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05화 (205/300)

EP.205 질풍노도 손주님.

천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하하하, 사숙조, 무얼 그리 당황하십니까?”

전음을 들을 수 있다니, 생각도 못 했다.

무협지에서 보면 막 바로 옆 사람하고 전음을 해도 못 듣고 그러던데!

역시 천마쯤 되면 다른 거냐!

“죄, 죄송합니다······.”

으으, 민망하다. 나쁜 얘기를 한 건 아니지만, 왠지 뒷담화를 하다 걸린 것 같은 느낌이야.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정말 나쁜 뜻을 가지고 있다면 듣고도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지 않았겠습니까?”

다행히도, 천마는 흔쾌히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으으, 미치겠네.’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분명 아주 잠깐이나마 표정에 드러났을 테니까.

‘설마 이런 데서 꼬일 줄이야.’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가 오고 가고 나서 말이 끊긴 게 아니라는 점.

‘응?’

그 순간, 나는 천마가 입을 연 타이밍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잠깐······. 진짜로 내 의중이 알고 싶었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으면 되는 거 아니야?’

천마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삼세를 통틀어 유일한 지존 어쩌고 하는 말로 보아, 무림일통 정도는 완수하고 이쪽으로 넘어오신 양반이 분명하다.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었겠지. 허공답보를 할 줄 아니까 공중전도 겪었을지도 모르고.

요는 나보다는 훨씬 더 경험도 많고, 그만큼 머리도 비상할 거라는 소리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나라면 모르는 척 가만히 이야기를 다 듣고 판단을 내렸을 거다.

아니,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했겠지.

여기서 말을 끊어봐야 얻을 게 없으니까.

‘내용은 듣지 못한 건가?’

아버지를 따라 무협영화나 무협지를 조금 보기는 했지만, 전음을 완벽하게 엿듣는다는 설정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음은 안 하는 게 낫겠어.’

내용을 알 수 있든 아니든, 자기가 언질까지 줬는데 눈앞에서 전음을 해댄다면 기분이 나쁜 건 매한가지일 테니까.

이 사람을 어떻게든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내 입장에서는, 전음을 해서 득 될 게 없다.

“흠흠, 죄송합니다. 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사손이라고는 해도 천마 정도 되는 분에게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거래를 해볼까 했습니다.”

임기응변으로 내뱉은 말에, 천마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백조,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또다시 말을 편하게 하라는 요청.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나쁘게 말하면 곧 죽어도 자기가 뱉은 말은 지키는 꼬장꼬장한 성격인 것 같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애써 불러놓은 보람도 없이 판이 다 뒤집어 질거라는 확신마저 든다.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니까.

“아, 네, 아니, 응.”

게다가 웃으면서 할 말은 다하는 점이 더 무섭다.

‘진짜 만만치 않네.’

원래대로라면, 고미에게 무공을 배우는 것을 조건으로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그게 통할 것 같지가 않다.

아니,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쪽에서 먼저 No 사인을 보낸 상태라고 봐도 될 거다.

‘고미 앞에 무릎도 꿇었고, 웅 노사 웅 노사하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뭐든지 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니야.’

굳이 내가 전음을 사용한 걸 지적한 건, 에둘러 그런 의사를 내비친 거겠지.

무슨 부탁을 하든 들어줄 거라면, 그냥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면 그만이니까.

즉 ‘무슨 요구든 다 들어줄 마음은 없다,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해라’라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피력한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사숙조께서 사손의 입장까지 고려해주시니,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겠군요.”

역시, ‘이야기를 들어본다’고 표현하는 걸 보니, 내 예상이 얼추 맞은 것 같다.

“백천, 네가 원하는 건 만류귀종의 비밀이야?”

결국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묻기로 결정했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괜히 말꼬리 빙빙 돌리다 문제가 더 꼬이는 수가 있으니까.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 표정이군요.”

무서운 손주분께서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을 내뱉었다.

······.

이 사람, 무섭다. 뭐냐고 대체.

“별 것 아닙니다. 웅 노사께서 던져준 답은 결국 웅 노사님의 답. 결국 제 답은 제가 찾아야 하는 것 입니다. 무도란 본디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다만 웅 노사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제 나름의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겠지요.”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말을 하는군······.

과연 천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오오! 작은 살쾡이! 네 녀석의 깨달음이 참으로 깊구나! 벌써 그 사실을 깨달았단 말이냐!”

반면, 천마의 말을 들은 고미는 신이 나서 솜방망이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냐, 정말 알아들은 거야?’

고미가 정말 저 어려운 말을 알아들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럽군.

아니야, 이쪽은 고미가 전공이지.

무공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니까, 일단 알아들었다고 믿자.

“그럼 네가 생각한 들어줄 수 있는 부탁과,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은 뭐야?”

나의 질문에, 무서운 손주의 입가에 또다시 묘한 미소가 어렸다.

“사백조께서는 아주 영민하신 것 같군요. 직접 언급한 바가 없는데도, 제 의중을 아주 잘 꿰뚫고 계시니 말입니다.”

음,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한 건, 내 머리가 쓸만한지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건가.

여러모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

“먼저 하문하셨으니 답하자면, 저는 천마입니다. 그리고 천마에게는 천마의 방식이 있는 법입니다. 사숙조와 웅 노사께서 먼저 용건을 말씀하시면, 제 스스로 판단할 터이니, 일단 기탄없이 말해주시지요.”

이어지는 천마의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의 갈 길은 오로지 자신이 정한다는 선언과도 같은 말.

과연 천마다운 언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 이 사람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거지.

무협지 식으로 비유하자면, 지금 나는 태산을 움직여야 하는 입장이다.

“그 들어줄 수 있는 부탁에, 싸움을 도와달라는 것도 포함이 되는 건가?”

“상대가 누구냐,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렇겠지. 이 고집 센 손주 양반아.

하지만 내가 이렇게 운을 뗀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싸움, 무공, 무의 극치. 추구하는 게 그거라면, 당신도 틀림없이 흥미가 동할 얘기니까.

“허나 호기심이 동하는군요. 웅 노사가 계신데 제 도움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역시,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아마, 그리고 이 싸움에서 너도 많은 걸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

고미도 아니라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천마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겨났다.

“사숙조, 배분으로는 사숙조가 저보다 위라고는 하나, 저에게 깨달음을 논할만한 무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윽, 날카로운 일침이다.

게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무섭냐고요.

이럴 거면 말이라도 존댓말을 쓰게 해주든가, 사숙조라고 부르지나 말든가,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울고 싶다······.’

그때, 고미가 타이밍 좋게 어시스트를 올려줬다.

“아니다, 위대한 이 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느니라. 지금까지 네가 만난 녀석들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나, 애꾸눈 괭이 놈이나 왕 도마뱀보다 강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 애꾸눈 괭이는 만수왕이고, 왕 도마뱀은 황금의 군주예요.”

혹시나 고미가 붙인 별명을 이해하지 못할까 설명을 덧붙이자, 천마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그건 흥미롭군요. 하지만 웅 노사께서 나서시면 저는 손맛을 볼 기회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마, 말하는 거 보소. 초월자를 상대로 손맛이라니······.

“상황이 그렇지가 않아서.”

‘요’를 붙이고 싶다. 제발 존댓말 쓰게 해줘. 말을 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무신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모두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고미가 있다고는 해도, 이 전쟁은 결코 승산이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적이 만수왕에 황금의 군주뿐이라면 모를까, 가짜 고미에 ‘ 세 번째’까지 합치면 이쪽이 명백하게 열세니까.

반면 숲속 친구들 중에서 초월자급은 고미에 다웅이, 얼마 전에 합류한 흑암뿐이다. 그나마 흑암은 시체가 없으면 힘을 못 쓰는 초월자고, 토생원은 싸움이 전공이 아니고.

게다가 그놈들의 부하가 몇이나 될지도 모르니, 나는 먼저 무신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대로 전쟁이 벌어지면, 고미가 있다고 해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거야.”

이어지는 나의 말에 천마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조께서는 꽤 재미있는 분이군요. 일신의 무위는 부족하나, 웅 노사에게 모든 걸 떠넘기지 않고 어떻게든 애를 써보는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음, 의외의 포인트에서 점수를 땄네.

그런데, 지금 그 말은 아랫사람한테나 할 법한 말 아닌가······. 사숙조라며······.

아니야, 이런 작은 문제는 신경쓰지 말자.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악몽의 지배자라는 초월자야. 이 녀석은 고미랑 네 번이나 겨루고도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까.”

본론으로 돌아가자 ‘악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천마의 눈이 전에 없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 악몽이란 자가, 정말로 웅 노사와 호각이란 말입니까?”

역시, 이 미친, 아니 무서운 손주께서는 이런 위험한 걸 좋아하시는구나.

만수왕이나 황금의 군주 얘기가 나왔을 때는 별 흥미를 안 보이더니······.

아니면 그 정도는 안 싸워봐도 대충 견적이 나온다, 뭐 그런 건가.

“흥!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자존심이 상한 고미가 노발대발하며 자신의 강함을 어필하자,

“하지만 노사께서는 이미 네 번이나 겨뤄 평수를 이루시지 않으셨습니까?”

겁 없는 손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팩폭을 퍼부었다.

‘괴, 굉장해.’

감히 고미에게 팩폭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네 이놈! 이번에 악몽을 만나면 반드시 이 몸이 한수 위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묵직한 팩트폭력에 당황한 고미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지만, 천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악몽이라는 자와 제가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고민해 보지요.”

지, 진심이냐. 고미한테 그렇게 일방적으로 져놓고, 악몽이랑 한 번 해보겠다고?

“흥, 작은 살쾡이! 그럴 수는 없다. 악몽은 너보다 몇 수는 위다! 살쾡이 할아범의 손주가 제 발로 죽는 것을 두고볼 수는 없느니라!”

“웅 노사께서 저를 단련시켜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우, 우웅!?”

“사숙조께서는 만류귀종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대가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리되면 웅 노사가 제 스승뻘이 되는 것인데, 노사에게 배운 가르침을 시험하겠다며 노사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

절묘하다. 어떻게 이걸 이렇게 받아치지?

“우, 우웅······. 그, 그것은······.”

아니나 다를까, 천마의 되치기에 당한 아기곰의 커다란 동공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사에게 배운 것으로 제가 악몽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노사의 강함은 증명되는 것이고, 제가 패한다 한들 노사께서 나서면 그만인데, 저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놈 자기주장 강한 것 보소······. 게다가 무공은 어떨지 몰라도 입심으로는 고미보다도 한 수 위다.

“고미, 어떻게 할 거야?”

나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아기곰은 봉식이와 이강혁 씨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나 가족들이 다치는 건 싫고, 그러려면 무신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흥, 알겠다. 그렇다면 너에게도 그 사악한 놈과 싸울 기회를 주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무신과의 연맹이 성립되는 순간,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다급하게 뛰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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