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0 갓-고미님의 비엔나 버스 시승식.
“내가 기차를 예약해 뒀는데, 그걸 타고 돌아가는 건 어떤가? 우리 고미 선생이 기차를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노인국 씨의 제안에 먹을 것만큼이나 탈 것, 특히 큰 탈 것을 좋아하는 아기곰의 귀가 쫑긋 일어섰다.
“우웅? 기차? 그것이 무엇이냐? 이름에서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생각해보니, 고미는 지하철도 기차도 타 본 적이 없다.
하긴, 아직 해본 것보다 못해 본 게 훨씬 많은 꿈 많은 아기곰이기는 하지.
“버스만큼 큰 차들을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어서 만든 큰 차야.”
“뭐, 뭣이!? 그, 그런 굉장한 물건이 존재했단 말이더냐!”
버스, 큰 것, 먹을 것. 자신이 좋아하는 세 가지를 엮어 만들어진 황홀한 이미지에 고미의 꼬리콥터가 보송보송한 솜뭉치를 하늘로 띄워 올릴 듯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허허, 거봐. 내가 우리 고미 선생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짤막한 설명만 듣고도 이미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고미의 모습에, 노인국 씨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어떤가? 유찬 씨랑 제르보나 씨도 매일 우리 태워 다니느라 피곤할 텐데,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면 기차라도 타고 올라가면서 느긋하게 이야기라도 나누지.”
이어지는 노인국 씨의 말에 고미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위대한 이 몸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는데 그냥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이 몸은 예의와 신의를 아는 곰이니 말이다! 자, 가자! 어서 그 기차라는 녀석을 만나고 싶구나! 그 녀석도 틀림없이 이 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음……. 생각해보니 요즘 골치 아픈 문제도 많고, 해결해야 할 일도 많아서 고미랑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한 것 같군.
“그럼 그렇게 할까요?”
내가 그렇게 답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한유진 씨도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도 마침 수하 씨에게 할 이야기가 좀 있었는데, 따로 시간 낼 것 없이 기차 타고 올라가면서 하면 되겠네요.”
“허허, 그럼 서대전역으로 가지.”
* * *
이후 우리는 드래곤을 타고 서대전역 근처에 적당한 곳을 찾아 내렸다.
[ 이곳이 그 기차라는 녀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냐? ]
난생처음 기차역에 와본 아기곰은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커다란 버스가 줄줄이 이어져 있는’ 물체를 찾기 시작했다.
[ 흐음, 큰 버스가 여러 개 연결된 대단한 녀석이라고 하더니, 벌써부터 작은 버스 같은 녀석들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지는구나……. 하긴, 진짜 대단한 녀석들은 그리 쉽게 만나볼 수 없지. 괴수들 중에도 정말로 강력한 녀석들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없으니 말이다. ]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내가 설명한 물체가 보이지 않자, 고미는 곧장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그 기차라는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어서 그 웅장한 녀석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다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고미, 기차를 보려면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손가락을 들어 역사를 가리키자, 고미의 커다란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 호오……. 설마 녀석을 위한 집까지 마련되어 있는 것이냐? ]
음, 그렇네.
확실히 현대문물을 모르는 녀석이라 그런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기차역은 기차를 위한 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 자, 그럼 어서 가보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이 몸이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다! ]
흥미롭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기곰은 잽싸게 나의 어깨 위에 올라타며 전진 명령을 내렸다.
“그래, 가자.”
광장을 지나 역사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한가지 중대한 문제를 깨달았다.
“뭐야, 저게 무슨 조합이야?”
“조련사인가?”
“야, 무슨 조련사가 기차역에 곰이랑 수달을 데리고 들어와.”
“그럼 뭐야.”
“헌터 아니야?”
“펫이 저렇게 생겼냐? 아무리 봐도 그냥 곰인데.”
“근데 진짜 귀엽다. 곰이 원래 저렇게 귀엽나?”
“수달도 있는데?”
“엄마! 저 아저씨 봐! 막 동물들이랑 같이 다녀!”
“영화 촬영인가?”
“카메라가 없는데?”
“그럼 저 사람은 뭐야? 왜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하고 다니는데?”
…….
어깨에 아기곰을 얹고 다니는 20대 남자에, 이족 보행 수달과 토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강탈하는 조합이다.
그런데 이제는 장포를 입은 장발의 중년까지 섞였으니,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지.
숲속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이 조합이 갖는 파괴력(?)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나 목소리보다 나를 더욱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무서운 손주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백천, 왜 그래?”
설마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를 쳐다보는 거 자체에 불쾌함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감히 평범한 인간들이 천마를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언짢군요.”
역시, 그거였냐.
「하지만 본좌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감히 본좌를 바라볼 수 없으며…….」
순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손주분께서 첫 만남 때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배, 백천, 사람들한테 겁주면 안 돼, 알지?”
혹시나 해서 내뱉은 말에, 천마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 작은 살쾡이! 본래 위대한 존재는 어딜 가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법, 위대한 이 몸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들의 시선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니라. ]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아기곰이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언제봐도 굉장한 정신력(?)이군.
보통은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면 부담을 느끼는 게 정상 아닌가.
“흠…….”
웅 노사의 한마디에 줄곧 굳어있던 천마는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노사님과 사숙조를 따르기로 했으니,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요.”
다행이다…….
왜 이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합니다.
[ 아, 아앗! 수하! 저, 저것은! ]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어깨 위에 앉아있던 아기곰이 돌연 나의 머리를 움켜쥐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왜 그래?”
녀석의 솜방망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자, 이내 이 천진난만한 아기곰을 흥분시킨 물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 어, 어서, 저것을 사다오! ]
먹보 아기곰을 흥분시킨 것은, 호두과자였다.
바다 여행을 갔을 때도 호두과자를 꽤 마음에 들어 했지.
[ 허허, 호두과자라, 역시 기차 여행에는 먹을 것이 빠질 수 없지요. ]
호두과자를 원하는 고미의 모습에, 수다르 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산속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던 양반이 기차여행과 간식이 세트라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알았어, 사줄게.”
나는 숲속 친구들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곧장 호두과자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멤버를 그대로 이끌고 이동하기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거든.
나는 고미랑 다르게 부끄럼이 많다고.
어디 보자, 42개에 만원, 96개에 2만 원이라…….
사람이 많으니까 2만 원짜리로 사면 되겠지?
“2만 원짜리로 주세요.”
그렇게 가장 큰 호두과자 세트를 골라 값을 치르려 할 때,
[ 수하! 안 된다! 두 개는 사야 하느니라! ]
먹보 아기곰이 무려 192개에 달하는 호두과자를 요구했다.
현재 인원은 나, 고미, 삼룡이 패밀리 넷에 수다르님, 토생원, 이강혁 씨, 무서운 손주님. 총원 열 명이다.
나와 이강혁 씨는 군것질을 잘 하지 않고, 알틴은 사이즈가 작다 보니 입이 짧은 편이다.
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192개는 너무 많다는 거지.
[ 고미, 하나만 사도 한 사람당 10개는 먹을 수 있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
산수에 약한 문과 아기곰께서 또다시 계산을 잘못했나 싶어 던진 말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 아니다! 엄마도, 아빠도, 호두과자를 좋아하지 않느냐! 게다가 아웅이와 다웅이도 아직 호두과자를 먹어본 적이 없다! 우리끼리만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신의에 어긋나는 일이니라! ]
문과형 인재라 숫자에 약하지만, 기억력만큼은 영재급인 똘똘한 아기곰께서는, 지난번 여행을 갔을 때 부모님이 호두과자를 좋아했던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으음…….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낫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는 고미의 마음 씀씀이에,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2만 원짜리 하나 더 주세요.”
가장 큰 호두과자 세트 두 개를 들고 돌아가자, 한유진 씨가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그걸 다 드시게요?”
“좀 많지 않을까요?”
이강혁 씨 역시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호두과자 200개는 좀 아니긴 하지.
“고미가 부모님이랑 아웅이 다웅이 줄 것도 사자고 해서요.”
나의 대답에 두 사람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고,
“아이고, 우리 고미 선생은 이렇게 마음이 고와서 어쩐대.”
숲속 친구들 중 유일하게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노인국 씨는 유독 기특해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기차 시간 다 됐으니까, 얼른 가보지.”
그렇게 간단한 선물(?)구매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기차가 올 시간이 되어 있었다.
* * *
[ 우, 우우우웃! ]
파랗게 도장한 열차가 보이기 시작하자, 흥분을 참지 못한 아기곰이 번개처럼 나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 수, 수하! 굉장하다! 이, 이것은 단순히 큰 버스가 여러 개 붙어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
말을 마친 아기곰은 말릴 새도 없이 승강장의 끝으로 순간이동을 하듯 사라졌고,
[ 고, 고미! ]
승강장의 끝에서 끝으로 열차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웅장하다! 웅장해! 이것이야! 이 몸이 원하던 탈 것은 바로 이것이니라! ]
…….
아무리 속도가 느려졌다고는 해도, 기차랑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기차 구경이라니…….
이 충격적인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냐.
그보다, 조금 더 평범한 방식으로 즐겨줄 수는 없는 거냐…….
[ 수하! 이것을 사다오! 이 기차라는 녀석을 갖고 싶구나! ]
안 돼, 무리야.
차라리 전세기를 사달라고 해…….
기차는 레일이 없으면 달리지 못한다고…….
“허허, 허허허……. 고미 선생은 언제봐도 굉장하군. 어쨌든,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구만 그래.”
기차와 나란히 달리는 솜뭉치의 모습에 노인국 씨는 놀람과 흐뭇함이 섞인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웅장한 탈 것에 홀딱 빠져버린 아기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우와, 진짜 빠르다. 저거 펫이지?”
“그런데 저건 뭐야?”
“헐……. 대박. 헌터인가?”
시선을 돌려보자, 고미의 뒤에 장발을 휘날리는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하아, 손주님……. 너는 왜 같이 뛰고 있는 건데요.
너 그런 캐릭터 아니지 않았냐.
막 무게 있고, 무섭고, 진중하고, 천마다운 카리스마와 체통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캐릭터 아니었냐고.
사람들 눈을 가리고 싶다.
아니, 이미 볼 건 다 봤구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이능은 없는 거냐.
대체 이게 뭐냐고.
“음…….”
“으음…….”
당황한 숲속 친구들이 침음을 흘리고 있을 때,
“삐이이이이!”
금빛 섬광 하나가 갈색의 솜뭉치와 장발의 사내 뒤에 따라붙었다.
…….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고 하는 거냐.
백번 양보해서 고미랑 알틴은 아기라서 그렇다 치고, 왜 당신까지 그러는 거야. 외모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귀요미 계통은 아니었잖아.
대체 왜 같이 뛰는 건데.
그렇게 갑작스런 손주분의 돌발 행동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 기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 끼이이이…….
이윽고 약간의 소음과 함께 꿈과 희망을 가득 실은 파란색 열차가 마침내 승강장에 멈춰섰다.
하지만 말썽꾸러기 삼인방의 기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삐이이이이!”
“알틴! 안돼!”
열차가 멈춰서는 것과 동시에, 알틴의 몸에서 새파란 전광이 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