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4 특급 감사위원.
사람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태산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던가.
세계 최고의 고미학자인 내가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어서 다음 편을 틀어달라며 성화인 고미를 앞에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아, 수하 씨. 그런데 임준우 문제는 빨리 처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신 팀장 성격에 뭐라도 말을 해주지 않으면 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일을 치러 버릴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눈치챈 이강혁 씨가 잽싸게 화제를 전환했다.
역시, 원조 호구도 느낀 거야.
스틸맨이 죽어버리는 걸 본다면, 아기곰이 받을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거라는 걸.
“아, 아까 여기 올라오기 전에 신 팀장님이 난리 피웠던 게 그것 때문이야? 뭐 누굴 죽이네 살리네 하던데.”
이어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봉식이까지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 그래, 고미.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하자. 영화는 다음에 봐도 되잖아. 용왕이랑 블랙 메이지에도 스파이가 있다고 했잖아. 얼른 그 사람들을 잡아야지. 안 그러면 다른 친구들도 다칠지도 몰라.”
두 사람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나는 잽싸게 고미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적당한 구실을 둘러댔다.
실제로 이 문제는 길드 운영에 있어 꽤 중요한 안건이니, 고미도 받아들이겠지.
“흐음······.”
우리 셋의 협공(?)에 어서 다음 편을 내놓으라며 성을 내던 아기곰은 턱을 괸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 정의의 히어로라면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아야지. 스틸 맨이나 슈퍼 솔져가 친구들과 노느라 악당들을 방치해두면, 지구는 누가 지키겠어?”
으으, 제발, 제발 먹혀라.
지금 이 자리에서 리벤저스의 마지막 편을 틀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단 말이야.
“흥! 좋다! 그럼 어서 그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자꾸나. 위대한 이 몸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스틸 맨도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으아아,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냐,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냐.
이미 스틸 맨의 매력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어.
스틸 맨을 자기의 롤모델로 삼아버린 것 같다고!
자꾸만 무협 영화를 따라 하던 다웅이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이미 고미의 마음속에서 스틸 맨은 지구를 지키는 위대한 영웅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아니, 위대한 영웅은 맞지만······.
‘으아아아! 왜 엔딩을 그따위로 만든 거냐 이 빌어먹을 감독아!’
히어로물이면 해피엔딩이 상식 아니냐고!
“어서 가자, 수하. 너라면 그 배신자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주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가지고 있겠지? 어서 가서 영웅의 직분을 다하자꾸나. 스틸맨도 그것을 원할 테니.”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곰 선생께서는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일단 시간을 끌면서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고미에게 그 엔딩을 납득 시킬 수 있을지.’
* * *
배신자를 처단하고, 다시는 엉뚱한 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막아줄 ‘특급 도우미’가 있는 곳은, 바로 부모님의 가게였다.
아, 물론 공포의 군주나 김태평 사장님이 그런 일을 해줄 거라는 의미는 아니고.
그 뒷마당에 살고 있는 ‘토목 왕’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블랙 메이지 사람들을 단체로 우울증에 걸리게 만든 장본인이자, 네크로맨시와 저주 능력을 가진 초월자.
이 정도라면 임준우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엄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벌을 줄 수 있을 거다.
물론, 현실적인 족쇄까지 채워줄 수 있을 테고.
[ 우웅? 수하, 어째서 엄마 아빠의 가게로 가는 것이냐? ]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린 고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반면 이미 내 생각을 읽은 이강혁 씨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암에게 저주를 걸어달라고 하실 모양이군요. 이거라면 확실히 믿을 만 하겠습니다. 신 팀장도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을 할 겁니다.”
[ 오, 오오! 그렇구나, 흑암 녀석의 능력이라면 그 배신자의 버릇을 고쳐줄 수 있겠구나! ]
뭐, 버릇을 고쳐주는 건 부차적인 거고, 그보다 중요한 건 임준우와 다른 배신자들의 능력을 봉인해 버리는 거다.
신 팀장님의 말대로 한 번 배신한 사람이 두 번 못하라는 법은 없고, 이번 일로 고미나 나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그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 수하!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 엄마 아빠의 가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냐!? ]
지금 가게 앞에는, 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대기열만 열 팀 이상.
이제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한 시간의 횟집에서 펼쳐질 만한 광경은 아니다.
“그, 그러게······.”
게다가 식당을 찾은 손님 외에 고미의 걸작 주위에도 제법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거 너무 좋지 않아?”
“생긴 건 좀 이상한데, 뭔가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
“뭔가 유명한 사람 작품 아닐까?”
······.
으음, ‘내 눈에 곰깍지’ 스킬의 효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굉장하군.
정말로 이 작품이 가게의 홍보에 도움이 될 줄이야.
“너튜브로 볼 때는 몰랐는데, 실물로 보니까 진짜 왜 그렇게 감동했는지 알 것 같아.”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아마 너튜버들이 이 기이한 조각상(?)에 대한 감상을 영상으로 올린 모양이었다.
“꺄아! 판다다! 정말로 판다가 손님을 받네!?”
이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가게가 인기몰이를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가게 입구에는 높다란 의자에 앉은 다웅이가 종이와 펜을 든 채 사람들에게 대기표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다, 다웅!”
“그러니까, 여기에다 적으면 되는 거야?”
“다웅!”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
사람들의 질문에 다웅이는 대답 대신 ‘30’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어 올렸다.
“30분? 30분이라는 거야?”
“다웅.”
“꺄아! 사람 말도 알아듣나 봐! 어떻게 해!”
이게 대체 뭐냐······.
이세계 횟집도 아니고, 뭐가 이래.
[ 후훗, 수하. 이 몸의 걸작과 아웅이, 다웅이가 엄마 아빠에게 도움이 된 모양이구나! ]
그러게, 정말로 이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웅이 다웅이 월급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확실히 이 정도로 손님이 많으면, 직원 둘 월급 주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정신없이 서빙 중인 아웅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아들, 엄마가 지금 좀 바빠서. 밥은 먹었어?”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배는 곯지 않았나 걱정하셨고,
“어, 먹고 왔어. 괜찮아.”
봉식이는 곧장 팔을 걷어붙이고 가게 일을 돕겠다며 나섰다.
“야, 나는 어머니 일 도와드릴 테니까, 너랑 강혁이 형이랑 고미랑 셋이 가서 일 보고 와.”
“알았어, 고맙다.”
[ 우, 우웃! 이 몸도 엄마 아빠를 돕고 싶다! ]
고미 역시 잠시 히어로라는 직분을 내려놓고 부모님을 도우려 했지만,
“고미, 너는 들어가서 친구들한테 청심환 나눠줘야지.”
[ 흐음, 알겠다······. 그럼 어서 일을 마치고 엄마를 도와주어야겠구나! ]
숲속 친구들을 소환하기 위한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엄마, 나 잠깐 토생원이랑 수다르 님 좀 만나고 올게.”
“으응, 그럼 가는 김에 토생원 님한테 상추랑 깻잎 좀 한 박스씩 더 배달해달라고 얘기 좀 해줄래?”
······.
진짜로 초월자가 채소 장수가 되어버렸다는 게 실감이 나는군.
“아, 알았어.”
* * *
뒷마당에 있는 게이트를 지나자, 금세 탁 트인 화원의 전경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사방에서 풍기는 깻잎 향에, 무 향, 달콤한 과일 향까지······.
아직도 화원의 7할 이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초로 가득했지만, 처음에 봤던 그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과일 밭 한가운데 우뚝 선 원두막이었다.
원두막 위에서는 수다르 님과 토생원, 흑암 세 사람(?)이 모여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오, 수하님. 오늘 강혁 님의 길드에 처음으로 출근하셨다고 하던데, 일은 적성에 맞으십니까?”
우리를 발견한 수다르 님은 곧장 인자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느낌을 자아내는 원두막 위로 올라가자, 세 사람이 먹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우, 우웅? 수하, 저 신기하게 생긴 음식은 무엇이냐?”
새로운 음식을 발견한 고미는 또다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렸다.
“물회라는 거야.”
음, 보나 마나 어머니가 고생하신다며 따로 만들어서 가져다 주신 거겠지.
가끔 가게에 오는 대리기사나 배달 기사분들이 끼니를 걸렀다고 하면 그분들에게도 식사를 차려주시던 분이니까.
“호오오, 이 몸도 먹어보고 싶지만······.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아 아쉽구나.”
물회를 처음 본 고미는 피자로 가득 찬 배를 두드리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 참, 토생원 님, 어머니가 깻잎이랑 상추 한 박스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시던데요.”
주문이 들어왔다는 말에, 채소 가게 토 사장님은 얼음이 동동 뜬 물회의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뒤에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허, 장사가 아주 잘 되는 모양이군요. 그럼 저는 잠시 가게에 다녀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그렇게 간단한 심부름을 마친 뒤 흑암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흑암이··· 원래 이렇게 후덕했나?’
내가 기억하는 흑암은, 분명히 상당히 신경질적인 느낌을 주는, 다소 마른 체형의 두더지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대충 잘 말아서 굴리면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토실토실한 두더지가 앉아 있었다.
[ 수, 수하, 뭔가가 이상하다. 혹시 이 녀석은 가짜 흑암이고, 진짜 흑암은 이미 달아난 것이 아니냐? ]
심지어 고미마저 자신의 예리한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변화.
“흥,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눈빛을 보아하니 나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음, 틱틱거리는 말투를 보니 흑암이 맞기는 하군.
그런데 어쩌다 애가 이렇게 후덕해졌냐.
게다가 말투는 여전히 까칠하지만, 눈빛은 전과 달리 상당히 부드러워진 게, 다른 사람, 아니, 두더지라고 해도 믿겠다.
“흑암 씨, 당신의 능력은 저주와 독, 그리고 네크로맨시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잡다한 능력이 있지만, 가장 자신 있는 건 저주와 네크로맨시지.”
역시, 사람을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혹시 지정한 사람이 약속을 어기거나 나쁜 짓을 하면 그 대가로 능력치를 낮추거나, 스킬을 봉인한다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가요?”
나의 질문에 흑암의 이마에는 옅은 주름이 생겨났다.
“가능하지. 조건에 따라 목숨을 빼앗는 것도 가능하다.”
“아, 아뇨, 그 정도로 할 생각은 없고요.”
인상이 좀 좋아져서 사람이 바뀐 줄 알았더니, 여전히 무섭구나.
“흥, 무르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내뱉은 흑암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긴, 여태 나를 살려둔 것만 보아도 너희들이 어떤 녀석들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말해라,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그 대상이 누가 됐든, 절대로 너희의 뒤통수를 치지 못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역시, 잘 찾아왔다. 흑암이라면 가능할 줄 알았지.
“죽이는 건 좀 심한 것 같고, 이능을 봉인하는 형태로 가고 싶은데요.”
“그건 쉽지. 단, 몇 가지 필요한 게 있다. 그리고, 너희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나도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데.”
부탁······. 흑암이 하는 부탁이라, 어째 느낌이 좀 쎄한데.
“어떤 부탁이죠?”
나의 질문에 흑암은 잠시 망설이다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