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1 무신의 정체.
‘어, 어째서 무신이 웅기충천을? 설마 무신이 가짜 고미인가?’
내 추측이 맞다면, 지금 나는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맞서야 할 적들 중 하나를 내 손으로 불러낸 거니까.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 내가 트롤짓을 한 건가?
어, 어떻게 숲속 친구들 최고의 책사인 나 수갈량이 이런 실수를…….
“참으로 건방지구나. 하찮은 미물이 변변치 않은 재주 몇 가지를 익혔다고 본좌에게 대적하려 들다니.”
하지만 게이트를 통해 빠져나온 그림자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니잖아……. 그런데 왜 웅기충천을 쓸 수 있는 거지?’
심지어 무신의 정체를 보고는 왠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무신의 정체는 바로……. ‘인간’이었으니까.
‘휴, 다행이다. 원숭이는 아닐까 걱정했는데.’
여태 정체가 밝혀진 초월자들의 종(種)을 읊어보자면, 용 둘, 호랑이 하나, 두더지, 토끼…….
거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대균열의 수호자는 아기곰이다.
상황이 이런데 마지막 하나까지 동물이면 ‘겨뤄봐요, 동물의 숲’ 같은 이름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지금까지 겪은 일이 있다 보니, 사실 ‘무신’이 원숭이는 아닐까 걱정했다.
이름이 ‘무신’이니까, 왠지 인간이랑 비슷한 기술을 쓸 것 같고, 그럼 인간과 신체구조가 가장 비슷한 원숭이나 침팬지, 고릴라가 아닐까 생각했거든.
아무리 그래도 초월자가 여섯이나 되는데, 그 중에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좀…….
그냥, 그렇다고. 내 기분이.
그렇게 무신의 정체에 까닭 모를 반가움과 의문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그가 허곰, 아니, 허공답보를 통해 유유히 허공을 거닐며 입을 열었다.
“호오, 본좌의 기세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이 다섯이라니, 현세에도 의외로 쓸만한 기재들이 있구나.”
나는 그제야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다섯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이강혁 씨, 봉식이, 문경준.
고미야 뭐 당연하고.
A급 상위 헌터들도 무릎까지는 꿇지 않고 어느 정도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무신의 위압 스킬은 A급 상위부터 S급 이상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만 해도 몸이 좀 저릿저릿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버틸만 하고.
‘웅기충천하고 비슷하지만, 효과는 훨씬 더 약한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한마디와 함께 그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하지만 본좌의 허락없이는 그 누구도 감히 본좌를 바라볼 수 없으며,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본좌 앞에 설 수도 없으니.”
- 쿠웅…….
또 한 번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무형의 기운이 퍼져나가며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윽!’
역시, 초월자는 초월자다 이건가.
‘그래도 고미의 제자인 내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 해피곰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잔여 포인트 : 2821 >
< 웅혼한 기상(F) 스킬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F -> S >
위압 면역 스킬의 등급을 상승시키자, 온몸을 쇳덩이처럼 짓누르고 있던 기이한 기운이 약해지며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호오……. 네 놈은 무엇이냐? 일신의 무위는 하찮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기(氣)가 네 놈을 보호하고 있구나.”
다시 한번 기세를 발산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모습에, 무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본좌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을 터, 감히 본좌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무신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 순간,
- 챙!
다리 근처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나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지금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다리를 지켜준 건……. 고미였다.
“네 이놈! 감히 이 몸의 가족이자, 제자인 수하에게 무형곰기를 날리다니! 이 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이 몸의 가족에게 손을 댈 수 없느니라!”
대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무신이 나에게 무형의 검기를 날렸고, 그것을 고미가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감히 하찮은 미물이 두 번이나 본좌의 체면을 구기다니…….”
- 챙! 챙!
무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달아 두세 번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고, 천하를 모두 발아래 둔 듯 오만하던 무신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무래도 단순한 미물이 아닌 모양이구나. 천지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마물이더냐?”
자, 잠깐 아기곰이 말을 하는데 안 놀라는 거야?
“네 이놈! 위대한 이 몸에게 마물이라니!”
“하지만 본좌의 검기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그 강함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을 터. 미물이라 한들 그 무위는 결코 일천하지 않구나. 좋다, 죽이기 전에 이름 정도는 들어주마. 이름을 말해 보거라.”
“흥! 악당에게 밝힐 이름은 없다! 네 녀석의 이름부터 말해보거라!”
괴, 굉장하군.
강한 건 둘째치고, 아기곰이 말을 하는 데다 따박따박 자기 말을 받아치고 있는데도 조금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어.
실력은 몰라도 저 체통있는 모습만큼은 역대 최강이다.
게다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고미의 정체까지 맞췄어.
‘대체 뭐지, 이 사람?’
“참으로 오만하구나, 좋다. 본좌가 오랜만에 속세에 발걸음을 하게 만든 존재이니, 특별히 위명 정도는 알려주도록 하마.”
이어서 무신은 아주 천천히, 위엄있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본좌는 마(魔) 중의 마요, 삼세(三世)를 통틀어 유일하게 스스로를 지존이라 칭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이며, 인세에 강림한 용이자, 무의 화신이다.”
정신력이 굉장하군.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어쨌든, 여기까지만 들어도 능히 저 사람의 정체가 짐작이 간다.
마중마니 마중지왕이니 하는 건……. 천마의 단골 대사니까.
“우, 우웃!”
바로 그때, 고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서며 꼬리와 귀가 가볍게 움찔거렸다.
음, 아기곰 관찰일지에 따르면 저 반응은…….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군.’
틀림없다.
‘우웃!’이 붙는 걸 보니, 200% 확실하다.
아무리 그래도 적을 멋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니…….
“세인들은 본좌를 천마라 불렀으나, 이미 정,사,마를 통틀어 무의 극의를 깨달은 본좌에게 더이상 천마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니, 스스로 무신이라 칭하였다.”
“오, 오오!”
급기야 천마의 자기소개에 감탄한 순수한 아기곰은 연신 꼬리를 흔들며 솜방망이를 두드려댔다.
고미, 그러지 마…….
일단은 적이잖아, 적.
‘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지.’
하지만 천마의 자기소개에 감동을 받은 고미의 반응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흐, 흐흠! 네, 네가 먼저 예의를 갖추었으니, 이 몸도 예를 갖추는 것이 위대한 곰에게 걸맞은 행동이겠지!”
불안하다, 불안해.
틀림없이 무신의 자기소개에 자극을 받아서 자기도 뭔가 멋진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 몸은 곰 중의 곰이요, 인세에 강림한 위대한 수호자이자, 정의의 화신이다!”
‘하아, 고미…….’
멋있어 보이는 거라면 일단 따라하고 보는 녀석이라 대충 짐작은 했다만, 설마 저 대사를 그대로 따라할 줄이야.
“사람들은 위대한 이 몸을 위대한 수호자라고 불렀으나, 으, 음…….”
하지만 아쉽게도 뒷부분은 어떻게 변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이 막혀버리고 말았으니…….
“으……. 으음!”
보송보송 솜털이 돋아난 솜방망이로 동글동글한 머리를 감싼 채 깊은 고민에 빠진 아기곰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반쯤 넋이 나가 버리고 말았고,
“네 놈이……. 본좌를 능멸하는 것이냐?”
상대가 자신을 조롱했다고 생각한 무신의 눈에는 점점 더 짙은 살기가 감돌았다.
‘음, 사실은 정반대인데…….’
고미가 누군가를 따라할 때는, 그게 정말로 멋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다.
조롱이나 상대를 화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단 말이지.
그렇다고 이 와중에 ‘우리 애가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그쪽이 멋있어서 순수하게 따라한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일단 한 판(?) 시원하게 끝나고 나면 오해를 풀어드려야겠네.
“간만에 본좌를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 대가로 목숨만은 살려주려 했다만…….”
- 쿠궁, 쿠궁…….
무신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부르르 떨리고, 하늘에서는 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됐다, 그만 무로 돌아가거라.”
이어지는 짤막한 한마디에 폭풍이 휘몰아치며 수천 개에 달하는 검기가 사방에서 고미를 덮쳤다.
“하압!”
그러나 고미는 가벼운 솜방망이질 한 번으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던 무수한 검기를 모조리 부숴버렸다.
‘괴, 굉장해.’
검의 달인과 감각 강화가 극대화된 탓일까, 어렴풋하게나마 무신의 초식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고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렇게 압도적인 기를 일시에 방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수천 개에 달하는 검기 하나하나를 모두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컨트롤 능력까지.
‘흑암하고는 비교도 안돼…….’
물론 거대화한 흑암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수시로 독액을 뿌려대고 저 슈퍼 아기곰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받고도 몇 번이나 재생을 해댔지.
‘웅왕빔’에 의해 허탈하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S급과 A급 헌터들의 헌터 수십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퇴치할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지금 무신의 전투 스킬과 비교하자면…….
‘조잡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기교가 부족하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천 개의 예리한 검기, 압도적인 힘과 속도, 물샐틈없이 치밀한 움직임까지.
‘어쩌면 다웅이보다 강할지도…….’
물론, 고미보다 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고미의 강함은 그 끝이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다웅이보다는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다.
“흥! 고작 이 정도 곰기로 이 몸을 쓰러뜨릴 수 있다 생각했느냐?!”
수천에 달하는 검기를 박살낸 고미가 솜방망이를 휘두르며 외치자,
“하, 제법이구나.”
무신 역시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하냐?”
말을 마친 무신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손가락만한 크기로 부서진 수만 개의 검기가 바람에 흩날린 꽃잎처럼 불규칙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받아낼 수 있겠느냐?”
자잘하게 부서진 검기의 파편 중 일부가 어지럽게 흩날리고, 또 일부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상하좌우 할 것 없이 모든 방향에서 고미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갔다.
멀리서 보고 있자니 수만 개의 꽃잎이 춤을 추는 듯 한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와아…….”
신기에 가까운 천마의 무공에 자리에 있던 헌터들의 입에서도 일제히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내 눈에,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고 대단한 무공이 아니었다.
아니, 아름답고 대단하기는 한데, 너무 눈에 익은 무공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이상해, 저건 분명 만천화웅인데…….’
이강혁 씨 역시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웅기충천에 만천화웅까지……. 대체 뭐지?’
그렇게 고미와 무신의 무공이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고 느끼고 있을 때,
“흥! 감히 이 몸에게 기곰술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냐!”
초콜릿색 솜뭉치가 물찬 제비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본래 천마의 것이었던 수만 개의 검기가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처럼 고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고,
“받아랏! 건곰대나이!”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천마를 덮쳤다.
- 쾅!
‘거, 건곰대나이라니…….’
아직도 위대한 곰의 이름이 들어간 초식이 남아있었던 거냐…….
언제나 그렇지만 어이없는 네이밍 센스군.
그러나 황당한 네이밍 센스와 귀여운 외모와는 별개로, 무신의 검기를 자신의 것처럼 움직여 돌려보내는 고미의 실력만큼은 실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리에 있던 헌터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린 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고미를 바라봤고, 심지어 문경준마저 자신의 주군인 무신이 아닌 갈색 솜뭉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그때…….
“하하하하하하! 설마하니 천 년 만에 만난 가장 강한 상대가 한낱 능소니일 줄이야!”
자욱한 연기 사이로 통쾌한 천마의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하하하!”
그러던 어느 순간, 천마의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기고,
“한데, 어떻게 능소니 따위가 본교의 신공을 도둑질한 것이냐?”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한 그의 음성이 귀를 때렸다.
잠깐, 지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