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5 자꾸만 ‘밸’이 줄어든다.
“흠, 흠. 노……. 노인국을 만나게 해다오.”
그게 왜 부탁이야, 원래 만나기로 되어있던 거잖아.
이 츤데레 양반이……. 그냥 들어주기는 민망하니까 괜히 그러는 거고만.
전에는 노인국 씨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면서 땅속으로 도망치더니, 이분도 참 희한하단 말이지.
“그건 어렵지 않죠. 언제쯤이 좋을까요?”
“노인국에게 날짜를 정하라고 하면 된다. 나는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테니,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
말을 마친 흑암은 애써 담담한 척 아직 녹다 만 얼음이 들어 있는 물회를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들이켰다.
잔뜩 긴장된 표정, 바르르 떨리는 손끝.
아마 노인국을 만나는 것이 적잖이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많이 반성하고 있나 보네.’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이곳에 가두어 두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 태도에, 왠지 모르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이 문제는 이렇게 대충 해결이 된 듯하군요. 혹시 앞으로도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흑암 님에게 처벌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그때,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강혁 씨가 입을 열었다.
“사실 헌터라는 게, 잘못을 저질러도 벌을 주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니까요. 특히 강력한 이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죽이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죠.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 흑암 님의 도움을 좀 받고 싶군요.”
이강혁 씨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이 바닥에서 암암리에 죽고 죽이는 문제가 만연한 것도, 상대를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지 않는 이상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이 업계의 특성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것 외에는 딱히 해결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던전 내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던전 클리어와 동시에 모든 증거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예방 차원에서라도 위험하다고 판단한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물론 저주 계약서나 스킬을 활용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은’ 하다.
하지만 강력한 저주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해주 아이템이나 스킬이라도 있다면 그 저주의 효과를 감소시키거나 무로 돌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래도 초월자가 직접 건 저주를 막아낼 만큼 강력한 스킬이나 해주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강혁 씨의 제안을 들은 흑암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뜬 흑암은 회한에 잠긴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런 나더러, 나와 똑같은 자들을 벌하라는 것이냐? 나 같은 죄인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이냐?”
“자격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강혁 씨의 대답은 아주 짧고도 간결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는 확고한 말투와 표정.
“어차피 그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잘못을 할 때마다, 누군가가 의심스럽고 나를 해칠까 걱정이 될 때마다 그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결말이 날 겁니다. 그건 제가 말린다고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요. 적어도 이 방법은, 지금까지 업계에서 문제를 처리했던 방식보다는 훨씬 더 나은 해결책입니다.”
이어서 그는 더없이 단호한 태도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전보다 낫다, 그걸로 충분한 겁니다. 벌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죽는 것보다야 낫겠죠.”
그것이 정말로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떠나, 이전보다는 나은 해결책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강혁 씨의 말을 들은 흑암의 입에서는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좋다. 받아들이지. 단, 김수하와 수다르의 허락이 있어야만 저주를 걸겠다.”
하지만 그가 내건 조건은, 다소 의외였다.
“저요?”
수다르 님은 몰라도, 왜 나에게도 허락을 구하겠다는 거지?
“수다르는 내가 본 수많은 생명체 중에 가장 지혜롭고 의로운 자다. 이곳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잘못을 돌아보게 되었지.”
흑암의 이야기를 들은 수다르 님은 인자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흑암님, 저는 그저 흑암 님이 스스로의 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몇 마디 거들었을 뿐입니다. 말을 물가로 끌어가는 것은 가능해도 물을 마시는 것은 말의 몫이듯, 스스로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흑암님의 결정입니다.”
“그래,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을 해주었지. 누구도 하찮은 두더지의 사연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역시, 흑암이 이렇게 부드러워진 건 수다르 님의 공이 컸구나.
흑암과 토생원을 수다르 님과 붙여놓은 건, 아주 좋은 결정이었어.
솔직히 저 둘을 교화시키는 건, 나한테는 어려운 일이거든.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네.’
수다르 님은 사회생활만 만렙인게 아니라, 나로서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마음이 깊은 분이니까.
토생원과의 대결 때 보여준 모습을 보면, 올바른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 만큼 의로운 분이기도 하고.
한 가지 의문은, 왜 그런 분하고 나를 엮느냐는 거다.
“그런데 저는 왜…….”
“너는 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마음이 약하고, 고민이 많다. 지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나에게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 인간이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누군가를 해치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겠지.”
으음……. 그, 그렇게까지 마음이 약하지는 않은데 말이지.
뭐, 사람을 해치는 걸 싫어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찝찝하다고, 그런 거.
“그 조건이라면, 수락하지.”
여러 가지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임준우의 처분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이 난 듯 싶었다.
거기에 앞으로 길드 내에 문제가 있거나 헌터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적절한 처벌도 가할 수 있게 됐으니,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고도 할 수 있겠고.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일이 또 늘었네.’
그렇다. 일이 또 늘어버렸다.
왜 문제를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마다 워라밸에서 ‘밸’이 지워지는 걸까.
이번에도 내 생각은 ‘사람을 죽이지는 말자’ 정도에 그쳤고, 그러다가 흑암을 찾아가서 부탁해보자는 결론을 냈을 뿐인데…….
‘아, 아니야, 그만 생각하자. 어, 얼른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겠어.’
자꾸만 업무량이 늘어나는 것을 느낀 나는 애써 이 문제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곧장 다음 안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리고 오늘 찾아온 건 말이죠. 고미에게 새로운 능력이 생겼거든요.”
마침내 자신의 차례가 오자, 신이 난 아기곰은 곧장 자그마한 청심환 세 개를 만들어 나에게 넘겨주었고,
“후훗, 좋다! 그럼 이제 이 몸의 차례가 왔구나! 어서 이 몸의 새로운 능력을 시험해 보자꾸나!”
< 특수 스킬, 나눠 먹기(Gomi)를 사용합니다. >
< 마력이 1 소모됩니다. (18 / 21) >
나는 그것을 이강혁 씨와 수다르 님, 그리고 막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토생원에게 건넸다.
“으음? 갑자기 왜 고미 님의 기를 나눠주시는 겁니까?”
갑자기 청심환을 내밀자, 토생원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와 고미를 바라봤다.
“아, 고미의 새 스킬이 숲속 친구들을 소환하는 건데, 고미의 기를 사용해서 표식을 만들고, 그 표식이 남은 사람을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거든요.”
“허허, 그것참 대단하군요. 이런 기술이 있다면 언제 어디든 고미 님을 도우러 갈 수 있겠습니다.”
스킬에 대한 설명을 들은 수다르 님은 더없이 기쁜 표정으로 곧장 청심환을 흡수하셨고, 이어서 토생원과 이강혁 씨 역시 빠르게 고미의 기운을 몸 안에 받아들였다.
두 번째 안건도 적당히 마무리됐으니, 이제 수다르 님에게 약초를 넘겨드리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흑암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에게도 그 소환술이라는 것을 사용할 수 있느냐?”
“우웅?! 흑암 너도 이 몸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냐?”
흑암이 간접적이나마 숲속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고미의 꼬리가 또다시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와 친구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내가 혹여 엉뚱한 마음을 품게 되었을 때 나를 소환할 수 있다면……. 너, 너희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게다가…….”
이 츤데레가……. 그냥 좋게 좋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면 되지 뭐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New인국 씨처럼, 확 밝아져 줄 수는 없는 거냐.
‘뭐, 그래도 제 딴에는 많이 착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흑암의 츤츤함에 대해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때,
“후후후, 흑암. 이 몸은 네 마음을 알고 있다! 사실은 너도 스틸맨과 리벤저스 같은 정의의 히어로가 되고 싶은 것이지!”
고미가 오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알사탕 몇 개를 흑암에게 내밀었다.
으으, 불안해. 불안해. 스틸맨 얘기는 그만해주면 안 되니…….
네 입에서 스틸맨 얘기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든다고.
“자, 이것을 받거라, 너도 곰벤져스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청심환에 앞서 이것을 먼저 먹어야 한다!”
언제부터 곰벤져스였어, 고미와 숲속 친구들 아니었냐고!
게다가 사탕은 또 어디서 솟아난 거냐.
분명 사무실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탕인데, 대체 언제, 어디에 챙겨서 가지고 온 거냐고.
“너는 아직 위대한 이 몸과 정식으로 친구가 되지 못했으니, 먼저 이 몸이 나눠주는 음식을 받아야 한다. 그것을 먹고 나면 진정한 친구가 되어 위대한 곰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뭔가 설명이 부족한데…….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나눠 먹기’라든가, 특수 스킬에 대해 설명해주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흐음, 상당히 특이한 의식이군. 일종의 충성 맹세인가? 이해는 가지 않지만, 알겠다.”
하지만 흑암은 그 부족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미가 내민 사탕을 입안에 넣었고,
“마, 맛있구나. 지금껏 농사를 지으며 맛보았던 과일들이나, 그 흑룡 녀석이 매일 같이 가져다 나르던 음식들과는 또 다른 맛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단맛이 존재한단 말이냐?”
단맛 중독자인 고미가 참으로 마음에 들어 할만한 시식평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발언을 통해 흑암이 어쩌다 이렇게 후덕한 두더지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아마 이유찬 씨가 요리를 하는 김에 수다르 님과 토생원, 흑암 것까지 만들어 줬겠지.’
요리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니, 프렌치토스트 하나에도 눈이 동그래져 기뻐하는 흑암에게도 매번 먹을 것을 가져다줬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뭘 얼마나 받아 먹었길래 고작 며칠 사이에 이렇게 통통해졌냐고요. 손가락으로 툭 밀면 굴러다니겠고만.’
원체 사이즈가 작으니까 살도 금방 찌는 건가? 아니면 원래 살이 잘 찌는 체질? 또 쓸데없는 호기심이 동하는군.
“후후후, 그렇다. 바깥세상에는 더욱 달콤한 것이 가득하니, 너도 언젠가 이 몸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자꾸나.”
단맛 중독자, 고미의 제안에 흑암은 말없이 보일락 말락 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 축하합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
흑암이 정식으로 숲속 친구가 되자, 퀘스트 보상으로 그의 스킬 중 하나를 익힐 수 있었다.
‘응? 잠깐…….’
그런데, 스킬의 종류는 둘째치고, 등급이 조금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