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3 웅 노사.
‘대체 뭐지? 최근에 새로 생긴 스킬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건 없다.
적어도 꿀태창에 새로운 스킬이 뜬 적은 없었다.
- 파지직, 파직.
하지만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 눈 앞에서, 고미의 새로운 필살기가 준비되고 있었으니까.
‘버, 번개?’
그렇다. 지금 고미의 왼손에는 새파란 전광이 일고 있었다.
‘버, 번개도 쓸 수 있었어?’
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히드라를 태워버린 화끈한 ‘불도장’은 분명 화염 계통의 능력이었으니까.
드래곤의 브레스에 맞아도 멀쩡하고, 알틴의 번개에 맞아도 솜털 하나 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번개도 쓸 수 있었다니······.
‘그래서 쏘르를 보고도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가?’
리벤저스를 본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영웅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체로 그린 몬스터와 쏘르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스틸맨을 제외한 다른 영웅에 대한 고미의 평가는 ‘약한 녀석들’이었다.
뭐, 온몸이 흉기에 S급을 넘어 초월자까지 꿀주먹 몇방으로 때려잡는 녀석이니, 괴력이 주무기인 그린 몬스터야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겠지.
실제로 고미가 날뛰는(?) 모습을 보면 그린 몬스터는 귀여운 수준이고.
즉, 그린 몬스터의 괴력이나 쏘르의 번개를 대단치 않게 여긴 것은, 자기도 같은 능력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게 분명했다.
반대로 스틸맨이나 로봇을 가장 좋아하는 건······.
‘자기가 쓸 수 없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번개까지 쓸 수 있을 줄이야.
이건 정말이지······.
‘너무 멋있잖아!’
이제 나도 번개나 화염 계통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건가?
다음에 새 스킬 익힐 때 꿀태창에서 꼭 뇌전 계통 스킬을 찾아봐야겠다.
번개다, 번개! 나도 이제 번개를 쓸 수 있는 거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미에게 시선을 돌리자,
- 키이이이잉!
오른손에서 익숙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간닷!”
이어서 고미가 자신의 왼손과 오른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번개와 푸른 섬광이 결합하며 번개를 머금은 푸른 구체로 변했다.
- 치지직······.
“그것이 네가 가진 최강의 초식이더냐?”
고미의 새로운 기술이 완성된 듯 하자, 가만히 기다리던 무신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훌륭하다. 상대가 필살기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다니······. 멋을 아는 사람이군.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 목걸이를 줄 수 있겠다.
“그렇다! 네 녀석도 무인이니, 적당히 상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이 몸이 가진 최강의 필살기로 상대해주마!”
“하하하! 좋다! 마물이라고는 하나, 진정한 무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참으로 마음에 든다!”
무신과 고미는 또다시 서로를 마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고,
“받아 보거라.”
나지막한 한마디와 함께 거대한 회색 장검이 고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춘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것은 번개보다 빨랐지만, 동시에 달팽이처럼 느렸으며, 이미 고미에게 닿아있는 것 같기도 했고, 한치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한 자루의 거대한 검이었다.
하지만 검이 움직임과 동시에 수만 자루의 도검이 나를 향해 날아드는 것 같았고, 어느 순간에는 온 천지가 거대한 한 자루의 검영(劍影)으로 뒤덮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이게 뭐지?’
환술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그것은 하나이자, 무한이었다.
검의 움직임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나에게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천마의 일검에 압도당한 내가 완전히 넋을 놓고 있을 때,
- 쾅!
전광을 두른 눈부신 청색 섬광이 거대한 회색의 검영과 맞부딪히며 굉음을 토해냈다.
- 쿠르릉!
이어서 고미의 새로운 빔이 무한하게만 느껴졌던 검영을 빠르게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하아아압!”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뇌전과 고미의 기가 뒤섞인 푸른 섬광이 천마의 검영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온 천지를 멸할 것처럼 엄청난 기운을 흩뿌리던 검영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하고 멍하니 고미와 무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하하하하! 내가 졌다!”
천마의 시원한 패배 선언으로 승부는 막을 내렸다.
* * *
하지만 승부가 끝났음에도,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아직도 천마의 일검이 보여준 기이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웅 형, 고맙소. 내 비로소 무의 궁극을 본 것 같은 느낌이오. 수백 년에 걸쳐 나에게 패배를 알려줄 무인을 찾았으나, 설마 그게 웅 형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소.”
우리가 정신을 차린 것은, 천마가 고미를 ‘웅형’이라고 부르며 포권을 하고 난 후였다.
아니, 그런데, 왜 갑자기 살갑게 구세요.
게다가 웅 형이 뭐야 웅 형이.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그걸 없앴지?”
“뭐야, 진짜로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끝났어?”
“마지막에 고미 교관님이 사용하신 스킬은 대체 뭐지?”
“보기에는 꼭 빔 같던데······.”
“번개 아니었어?”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열어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나는 그제야 흑곰덫이 완전히 부서져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고미와 무신, 그리고 자리에 있던 헌터들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색 벽은 어느새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흑곰덫이 파괴된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결계가 부서지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말도 안돼. 언제 부서졌지?’
고미의 빔과 천마의 검영이 부딪혔을 때? 아니면 그것보다 더 전인가?
무신의 초식이 보여준 환상에 압도되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후훗! 그것은 바로 이 몸의 웅왕빔이니라! 저 천마라는 녀석의 초식이 제법 강력하여 특별히 뇌전의 힘을 보태 보았느니라!”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언제나처럼 오만하고 해맑은 아기곰의 웃음 소리였다.
······.
빔을 쏘는 것만 해도 굉장한데, 거기에 번개를 보태는 게 그렇게 쉬운 거냐.
이게 무슨 비빔면도 아니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면 뚝딱 완성이 되는 거냐고.
내가 멍한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무신이 터벅터벅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고미와 싸움을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한 태도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웅 형, 웅 형을 도둑놈 취급해서 미안하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웅 형과 무(武)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소?”
이, 이 사람 보소. 왜 이렇게 넉살이 좋은데.
말투는 또 왜 이렇게 정중해졌고.
‘싸울 때도 화냈다가 웃었다가 죽이려 들었다가 오락가락하더니······.’
설마 주화입마에 빠져서 미친 천마라던가, 그런 쓸데없는 설정이 들어간 캐릭터는 아니겠지? 영 불안한데.
주화입마에 빠져서 미친 것도 치료가 가능한 건가?
그렇게 내가 천마의 정신 상태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고미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좋다! 너는 제법 신의를 아는 녀석인 듯 하니, 특별히 이 몸의 거처로 초대하마! 마침 위대한 이 몸도 네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느니라!”
* * *
이후 우리는 곰 교관님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헌터들을 뒤로 하고 무신과 함께 고미의 놀이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규어들을 본 무신은 당황한 듯 발을 멈춰선 채 몇 번이고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웅 형, 이것은 무엇이오?”
무신이 스틸맨의 피규어를 가리키며 질문을 던지자, 고미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자가 바로 스틸 맨이다.”
“아, 아까 전 웅 형이 존경한다던 그 영웅이 바로 이 자요?”
“그렇다. 너의 마지막 초식을 격파한 것도 위대한 스틸 맨의 기술이었지.”
“으음······. 혹시 내가 이 자를 만나볼 수 있겠소? 웅 형의 마지막 초식에 담긴 무리(武理)가 참으로 신묘하고도 괴이하던데, 한 번 직접 보고 가르침을 청하고 싶구려.”
······.
이건 또 무슨 대화냐.
천마와 천마를 쓰러뜨린 슈퍼 먼치킨 아기곰이 함께 빔에 대해 논하다니······.
‘어째 황당한 게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데.’
겉모습이 인간이라고 해서 방심했다.
갑자기 현대에 떨어진 천마와 고미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또 다른 방식으로 어처구니없는 대화의 연속이 될 게 뻔했는데.
“흠, 흠. 무신님, 그거보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할 얘기가 태산인데 스틸맨의 영웅담까지 설명할 틈이 없다고 느낀 나는 얼른 무신에게 안으로 들것을 권했고,
“음······. 다음에 나와 함께 스틸맨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를 보자꾸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테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스틸 맨의 위대함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아기곰은 영화 관람을 제의하는 것으로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속 친구들과 고미가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무신은 맞은 편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이는 마흔이나 넘었을까, 천 년을 살았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외모.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무협 영화에서나 볼법한 차림새까지······.
‘음, 막상 진짜 천마를 눈앞에 두니까 입이 잘 안 떨어지네. 어디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하지?’
고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
파워 레벨로 치자면 고미가 몇 수는 위지만, 수많은 소설에서 최강자로 나오던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뭔가 묘하게 현실감이 없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천마였다.
“웅 형, 혹 어디서 무공을 익히셨는지 물어도 되겠소? 아까 손을 섞을 때 보니 본교의 무공뿐 아니라 소림의 무공은 물론이고 세외의 무공까지 사용하시던데. 어찌 그리 다양한 무공을 동시에 익힐 수 있는 것이오?”
그의 첫 번째 질문은, 역시나 무공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나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응? 고미가 사용하던 게 진짜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이었단 말이야?’
웅기조식, 일지곰, 탄지곰, 대력곰강장, 허곰답보, 곰기······.
음, 그렇지. 모두 무협지에 나오는 초식이나 용어의 변형판이기는 하지.
그렇다고는 해도, 그게 정말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일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고미, 정말로 천마신교나 소림의 무공을 배운 거야?!”
나의 질문에 고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뭐야, 그럼 대체 뭔데.
이상한 건 그것 뿐이 아니었다.
무협지의 흔한 설정에 따르면, 여러 가지 심법이나 무공을 동시에 익히면 기혈이 뒤틀리거나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처럼 심각한 부작용을 겪게 된다.
뭐, 그 설정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원리가 진짜라면, 고미가 여러 가지 무공을 사용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마 역시 그 지점에서 의문을 느낀 걸 테고.
“그럼 뭔데?”
그 순간, 불현 듯 수다르 님의 동굴에서 고미가 처음 ‘곰기’를 보여주며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뭐, 뭐야 이거?」
「곰기다.」
「검기가 아니라?」
「그것은 이 몸의 위대한 권능을 보고 어줍잖게 흉내 낸 가짜이니라.」
······.
그때는 고미의 정체나 능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 이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녀석이 떠는 귀여운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서, 설마······. 네가 그 사람들을 가르친 거야? 그 사람들이 하는 걸 네가 따라한 게 아니라?”
이어지는 질문에 고미의 입가에는 또다시 오만한 미소가 번졌고,
“웅 형! 아니, 웅 노사!”
천마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두 눈을 치켜뜨며 소파 위에 앉아있는 아기곰에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