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8 아주 오래된 이야기.
내가 보기에 고미는 단순히 스틸맨의 죽음 때문에 슬퍼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위대한 히어로의 죽음이 커다란 상처가 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본 뒤에 기력을 되찾은 걸 보면,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우울해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우울해진 거지?’
이에 나는 곰곰이 고미가 했던 말과 행동을 되짚어보았다.
내 가설이 틀렸다면, 어디서부터 잘못 짚었고, 정확한 원인이 뭔지 알아야 하니까.
고미가 이렇게 기운이 없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 순수한 영혼이 또다시 우울한 아기곰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이 녀석의 정신세계를 조금 더 면밀히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정신 건강도 치료보다는 예방이 중요한 거니까.
「 스틸 맨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던 진짜 영웅이 아니더냐! 정의의 용사가 왜 죽어야 하는 것이냐! 리벤저스 친구들은, 리벤저스 친구들은 어디에 있었느냐! 」
고미의 발언에서 내가 초점을 맞추었던 것은 ‘스틸맨이 죽었다’, ‘스틸맨은 진짜 영웅이다’라는 발언이었다. 원체 ‘위대한 곰’, ‘영웅(英熊)’같은 단어에 집착하는 녀석이니, 자연스레 나도 생각이 그쪽으로 간 거지.
‘잠깐만······.’
하지만 생각해보니, 고미가 ‘위대하다, 웅장하다’ 못지 않게 좋아하는 다른 말이 있었다.
‘가족, 친구······.’
포인트는 ‘정의의 용사가 왜 죽어야 하냐’가 아니라 ‘친구들은 어디 있었냐’에 있었던 건가?
리벤저스 친구들이 스틸 맨과 끝내 화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스틸맨이 죽은 거라고 생각해서?
그 순간, 새로 생긴 스킬의 이름과 설명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 고미류 소환술 – 숲속 친구들, 모여라 (Gomi) >
- 아무리 강력한 영웅들이라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거대한 악에 맞설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은 거야. 반대로 친구들과 화해하지 못해서 패배했고, 그것 때문에 스틸 맨이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고미가 본 리뷰 영상에서 얼마나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는지는 몰라도, 만일 고미가 그 영상의 일부만을 봤다면?
그래서 ‘이번 작품을 끝으로 스틸맨은 기나긴 싸움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같은 멘트를 들은 거라면?
‘앞뒤가 맞아.’
물론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지만······.
그건 역시 고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겠지.
“후훗, 위대한 이 몸이 잠시 상심하였다고 하여 이렇게 모여주다니, 참으로 고맙구나! 이 몸은 그 마음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
내가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을 때, 어느새 원기를 회복한 아기곰은 꼬리를 뱅글뱅글 돌려대며 시원하게 꿀콕을 들이켰다.
“후훗, 아웅이, 참으로 훌륭한 맛이구나. 가게에서는 미안했다.”
고미가 콜라를 거절한 것을 사과하자, 아웅이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잔을 들었고,
“아우웅!”
이어서 다웅이도 두 손으로 잔을 들어올리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다웅!”
음, 꿀콕으로 도원결의를 맺는 아기곰 삼형제라니······.
그런데, 어째서 본체와 분신이 의기투합해서 의형제 같은 걸 맺는 거냐.
뭐, 분신이라기에는 이미 너무나 별도의 생명체가 된 데다가, 저 녀석들을 단순한 분신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상하잖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그림이라고.
“아이구, 우리 고미가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요?”
집안의 활력소인 막내가 활기를 되찾자, 어머니는 얼른 고미를 덥석 안아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공중그네를 태워주었다.
“후, 후훗! 엄마도, 아빠도, 봉식이도, 위대한 이 몸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 걱정이 많았구나! 하지만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거만해진 아기곰이 모습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입가에도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어차피 쉬기로 한 거 우리 고미랑 같이 소풍이라도 갈까?”
아버지는 여전히 조금 걱정이 되셨는지 다시 한번 소풍을 제안했지만,
“우웅······.”
아직 정식으로 특별교관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없는 아기곰 선생께서는 잠시 고민하다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이제 막 정의의 용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녀석들이 너무 비실비실해 걱정이니라. 그 비실이들을 가르칠 위대한 이 몸이 혼자서 놀러 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나들이는 다음에 가는 것이 좋겠구나. 대신에 다음에 소풍을 갈 때는 이 몸이 직접 만든 주먹밥을 대접하도록 하마!”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조금 미안했는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인 주먹밥을 대접하겠노라 덧붙였다.
“알았어, 그럼 아빠도 그 날은 엄마랑 고미한테 맡기고 맛있게 먹기만 할게!”
“오구오구, 우리 고미는 일도 열심히 해요? 어쩜 이렇게 성실하고 예쁠까아?”
그런 고미의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이제 막 슬픔에서 벗어난 아기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을까.
어머니는 또다시 녀석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주었다.
“후훗! 당연하지 않느냐! 위대한 이 몸이 놀기만 한다면 인간들은 또다시 위기에 처할 테니 말이다!”
말을 마친 고미는 어머니의 품에서 풀쩍 뛰어내려 나와 봉식이를 향해 솜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손짓을 해댔다.
“자, 가자! 수하, 봉식이! 허수아비와 그 부하들이 위대한 이 몸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음, 다시 텐션이 올라갔군.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텐션이 높아진 것 같다.
불안할 정도로 텐션이 높군.
보통 이럴 때는 상상도 못한 짓을 벌이곤 하는데 말이야.
그래도 풀이 죽어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너무 신이 나서 실수를 하면, 내가 수습하면 되지 뭐.
“아웅이, 다웅이, 이 몸이 정의의 용사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동안 너희들도 엄마 아빠를 잘 지키고 있거라!”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형제(?)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 고미는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문을 열고 나갔다.
* * *
집을 나선 나는 곧바로 게이트를 열어 가게 뒷마당에 뚫어놓은 토끼굴로 이동했다.
집에서 저스티스로 가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가게에서 저스티스는 10분이면 충분하니까.
첫 번째 토끼굴은 가게에, 두 번째 토끼굴은 집에.
가게를 환승역 삼아 저스티스 빌딩으로.
이걸로 출퇴근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여 업무 효율··· 아니지, 아니지, 여가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훌륭해, 최고다.’
인간 김수하, 나는 지금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무실 가면 커피 타달라고 해야지. 고오급 드립 커피로다가.
아아,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내 인생에 이런 아름다운 날이 찾아올 줄이야.
“흐음······. 수하, 가게 뒤에 공간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보다는 헬기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지 않겠느냐?”
뒷마당에 도착한 고미는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너무 빠른 이동에 작은 불만(?)을 표했다.
음, 아무리 봐도 이 게이트가 훨씬 더 편한데 말이야. 이건 출퇴근 계의 혁명이라고.
물론 헬기 출퇴근도 상당히 꿈과 희망이 가득한 멋진 대안이기는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집 근처에 헬기가 왔다 갔다 하면, 사람들이 불편하잖아. 너무 커서 아무 데나 내릴 수도 없고, 소리도 너무 커서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
나도 마음 같아서는 헬기를 불러주고 싶지만, 매일 같이 헬기가 뜨고 내리면 이웃들에게 여간 민폐가 아닐 테니, 어쩔 수가 없었다.
층간 소음으로도 살인 충동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 아침저녁으로 헬기라니, 그건 안되지.
“으음, 그렇구나. 너희 인간들은 이 몸처럼 듣기 싫은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지는 못하니 말이다.”
인간들이 불편해한다는 말에 공중도덕을 중시하는 곰성이 훌륭한 아기곰께서는 못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이며 G-3에 올라탔다.
“가자꾸나.”
“응? 오늘은 내 어깨에 안 타고 갈 거야?”
고미는 내 머리 위에서 초코바를 먹으며 이동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처음에는 부스러기가 떨어질까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어깨에 뭐가 안 올라가 있으면 어색한 수준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의문을 느껴 던진 질문이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첫 제자를 받는 날이니, 조금 더 위엄있는 방식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늘 너의 머리 위에만 있다면 아무래도 이 몸의 위엄에도 조금 손상이 가지 않겠느냐?”
······.
내 어깨 위에 올라타서 이동하는 것보다 페달 카트를 타고 다니는 편이 위엄은 더 없어 보일 것 같은데.
대체 이 녀석의 머릿속에서 ‘위엄’이라는 단어는 어떤 식으로 정의되어 있는 걸까?
“자, 가자꾸나. 그 녀석들도 이 멋진 가마를 보면 이 몸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한번 느낄 것이다.”
여하튼, 고미의 그 알쏭달쏭한 논리에 동의한 나는 순순히 녀석의 뒤를 따라 걸어갔고,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야, 저거 뭐냐?”
“왜 곰이 페달 카트를 타고 가?”
“뭐지? 저거? 펫인가?”
“무슨 공연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서 황금색 페달 카트를 모는 아기곰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보거라, 벌써부터 이 몸에게 시선을 빼앗긴 인간들이 이렇게 많지 않느냐? ]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아기곰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느긋하게 페달을 밟았다.
그렇군. 더 많은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면 그게 더 위엄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굉장히 새로운 사고방식이군.’
하긴, 누가 자기를 쳐다보기만 해도 그게 자신의 위대함을 알아봐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니······.
그렇게 고미의 정신세계에 대해 또 다른 지식을 얻은 나는 빠르게 그것을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다.
“그런데 고미, 스틸 맨이 죽은 걸 알고 왜 그렇게 슬퍼한 거야?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죽은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는 출근 시간을 이용해 아기곰의 정신 건강을 위한 문진에 나섰다.
일단 회사에 출근하고 나면 외문 제자들을 받고, 그 사람들을 가르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시간은 최대한 알뜰하게 써야지.
“그렇다. 봉식이 녀석이 그 푸릇푸릇한 알사탕 같은 녀석이 쳐들어오기 전에 슈퍼 솔져와 스틸 맨이 다투고 리벤저스가 분열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봉식이에게 눈을 흘겼다.
“으, 으음······. 미안해. 전편이 워낙 많다 보니 간단하게 요약한다는 게 그만 뭔가 오해를 하게 했나 보네.”
아니지, 요약은 잘했다.
문제는 고미가 그 싸움의 결과로 스틸 맨이 죽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과정이다.
보통 ‘스틸맨이 죽었다=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죽었다’라는 식으로 곧장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까지 우울해지지는 않을 테니까.
‘틀림없이 뭔가가 있어.’
‘인지행동 치료’에서는 감정이 아무런 이유 없이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특정한 감정의 밑바닥에는 어떠한 생각이 깔려있고, 이 생각은 보통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불필요한 설명을 모두 덜어내고 요점만 말하자면, 직접 경험, 혹은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한 사고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사건의 해석에 영향을 미쳐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고미가 스틸 맨의 죽음을 알게 되자마자 친구들과의 불화가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 혹은 관련된 경험이나 사건이 있을 거라는 얘기다.
‘고미는 여태 늘 혼자였다고 했지······.’
직접 경험은 아니다.
그렇다면, 고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언가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게 – 고미 한정- 곰 연구가인 나의 결론이었다.
“고미,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어? 혹시 뭔가 비슷한 경험이 있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거나.”
나는 넌지시 고미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 우, 우웅······.]
나의 질문에 고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뭔가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인가?’
[ 수하, 관리자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
그리고는, 대답 대신 나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이야기?”
[ 대균열의 수호자는 오직 한 명뿐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어째서 그런 규칙이 생겼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