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 대균열, 수호자, 그리고 아기곰.
[ 수호자의 숫자가 많아지면 문제도 많아질 수 있다는 말, 기억하느냐? ]
고미의 말에 나는 기억을 더듬어 관리자를 처음 만난 날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수호자의 숫자가 많아지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그만큼 커져요. 이미 몇 번이나 그랬고요.」
그래, 그랬지.
고미가 그렇게 우울해했던 이유는, 그 ‘몇 번’이나 일어났던 일에 관련된 건가.
그나저나, 더하기 빼기는 두 자릿수만 되도 틀리기 일쑤면서, 기억력은 정말 좋구나.
여태 먹었던 음식들을 전부 기억하는 것 하며, 남이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까지······.
역시 고미는 문과였나보다.
‘곰을 뒤집으면······.’
실패.
본론으로 돌아가자.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그런지 드립력이 감소했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의 질문에 고미는 페달을 밟던 발을 멈추고,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 본래 대균열의 수호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래, 꼭 리벤저스나 위대한 이 몸과 너희들처럼, 정의로운 영웅들이 모인 집단이었지. ]
지금 고미의 표정은 언제나 해피 바이러스를 뿜어대던 솜뭉치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진중했다.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본래 대균열의 수호자는 모두 일곱 명으로, 일곱 개의 가문에서 각각 한 명씩을 선발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고미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다.
[ 일곱 개의 가문과 수호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힘과 권능이 주어졌느니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이 몸만큼 강력한 수호자는 없었지만, 각자가 가진 능력을 활용해 다같이 대균열을 지켜나갔지. ]
음, 그 와중에도 자신의 강함을 어필하다니, 역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아기곰이군.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말았다. ]
내분이 일어났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대균열의 수호자씩이나 되는 존재들이 내분을 일으킨 이유.
“어째서?”
[ 시작은 괭이 놈들과 도마뱀 놈들이었다. ]
또 용이랑 호랑이냐. 이것들을 진짜 싹 다 잡아서 꿀주먹 맛을 보여주든가 해야지.
고미가 태어나기도 전이라면······. 대체 몇 년 짜리 트롤이냐 이건.
수천 년? 수만 년? 답도 안 나오는 수준이고만.
[ 그 간악한 놈들은 대균열을 지키는 것보다, 수호자의 일족에게 주어지는 권능과 힘에 빠져들었다. 결국에는 수호자가 되지 못한 괭이 일족과 도마뱀 일족의 일부가 다른 차원으로 달아나 초월자가 되거나 그곳의 지배자가 되는 일까지 벌어지기 시작했지.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호자가 되는 것보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 그곳의 왕이 되기를 원하는 녀석들이 더 많아졌느니라. ]
‘고미가 호랑이와 용을 싫어하는 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사연이 있었군······.’
아마도 만수왕이나 황금의 군주는 그때 수호자의 의무를 저버리고 달아난 일족의 후예겠지.
[ 그때 달아난 비겁한 놈들 중 일부는 다른 차원의 산에 찾아가 그곳의 지배자가 되기도 했고, 바다에 가서 그곳의 왕이 되기도 했느니라. 결국 이 몸이 그 녀석들을 모두 쫓아냈지만 말이다. ]
그러니까, 고북 대왕 이전에 용왕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용과, 수다르 님 이전에 지리산을 지배했다던 호랑이가 그 수호자 일족의 일부였던 건가.
‘전래동화 같은 느낌이네.’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같은 상투적인 문구로 시작해서 ‘위대한 곰이 사악한 용과 포악한 호랑이를 물리치고, 마침내 숲속과 바다에는 평화가 찾아왔답니다’라는 결말로 끝나는.
[ 그 일을 계기로, 일곱 개의 가문 뿐 아니라 수호자들 사이에도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괭이와 도마뱀들은 자신의 일족을 처벌하는 것에 반대했고, 뻔뻔하게도 대균열의 수호자인 우리가 어째서 이 정도도 누리지 못하느냐는 헛소리를 해댔느니라. 수호자 일족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그들을 지켜주는 당연한 대가라면서 말이다. ]
이 대목에서 고미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커다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 정말로 한심한 일은, 나머지 수호자들 중에도 그 말에 현혹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
그렇겠지.
수호자가 되지 못한 사람도 초월자가 되거나 다른 세계의 군주가 될 정도니, 수호자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거다.
그런 힘을 가진 존재가 한번 권력과 힘의 맛을 봤다면, 무슨 말을 해도 먹힐 리가 없지.
이어서 고미는 솜방망이를 바르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단 한 명, 기꺼이 그 희생을 받아들인 자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긍지 높은 수호자였고, 나머지 여섯은 그자를 중심으로 대균열을 지켜야 한다는 쪽과, 더이상 그런 의무에 구속되지 않겠다는 쪽으로 나뉘었느니라. ]
음, 이 녀석의 머릿속에서는 아마도 이쪽이 스틸 맨(=고미) 포지션이겠군.
“그럼 그 수호자가 패배한 거야?”
봉식이가 질문을 던지자, 고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 결과는 이 몸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싸움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그자를 떠났고, 그는 홀로 남아 대균열을 지켰다. 친구들이 왜 떠났는지는······. 이 몸도 알 수가 없구나. ]
이야기의 결말은,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와는 달리 상당히 비극적이었다.
[ 홀로 대균열을 지키던 위대한 수호자는 결국 그곳에서 숨이 다했지. ]
본래 일곱 명이서 지켜야 하던 곳을 혼자서 지켰으니, 그 끝이 그리 좋지 않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결말이었다.
처음부터 홀로 수호자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만큼 강했다면, 내분 따위는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고미가 꿀주먹으로 악당들을 교화하듯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나는 그제야 고미가 왜 그렇게 우울해했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깨달았다.
아마도 내분이 일어나고, 자신의 편에 섰던 사람들마저 모두 떠나고, 쓸쓸히 대균열을 지키다 죽어갔다는 그 이름 모를 수호자의 모습과 스틸 맨을, 그리고 자신을 겹쳐 보았겠지.
“그 사건 때문에 수호자는 한 명으로 한다는 규칙이 정해진 거야? 그 한 명이 너고?”
[ 그렇다. ]
고미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그럼 너는 그 수호자의 후손인 거야?”
[ 아니다······. ]
이후 고미는 아주 천천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 그와 이 몸은 아무런 관계도 없느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두 명의 수호자가 있었고, 모두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일곱 수호자의 싸움의 여파로 대균열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고, 그 후로 대균열 근처에서 이런 저런 생물이 ‘생겨나는’ 일이 발생했다고 했다.
부모도, 가족도 없으며, 그 근원조차 알 수 없는······. 그래, 꼭 고미처럼 외롭고 쓸쓸한 존재들이.
더욱 슬픈 것은, 고미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이상 다른 존재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듯, 단 하나의 생명체도 생겨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처음부터 가족이 없다고 했던 거구나······.’
대체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고미 이후로 다른 생명이 생겨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고미가 너무나 완벽한 존재라서?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렇게 이런 저런 추론을 해대고 있을 때, 고미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이 몸은 대균열 근처에서 생겨난 평범한 곰이었다가, 수호자가 된 것 뿐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바로 위대한 이 몸의 숙적이니라. ]
······.
아니, 아니야. 드립칠 분위기가 아니지만, 그건 정말 아니라고.
평범한 시절에도 와이번 때려잡고 다녔다며, 누구도 그걸 ‘평범한’ 곰이라고 말하지는 않아.
날 때부터 천하장사인 곰이라고 해도 그렇게는 안 된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 돋네.’
게다가 결론이 뭔가 이상하다.
이야기의 흐름상, 당연히 고미가 그 수호자의 후예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그 수호자의 후손이 너의 적이라는 거야?”
[ 그 이름 모를 수호자가 숨이 다하자, 그의 아들은 나머지 여섯 명의 수호자와 그 일족들을 찾아내 모조리 죽여버린 뒤 종적을 감추었다. 괭이 놈들과 도마뱀 놈들의 숫자가 그리 적은 이유는 이때 대부분의 일족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니라. ]
사, 살벌하군.
게다가, 같은 수호자인데 혼자서 여섯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단 말이야?
하지만 진짜 놀랄 이야기는, 그 다음에 이어졌다.
[ 그자의 이름은 너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
무슨 얘기지? 초월자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는데 언제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수호자의 후손이라니.
그러나 이어지는 고미의 말에, 나는 처음부터 그 녀석의 이름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엄마와 아빠가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은 바로 그 녀석 때문이니 말이다. ]
“설마 악몽의 지배자가······. 그 수호자의 자손이야?”
부모님이 쓰러졌던 건 영혼 수확자라는 악몽의 지배자의 수하 때문이었고, 수다르 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자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후 고미는 다른 초월자라면 모를까, 악몽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대균열의 수호자라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자신의 숙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 그렇다. 마지막으로 녀석과 일전을 치렀을 때, 위대한 이 몸마저 목숨을 잃을 뻔했지. 하지만 녀석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아주 오랫동안 몸을 숨겼느니라. ]
그 순간, 머릿속에 온갖 추측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너랑 닮은 그 가짜를 만들었다는 그 세 번째가 악몽의 지배자 아니야?”
[ 그럴 리가 없다. 애꾸눈 괭이 놈과 도마뱀들의 왕에게 있어 악몽은 조상의 원수, 악몽에게 있어 그들은 미처 죽여없애지 못한 원수의 후예인데, 어찌 그들이 손을 잡을 수 있겠느냐? 게다가 놈은 이 몸과 벌써 네 번이나 일전을 벌였지만, 단 한 번도 누구와 손을 잡은 적이 없느니라. ]
······.
네 번? 이 슈퍼 먼치킨이랑?
흑암을 상대로도 관심을 받고 싶어서 필살기 연출까지 해가면서 잡고, S급 이상의 몬스터와 헌터들을 떡 주무르듯 솜방망이로 조물거리는 이 녀석이랑,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을 싸워서 살아남았다고?
‘미, 미친 건가.’
강한 것도 강한 거지만, 이 슈퍼 아기곰과 네 번이나 싸울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무섭다.
봉식이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천하무적 곰돌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졌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그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나와 봉식이의 표정을 본 고미는 다시 한 번 솜방망이를 바르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데 고미, 뭔가 이상하잖아. 복수가 끝났으면 그걸로 끝 아니야? 왜 너하고 적이 되는데?”
그때, 봉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스럽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나 역시 봉식이와 같은 지점에서 의문을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꼭 몇 조각이 빠진 퍼즐처럼,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으니까.
[ 그놈의 목적은 대균열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차원이 뒤섞이면, 너희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워지겠지. 위대한 이 몸이 그런 짓을 하도록 두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 ]
그 한마디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희생시켜 지킨 평화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고미를 희생시켜 지킨 평화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행동에도 동의하는 건 아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여 복수를 완성하는 시점에, 이미 그건 복수가 아닌 단순한 살육에 불과하니까.
“그럼 빨리 우리가 강해져야겠네. 우리가 강해져서 널 도와주면, 이번에는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거잖아.”
이야기를 마친 고미가 다시 페달을 굴리기 시작하자, 봉식이가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다 같이 대균열을 지키면 되는 거지. 우리는 널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니까.”
이어지는 나의 말에, 페달을 굴리는 고미의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음, 앉은 채로 꼬리콥터를 돌리다니, 이건 이거대로 진귀한 광경이군.
[ 후훗, 그렇다. 곰벤져스 친구들이 있는 이상, 이 몸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다시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니라. ]
이, 이럴 수가.
고미와 숲속 친구들이 아니라 곰벤져스라니······. 곤란한데.
현대 사회는 지적 재산권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고.
‘음, 이제와서 이런 말 하기에는 너무 늦었나?’
행복하게 페달을 굴리는 아기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떻게 하면 다른 초월자와 강력한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지 고민했다.
고미가 나를 만나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처럼, 악몽 역시 더욱 강력해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녀석을 확실히 처리하고,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군이 더 필요하다.
‘앞으로도 바쁘겠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저스티스의 빌딩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응?’
그리고 빌딩의 입구에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거구의 천사가 서 있었다.
‘뭐지, 삼 일 내로 점혈을 풀면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아직 하루 밖에 안 지났잖아. 설마 무신이 고미의 점혈을 푸는데 성공한 건가?’
그의 곁에는, 고미에게 점혈을 당했던 무신의 첩자, 임준우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