.”

심지어 얼굴에는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정말이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거냐.

사람들이 쳐다보는 건 기분이 나쁜데, 번개를 뿜는 건 괜찮은 거야? 대체 어떤 유년기를 겪으면 그런 신박한 방향으로 비뚤어진 가치관을 갖게 되는 건데?

설마 ‘강한 사람한테만 번개를 뿜는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건 아니지?

“그나저나, 참으로 신기한 용이군요. 이렇게 어린데도 강자를 알아본단 말입니까?”

······.

맞네, 맞아.

강하다는 말에 기분 좋아진거네.

‘일단 메모.’

나중에 이 무서운 손주분에게 뭘 부탁할 때는 ‘강하다’는 말을 양념처럼 뿌려줘야겠군.

- 치이이익!

그렇게 알틴이 일으킨 작은 소동(?)이 끝났을 무렵, 약간의 소음과 함께 안내멘트가 울려 퍼지며 꿈과 희망이 가득한 비엔나 버스의 문이 열렸다.

그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초콜릿색의 솜뭉치가 우리를 향해 오도도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수, 수하! 문어 할아범! 크, 큰일이다! 문이 너무 많구나!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냐!? ]

“허허허, 이리 오게, 고미 선생!”

그 모습을 본 노인국 씨는 귀여운 손주를 본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오, 오오오! 그렇구나! 역시 들어가는 문이 정해져 있는 것이구나! 그렇지, 아무 문이나 마구 열고 들어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

음······. 사실 어떤 곳으로 들어가든 제자리만 잘 찾아가면 되는 거지만, 이럴 때 보면 참 기본적인 예의는 잘 알고 있는 녀석이란 말이지.

보통 남의 집에 찾아가도 아무 문이나 벌컥벌컥 열면 안 되는 거고, 공공장소에서도 아무 곳에나 들어가면 안되는 거니까.

“자, 자, 얼른 들어가세. 2번 칸이네.”

노인국 씨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네 개의 의자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객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쁘네요.”

“그러게요, 기차는 잘 안타서 몰랐는데······.”

나는 물론이고, 늘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덕에 대중교통 이용할 일이 별로 없으신 한유진 씨도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관광열차라 그런지, 기차의 실내는 흔히 ‘기차’하면 떠올리는 건조한 모습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바닥은 파란색과 흰색을 베이스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고, 의자의 바닥은 녹색, 등받이는 파란색이었다. 창가나 실내도 흰색과 갈색을 베이스로 한옥 같은 느낌이 나도록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 오오오! 이토록 자리가 많은 버스라니! 과연 이 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웅장한 녀석이로구나! 이 몸은 창가에 앉겠다! 저곳에 앉으면 바깥이 아주 잘 보일 것 같구나!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이 몸을 볼 수 있겠지!? ]

처음 타보는 비엔나 버스의 웅대함에 심취한 아기곰은 곧장 창가로 달려가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으음······. 아니야 고미, 달리는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인간 같은 건 없어. 모두가 너 같지는 않다고.

게다가 기차에 곰이 타고 있는 걸 발견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들어갈 문을 신중하게 고른 다음 정작 자리는 아무 곳이나 앉아버리다니······.

이번 기회에 이런 건 자리가 정해져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군.

이랬다가는 다음에 영화관에 데리고 가도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을 골라 앉으려 들지도 모르니까.

“고미, 안돼. 기차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 다른 사람 자리에 네가 앉아버리면 그 사람 자리를 뺏는 거야.”

[ 우, 우웅!? 그런 것이냐!? ]

나의 지적에 예의 바른 아기곰은 용수철처럼 발딱 몸을 일으켰다.

‘훌륭하군, 훌륭해.’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떼를 쓰거나, 현대 문명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말마따나 ‘예의를 아는’ 훌륭한 아기곰이다.

“아, 괜찮네. 아무 곳에나 앉게 고미 선생.”

그때, 노인국 씨가 싱긋 웃으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앉아도 좋다고 말했다.

[ 아니다, 이 몸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훌륭한 아기곰이니라!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훌륭한 곰성을 가진 아기곰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하자,

“어차피 이 칸 좌석을 전부 사뒀으니, 아무 곳에나 앉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걸세.”

New인국 씨의 입에서 손주를 보는 재벌 할아버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

어, 어째 사람이 없다 했더니······.

“아, 너무 부담스러워 말게. 괜히 한 칸을 통째로 빌린 게 아니니까, 사실 할 이야기도 좀 있고, 나도 오랜만에 느긋하게 이동하면서 머리도 좀 식히고 싶어 그런 거니까.”

그렇군. 그래도 열차 전체를 통째로 빌리지는 않았으니, 재력에 비해서는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하긴, 놀이공원도 전세를 냈었는데, 열차 한 칸 정도야······.’

[ 오, 오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 몸은 이곳에 앉겠다! 이곳이 햇볕이 가장 잘 드는구나! ]

노인국 씨의 말을 들은 고미가 안심하고 자리를 잡자, 수다르 님과 토생원이 자연스레 그 맞은 편에 앉았다.

고미의 옆자리는 당연히 내······.

- 털썩.

‘응!?’

숲속 친구들의 상식에 따르면, 고미와 가장 가까운 곳은 당연히 내 자리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아기곰의 수발을 드는데 내 역할이니까.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 암묵적인 규칙이 깨졌다.

‘나의 자리는 오로지 나의 의지만으로 정한다’고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가치관을 가진 천마 님에 의해.

‘어, 이걸 어떻게 하지?’

사실 고미 옆에는 꼭 내가 앉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우리 애랑 같이 기차를 탔는데, 다른 사람이 애 옆자리에 앉았을 때 느낄 법한 묘한 위화감이랄까.

딱히 정당하지도, 근거가 있지도 않지만, 그냥 이상하다고.

하지만 고미의 옆자리는 내 지정석이니 비키라고 말하기에도 참으로 애매한 상황······.

[ 흠, 흠흠! 작은 살쾡이, 이 몸의 옆자리는 수하의 것이다. 수하는 이 몸의 제자이자 가족이니, 이 자리에 앉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

그때, 고미가 점잖은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옆자리는 나의 것임을 천명했다.

“흠······. 죄송합니다 사숙조. 웅 노사님과 조금 더 가까이서 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고미의 지적에 무공에 미친 무서운 손주분께서는 흔쾌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황송하게도 ‘죄송하다’는 말까지 내뱉었다.

“아, 아니야. 죄송할 문제는 아니지.”

실은 나도 여태 늘 고미와 가장 가까운 곳을 내 지정석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으니까.

그냥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달까?

여하튼, 옆자리를 빼앗긴(?) 천마는 다른 곳을 찾아 앉는 대신 웅 노사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멀뚱히 자리를 잡고 섰다.

바로 그때, 약간의 덜컹거림과 함께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오, 오오오! 수하, 이 녀석이, 이 녀석이 움직인다! 정말로 이 커다란 녀석이 다른 버스처럼 스스로 움직일 줄이야! ]

차창 밖의 풍경이 뒤로 물러나는 모습에, 탈 것 마니아인 순수한 아기곰은 잔뜩 흥분해 꼬리를 빙글빙글 돌려댔다.

한편, 웅 노사를 존경해 마지 않는 천마께서는 기차의 흔들림 따위는 아랑곳 않고 평형을 유지한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하군.’

정말이지, 쓸데없이 대단하다.

저토록 훌륭한 평형감각을 이토록 사소하고 쓸모없는데 사용할 수 있다니.

그 순간, 머릿속에 고미의 뒤를 따라 장발을 흩날리며 승강장을 달리던 손주분의 모습이 스쳤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당사자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묻기로 했다.

설마, 이런 거 물어본다고 화를 내고 그러지는 않겠지.

“백천, 그런데 아까는 왜 뛴 거야?”

나의 질문에 무서운 손주분께서는 – 참으로 고맙게도 - 흔쾌히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웅 노사의 보법이 하도 신묘하여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어 그런 것입니다. 어딘가에서 본 듯 하면서도 낯설고,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실로 복잡하고 현묘한 것이, 참으로 대단한 보법이더군요.”

“그, 그래?”

“네, 화산의 암향표나 오행매화보와도 비슷하나 더욱 가볍고, 무당의 제운종과도 닮은 점이 있었으나 더 쾌속하고 유연했습니다. 동시에 신교의 비전 보법의 묘리까지 담고 있으니, 그야말로 보법 하나만 보아도 만류귀종의 이치를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러니 어찌 가까이서 보고 싶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런 거냐. 그냥 두다다다, 오도도도가 아니었어?

내 눈에는 그냥 ‘저렇게 다리가 짧은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움직이지?’가 다였는데······.

[ 호오오······. 이 몸의 독문보법을 알아보다니, 과연 보는 눈이 있는 녀석이구나. 현세의 그 누구도 이 몸의 보법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

대체 뭐냐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매혹적으로 흔드는 그 움직임에 그런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거야?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

무협이 가장 고인물이 많은 장르라더니, 과연 무협의 세계는 심오하구나.

그렇게 잠시 고미의 매혹적인 보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열차에 속도가 붙으며 차창 밖의 풍경이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 오, 오오.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 몸은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니, 과연 버스는 참으로 신묘한 물건이다. ]

빠르게 지나가는 풍광을 바라보는 아기곰의 입가에는 또다시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깥을 보는 것뿐인데, 어쩜 저렇게 즐거워할까 싶을 정도로 행복한 표정.

그런 고미를 보고 있자면, 괜스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만큼은 초월자니 전쟁이니 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모두 잊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노인국 씨에게 꼭 고맙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 허허, 고미님. 제가 아는 바로는 이 기차에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 함께 구경이라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순수한 아기곰과는 달리 현세문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산신령님께서 객실 투어를 제안했고,

[ 뭐, 뭣이!? ]

아기곰의 꼬리가 다시 흥분으로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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