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4 고미는 어쩌다 꿀맛을 알게 되었나.
우, 웅 노사······?
왜 갑자기 웅 형에서 웅 노사가 되는 건데?
“웅 노사가 진짜 곰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해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후훗, 신경 쓰지 말거라. 진정한 곰은 그런 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천마의 사과를 받은 고미는 가볍게 솜방망이를 들어 위아래로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아마도 고미를 만난 당사자는 녀석을 ‘웅 노사’라 칭했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천마는 그 ‘웅(熊)’이 진짜 곰을 가리킨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거기에 노사라는 단어까지 썼으니, 웅 노사의 정체가 진짜 아기곰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여기까지는 십분 이해가 갔다.
웅 노사라는 단어를 듣고 ‘웅씨 성을 가진 신비의 고수’가 아니라, 진짜 아기곰을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나.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웅 노사가 진짜 곰이라는 걸 모르려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야 할 텐데······.’
사부나 조사부쯤 되는 사람이 직접 말해줬다면, 틀림없이 ‘웅 노사’가 진짜 아기곰이라는 걸 알았을 거다.
즉, 이런 오해가 생기려면 적어도 백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을 터.
‘설마······. 생각 없이 쳐본 개파조사 드립이 진짜는 아니겠지?’
실로 어처구니없는 결론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보다 타당한 추론이 없었다.
“고미, 어떻게 된 거야?”
결국 나는 생각을 멈추고 고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사자에게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한 이야기는 없으니까.
나의 질문에 고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원조 호구가 준비해둔 알사탕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후훗, 이 녀석의 개파조사가 나와 조금 인연이 있는 것 같구나.”
······.
진짜냐! 정말 천마신공의 정체가 천마신곰이었던 거냐고!
“작은 인연이라니요. 노사의 은혜는 하해와도 같습니다. 웅 노사가 아니었다면 신교의 백만교도는 모두 마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배, 백만······.
그냥 많다는 뜻이겠지? 진짜 백만은 아니겠지?
아니, 배경이 무협지 속 세상이라면 정말로 백만일지도 모르겠다.
“후훗, 아니다. 나는 그저 작은 가르침을 주었을 뿐, 그 가르침을 지금과 같은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순전히 살쾡이 할아범의 노력이니라. 네 실력을 보니 살쾡이 영감이 이 몸의 가르침을 아주 잘 물려주었나 보구나.”
“하하! 살쾡이라니, 정말로 웅 노사가 맞으시군요.”
심지어 천마는 자신의 개파조사를 살쾡이라고 부르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확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천마쯤 되는 사람을 살쾡이 영감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고미 밖에 없지.
무력도 무력이지만, 이 녀석은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
“저, 천마님, 죄송한데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던진 질문에, 천마의 입에서 상상조차 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사숙조.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사, 사숙조요?”
“웅 노조께서 저희 조사의 스승이나 다름이 없으시고, 사숙께서 웅 노조의 제자이시니, 사숙조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요.”
뭐냐고 이 부담스러운 호칭과 대화는······.
어쩌다가 졸지에 천마의 사숙도 아니고 사숙조가 되어버린 건데.
그거 ‘작은 할아버지’ 같은 호칭 아니야?
‘저는 그런 거 불편하니까 그냥 천마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그쪽도 편하게 수하 씨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말한다고 들을 리가 없을 것 같다고!’
물론 천마가 괴팍하고 고집이 세다는 건 클리셰에 불과하다.
검증도 없이 무협지라는 권위에 입각해 판단하는 건 상당히 비과학적 사고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아까 싸울 때 보니, 이 사람은 그 클리셰에 딱 맞는 사람인 것 같다고.
그래,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검증을 해보자.
괴팍하긴 해도, 고집은 안 셀 수도 있잖아.
“저, 그냥 평범······.”
“······.”
하지만 천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이 땅꿀을 파고 달아나는 흑암처럼 쏙하고 숨어버렸다.
‘무, 무서워.’
딱히 겁을 주려고 한다거나 화를 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눈이 무섭다고 눈이!
‘으으, 도저히 말을 못 꺼내겠네.’
민봉식과 가족으로 지내면서 ‘인간’에게 겁을 먹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숫제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와 눈이 마주친 느낌이다. 그것도 족히 일주일은 쫄쫄 굶은 호랑이.
“말씀하십시오, 사숙조.”
알겠네, 사손. 내가 생각을 바꾸지.
뭐 어떤가, 어차피 호칭 따위는 허례허식에 불과한 것을.
“아, 아니에요. 저는 김수하라고 합니다. 제가 천마님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사손의 이름은 백천이라 하옵니다. 성은 위가입니다. 편히 백천이라 불러주시지요.”
······.
미칠 것 같다. 사손이면 손자뻘 이잖아.
손자는커녕 자식도 못 본 총각에게, 손자가 생기다니.
그것도 이렇게 무서운 손자가······.
“후훗, 그 살쾡이 같은 녀석이 제자 하나는 잘 가르쳤구나. 이리도 예의가 바르고 실력도 뛰어나니, 저승에서도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바짝 얼어 붙어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나는 담담히 손자의 탄생(?)을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다.
뭐 어쩌겠나, 그런 거 싫다고 바락바락 우겨봐야 통할 것 같지도 않고, 통한다 해도 변하는 건 호칭 밖에 없는데.
‘그래, 어차피 모든 건 마음에 달린 거니까. 쓸데없는데 집착하지 말자.’
훗, 나 김수하, 이미 숱한 고난을 통해 이 정도 문제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됐지.
그때, 줄곧 말없이 서있던 이강혁 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데 곰 선생님, 선생님의 첫 번째 제자는 수하 씨가 아니었습니까?”
이강혁 씨의 지적에, 봉식이 역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네, 그런데 왜 천마가 널 노사라고 불러?”
고미는 웃으며 둘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후훗, 살쾡이 영감은 이 몸의 정식 제자는 아니었다. 다만 사정이 너무 딱하고, 좋은 선물을 받기도 하여 몇 가지 가르침을 내려주었느니라.”
말투 때문인지, 호칭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마는 곧장 고개를 돌려 봉식이와 이강혁 씨를 훑어보았다.
‘무슨 사이인데 웅 노사 님에게 반말을 하는 거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
표정근의 움직임으로 따지면, 지금 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의문’ 혹은 ‘호기심’이다.
하지만 상대를 위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봉식이와 이강혁 씨는 겁을 먹은 듯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역시, 나만 무섭다고 느끼는 게 아니구나.’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약간의 위안(?)을 얻고 있을 때, 천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웅 노사, 혹 이 두 분께서도 노사의 제자이십니까?”
“후후, 저쪽의 덩치 큰 녀석은 수하와 마찬가지로 나의 가족이다. 그리고 저 칼을 든 허수아비 녀석은 나의 부하이자 친구이니라.”
고미의 답을 들은 천마는 곧장 포권을 하며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추었고,
“7대 천마 위백천, 두 분 노사에게 인사 올립니다.”
고미는 나의 무서운 손자님에게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후훗, 저 허수아비의 이름은 이강혁이다, 그리고 봉식이의 이름은 민봉식이니라.”
음, 항상 의문이었지만, 왜 봉식이는 그냥 봉식이냐.
나야 ‘수하인 수하’니까 그렇다 치고. 죄다 별명으로 부르면서, 왜 봉식이만 그냥 봉식이냐고.
그렇게 잠시 호칭에 담긴 규칙에 의문을 표하고 있는 사이, 천마가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민 노사, 이 노사,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눈앞에 계신 분이 웅 노사라는 것을 알았다면 감히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으음, 왠지 뒤쪽에 ‘예의 바르게 대련을 신청했을 거다’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데.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저희도 고미를 처음 봤을 때는 꽤 놀랐거든요. 조사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 듣기만 하셨다면 당연히 못알아 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어쩌다 고미가 ‘웅 노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신의 말에 따르면, 대외적으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지만, 역대 천마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중 첫째는 본교의 완전한 신공이요, 둘째는 바로 웅 노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으음, 언제나 그랬지만······. 정말 굉장하군.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완전한 천마신공 다음으로 고미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비밀이 된 걸까.
“조사께서 후인에게 남긴 전언에 따르면, 웅 노사는 용을 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마물들을 퇴치하는 존재로, 조사께서 신공을 창안하기 위해 폐관에 들어가셨을 때 불현듯 나타났다고 하셨습니다.”
뭔가 살짝 변형이 되기는 했지만, 대충 고미에 대한 설명이 맞기는 하네.
어쨌든, 천마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천마신교의 개파조사는 신공의 완성을 위해 십만대산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교룡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했다.
“후훗, 그놈은 이 몸이 쫓던 사악한 도마뱀 일족 중 하나였느니라. 자신의 친구들이 이 몸에게 맞서고 있는 사이에 차원의 틈새를 타고 달아나 그곳까지 숨어든 것이지.”
고미가 짤막한 설명을 덧붙이자, 천마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웅 노사께서는 당시 무림의 삼대고수 중 하나였던 조사조차 당해내지 못했던 교룡을 단박에 참살하시었고, 기혈이 뒤틀려 목숨을 잃을 뻔했던 조사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들었습니다.”
신공의 탄생과 관련된 비사(祕史)를 요약하자면, 1대 천마는 정파인들의 탄압으로부터 신도들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며 고미를 붙잡고 매달렸고, 신비의 ‘웅 노사’는 그 마음을 갸륵히 여겨 몇 가지 가르침을 내려주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무협지에 나오는 흔한 기연에 가까웠다.
문제는, 천마가 그 기연을 얻기 위해 쓴 ‘아이템’이었다.
“후훗, 참으로 그리운 이야기구나. 그 살쾡이 영감 덕에 이 몸이 꿀맛을 알게 되었지.”
······.
던전에는 맛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서, 어째 꿀만 한 눈에 알아보나 했더니, 설마 이 녀석에게 꿀맛을 알려준 게 천마였을 줄이야.
고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천마신곰, 아니, 천마신공이 완성됐다는 이야기보다, 꿀을 바치고 배운 무공으로 천마신공이 완성됐다는 게 더 놀랍군.
우리가 듣기에는 꽤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천마는 마치 전설 속의 고수나 신선을 만난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조사께서는 끝내 그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하였고, 자신이 이해한 바를 후세에 남겨 계속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웅 노사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으라 전하셨지요.”
언제 들어도 굉장하군.
무협지에서 최강의 세력 중 하나로 언급되는 천마신교의 개파조사쯤 되어도 고미의 가르침을 단박에 이해하지는 못하는 거구나.
“호오, 그러했더냐? 네 녀석의 무공을 보니 이 몸의 가르침을 제법 잘 이해한 듯 싶었는데, 스승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네가 완성한 모양이구나. 참으로 훌륭하다.”
하지만 천마의 무공에 대해 고미는 보기 드물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노사의 가르침이 너무나 심오하고 깊어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나이다.”
반대로 천마는 언제 ‘본좌’니, ‘무의 화신’이니 하는 말을 떠들어댔냐는 듯 한없이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싸우다 말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거구나.’
나는 그제야 고미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전 자신이 가르쳐준 무공을 소중히 갈고 닦아 완성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언제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아기곰 입장에서는 당연히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이후 천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다시 입을 뗐다.
“웅 노사님, 불초 사손이 한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후훗, 좋다. 뭐든지 묻거라. 이 몸은 아주 기분이 좋으니 말이다.”
“사손이 신공을 완성한 이후 깨달은 바에 따르면, 그 속에는 틀림없이 소림이나 정파는 물론이고 세외의 무공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허나 어찌하여도 그 깨달음을 온전히 하나로 합치지 못하였는데, 어찌하면 노사처럼 진정한 만류귀종에 이를 수 있는 것 입니까?”
고미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천마의 표정은 정말이지,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이 사람이 무공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런 표정.
그 순간, 나는 드디어 무신을 부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타이밍이 왔음을 깨달았다.
[ 고미, 대답하지 마, 잠깐만 기다려줘! ]
하지만 전음을 보내기 무섭게 천마의 시선이 고미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왔다.
‘뭐야, 전음을 듣기라도 하는 것 같······.’
그리고는, 내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섬뜩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숙조,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냥 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