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92화 (192/300)

EP.192 수하가 좋아하는 것.

“으음······. 흐으으으으음······.”

지금 내 눈앞에는 솜방망이로 머리를 움켜쥔 채 전에 없이 깊은 고민에 빠진 아기곰이 앉아 있었다.

“좋다! 커피를 마셔 보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커피였다.

“허수아비! 수하가 좋아할 만한 맛있는 으음, 좋은 커피를 내오너라!”

자기 기준에서 커피는 맛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음식이니, ‘맛있는’ 대신 ‘좋은’이라는 단어로 대체한 것 같군.

진지하게 내 취향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나에게 퍽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번에도 또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자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린애라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법이니까.

뭐, 나도 고미가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게 좋긴 하지만, 녀석과 나의 취향이 정반대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나는 단 게 싫고, 고미는 단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난 조용한 곳이 좋고, 고미는 시끌벅적한 게 좋고, 난 위험한 건 싫고, 고미는 스릴 중독자고.

이렇게 반대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반대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녀석이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게 그만큼 좋으니까.

게다가 이렇게 날 배려한답시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도 다행이네. 재미있는 걸 하자고 여기서 뛰어내려 보자거나, 위험한 일을 하자거나, 달콤한 음식을 먹자고 할 줄 알았더니······.’

일단 30층에 올라왔으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그거였거든.

잠시 고미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

“기다려 주십시오. 커피를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이강혁 씨가 내선 전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앞으로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시키시면 됩니다. 조정위원에게 그 정도 대우는 해드려야죠.”

사무실에서 내선 전화로 커피를 내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니, 내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이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이미 성공한 것 같은 기분이다.

“흐으으으음······.”

한편, 고미는 여전히 깊은 고뇌에 빠진 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간식 바구니에서 사탕을 꺼내 아작아작 씹어먹고 있었다.

- 오독, 오도독.

한 개, 두 개, 세 개······. 끝도 없이 들어가는군.

술집에서 기본 안주로 나오는 강냉이도 저렇게는 안 먹을 텐데.

정말이지 당뇨가 걱정되는 식습관이다.

‘그런데, 저 녀석 손재주로 어떻게 껍질을 벗긴 거지?’하는 의문이 들어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순간, 원조 호구의 세심함에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미리 다 까놨군······.’

바로 그때, 열심히 사탕을 먹고 있던 고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두 눈을 치켜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구나! 봉식이! 봉식이에게 물어보아야겠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꿀폰과 터치펜을 꺼내 봉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봉식이는 본사로 돌아온 뒤에 정산을 하겠다며 우리와 갈라져 아래층에 있는 관리팀에 가 있는 상태였다.

우리가 챙긴 A급 마정석만 10개가 넘으니, 정산 금액도 상당하겠지.

‘이제부터는 아이템이나 마정석도 잘 챙겨 다녀야겠네.’

헌터들은 보통 연봉보다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얻은 부산물에서 더 많은 수익을 올린다.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마정석이나 아이템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 헌터가 본격적인 직업이 됐으니, 잘 챙겨 다녀야지.

곰돌이 삼 형제 간식값이니 장난감값이니, 돈 들어갈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니까.

“오오, 봉식이! 어서 이 몸의 거처로 오거라! 궁금한 것이 있느니라! 한시가 급하다!”

짧은 통화를 마친 고미는 스스로가 대견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간식 바구니에서 젤리를 꺼내 한입에 집어삼켰다.

“수하! 걱정 말거라, 이 몸이 반드시 즐거운 것을 찾아주겠다!”

으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군.

이게 애 키우는 맛이라는 건가.

‘그래도 저렇게까지 의욕을 불태우지는 않아도 되는데.’

사실 시간이 나면 ‘뭔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 자체를 좋아한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무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주는 평화로운 기분 같은 거.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봉식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무슨 급한 일 있어?”

“봉식이, 수하가 좋아했던 것을 알려다오!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하는구나!”

고미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봉식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는 거?”

······.

나, 그런 캐릭터였냐.

“우웅? 하지만 수하는 항상 일찍 일어나지 않느냐? 이 녀석이 늦잠을 자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아, 자는 걸 좋아한다기보다, 늘 못 자니까 시간만 나면 자는 거에 가깝나. 옛날에는 그랬거든.”

봉식이의 대답을 들은 고미와 이강혁 씨는 측은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대학원 시절 이야기 말고, 조금 더 예전 이야기를 해주셔야 할 것 같네요.”

“글쎄? 그때도 저 자식은 취미 없었어. 대학 때는 수업 듣고 공부하고 끝나면 아르바이트, 봉사 활동, 아니면 부모님 가게 일 도와주고, 나나 대학 친구들 만나서 놀기는 했는데······. 딱히 이렇다 할 취미는 없었는데.”

······.

으음, 그랬군.

하긴, 가정 형편이 그렇게 넉넉한 편도 아니었고, 가만히 누워 돈을 쓰는 것보다는 푼돈이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었지.

“고등학교 때도 학교 끝나면 학원, 학원 갔다 오면 자고, 친구들하고 있을 때도 대체로 친구들이 하자는 걸 했지. 먹는 거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서 거의 친구들이 먹자는 거 먹었고.”

돌아보니,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건 싫지 않았지만, 딱히 ‘꼭 이걸 하고 싶다’던가, ‘꼭 이걸 해야 해’하는 뭔가는 없었던 것 같기도······.

봉식이를 불러내 증언(?)까지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하자, 아기곰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 이럴 수가······. 위대한 이 몸이 가족이자 제자인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단 말이냐!?”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꼭 날 위해 뭘 해주지 않아도, 고미와 함께했던 시간은 늘 즐거웠고, -뭐 가끔 무섭기도 했지만- 그건 식사 메뉴나 활동의 내용과는 무관했으니까.

음식이 맛있다거나, 같이 한 일 자체가 재밌다기보다, 그냥 고미와 숲속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맛있고 즐거웠던 거다.

‘아······.’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이걸 잊고 있었을까.’

애초에 심리학이라는 전공을 택한 이유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사람’이었기 때문인데.

“괜찮아. 꼭 뭘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워.”

나의 대답을 들은 고미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으, 으음, 하지만 넌 언제나 이 몸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않았더냐?”

“난 그냥 너랑 같이 다니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데.”

사실 고미와 함께 다니면 재미는 보장되어 있다.

어딜 가서 뭘 하든, 항상 즐거운 일을 만들어 주니까.

무엇보다, 이 녀석의 독특한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나에게 있어 어지간한 예능 프로보다 재미있거든.

이제는 그만뒀지만, 한때나마 심리학자를 꿈꿨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상이랄까.

“뭐, 굳이 뭘 해야겠다면 오랜만에 같이 영화나 보자. 여기 음향도 좋고 스크린까지 있으니까, 이 정도 시설이면 영화관 못지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잠시 일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당장 처리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에 이어서 ‘일이나 하자’라고 하면······. 별로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출근하자마자 일이 터져서 머릿속을 좀 정리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영화나 보자는 나의 말에 고미는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하지만 앞으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자꾸나.”

앞으로 좋아하는 일이 얼마나 생길지, 어떤 일들을 즐겁다고 생각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이 녀석과 함께라면, 뭘 해도 꽤 즐거울 것 같다는 것 말이다.

“그래, 그럼 오늘은 영화 보자. 마침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는 말에, 잔뜩 주름이 잡혔던 고미의 미간이 쫙 펴지며 녀석의 꼬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게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해 주다니, 정말이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오오! 잘됐구나! 좋다! 무슨 영화든 함께 봐주마! 오늘은 널 위한 날이니 말이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바로 고미도 나도 좋아하는 리벤저스 시리즈의 최신작 중 하나인 ‘리벤저스 - 인피니티 워’였다.

“뭐? 그걸 여태 안 봤어?”

보고 싶은 영화를 말하자, 봉식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

“나 그때 병원에서 실습하고 있었잖아.”

“아······.”

나의 대답을 들은 봉식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 있을 때는 잠만 제대로 재워줘도 감사하던 터라, 영화 같은 걸 볼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사실 너무 많은 사람이 본 작품이라 큰 스토리나 결말 같은 건 대충 알고 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은 없거든.

“모처럼 사무실에 상영시설까지 만들어 뒀으니, 맛있는 거라도 시켜서 먹으면서 보죠.”

그때, 이강혁 씨가 웃으며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어디 보자······. 치킨은 드셔보셨고, 중국 음식도 드셔 보셨으니, 오늘은 피자로 할까요?”

“오오, 피자라! 이름만 들어도 굉장한 음식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강혁 씨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어 배달 어플을 보여주는 순간, 고미의 꼬리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새, 생긴 것은 다 비슷비슷한데, 어째서 모두 이름이 다른 것이냐?”

음, 토핑에 대한 이해가 없는 녀석에게 피자는 그런 느낌의 음식인 건가.

메뉴가 다양하자, 고미는 언제나 그렇듯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먹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위장까지 슈퍼 먼치킨은 아닌 게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아기곰다운 모습이랄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에 빠져있던 초콜릿색 솜뭉치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 오늘의 메뉴는 네가 고르거라! 오늘은 너를 위한 날이니 말이다!”

오, 이건 좀 놀랍네.

천하의 고미 선생님께서 메뉴 선정권을 넘겨줄 줄이야.

그럼 감사히 골라볼까?

“그럼 와규 쉬림프로 하자. 고기도 들어가고, 새우도 들어가는 거로.”

고미는 해산물도 고기도, 치즈도 모두 좋아하니 이만하면 훌륭한 선택이다.

거기에 아직 먹어본 적 없는 새우도 맛볼 수 있고.

“아 참, 도우는 고구마로.”

거기에 단맛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지.

“김수하, 어째 네 입맛보다 고미 입맛에 맞춘 메뉴 선정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봉식이가 곧장 고미를 위한 선택이 아니냐고 지적했지만,

“뭐 어때, 나 새우 좋아하잖아. 도우야 뭐든 상관없고. 기왕이면 고기 들어간 게 좋고. 그리고 너네랑 대화하다 생각해 봤는데, 난 뭘 할지랑 뭘 먹을지는 딱히 관심 없는데,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좋아. 고미나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게 좋고. 그러니까, 이 메뉴가 제일 맘에 들어.”

나는 곧바로 내 취향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답으로 내놓았다.

“음······. 그건 그렇네. 하긴, 옛날부터 그렇긴 했지.”

내 대답을 들은 봉식이는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 우웃······. 수, 수하······. 너는 정말이지······.”

고미는 감동한 듯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곧장 달려와 내 품에 파고들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감동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네.

주문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장을 입은 헌터 하나가 피자와 팝콘을 들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으음······. 팝콘도 배달이 되는 건 아닐 테니, 아마 심부름을 시키신 모양이군.

“자, 그럼 시작합니다.”

마침내 영화가 시작되자,

“우, 우웃! 이럴 수가! 그린 몬스터가! 쏘르가! 수, 수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저 시퍼런 문어는 대체 무엇이냐!? 대체 누구인데 위대한 리벤져스를!”

첫 장면부터 히어로들이 쓰러져 나가는 모습을 본 아기곰은 피자를 먹는 것마저 잊고 분노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 어째서, 스틸 맨은! 슈퍼 솔져는 어디 있느냐! 동료들이 당하고 있는데 왜 힘을 합쳐 싸우지 않느냔 말이다!”

‘음, 실수했군.’

리벤저스-인피니티 워를 보기 전에 봐야 할 영화들을 먼저 보여줬어야 내용이 연결이 될 텐데.

“아, 그건 말이지.”

그때, 나 대신 봉식이가 앞선 시리즈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을 마쳤을 무렵······.

< 고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 새로운 능력이 개화됩니다. >

시스템 창이 반짝거리며 나와 봉식이, 이강혁 씨의 어깨 부근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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