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90화 (190/300)

EP.190 무신 선생님, 나와주세요.

박 실장님의 말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임준우가 아니라 그 누구라고 해도, 고미의 점혈을 스스로 풀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

점혈을 풀지는 못했지만, 외부의 누군가가 그를 탈출 시켰든가, 김춘식 때처럼 초월자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 됐든…….

“아직도 말을 못 합니다. 게다가 저희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 하는 상태라, 심문은커녕 이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놀랐잖아!

그 이야기를 먼저 했어야지!

“후훗, 걱정하지 말거라. 숨은 쉴 수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들을 배신한 녀석이니, 그 정도 벌은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박 실장님의 말을 들은 고미는 거만한 표정으로 통통한 손가락을 세워 여기저기 찌르는 시늉을 해댔다.

“어, 그런데 고미……. 말을 못 하게 하면 심문을 못 하잖아.”

“우, 우웅!?”

나의 타당한 지적에 ‘점혈의 대가’ 고미 선생께서는 당황한 듯 눈알을 굴려대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음…….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친구들을 배신한 나쁜 놈에게 벌을 주고 자기 실력을 보여줄 생각뿐이었던 모양이군.

하긴, 뒷일을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면 고미가 아니지.

뭐, 괜찮다. 늘 그랬듯이, 뒷수습은 내 몫이고, 그래야 나도 분량을 좀 챙기니까.

“괜찮아,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니고. 돌아가서 천천히 해보자.”

그렇게 고미는 첫 출근부터 저스티스의 길드원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몸이 너무 좋아서, 머리가 고생할 일이 없으신’ 특별 교관님으로.

* * *

본사 건물로 돌아간 후, 박실장님은 우리를 데리고 20층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가두어 뒀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오, 오오오! 허수아비! 훌륭하다! 이 몸도 이렇게 높은 곳에 머무르고 싶구나! 위대한 이 몸에게는 높은 곳이 어울리니 말이다!”

처음으로 이렇게 높은 건물에 올라와 본 아기곰은 신이 나서 창가를 오도도도 뛰어다니며 몇 번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음, 무섭지도 않나.’

놀이 기구를 탈 때를 봐도 그렇고, 평상시 행실을 봐도 고소공포증이 있을 것 같은 캐릭터는 아니지만…….

‘설마, 내 사무실도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건 아니겠지?’

으으, 싫다. 싫어.

난 저층이 좋다고.

“걱정 마십시오. 곰 선생님의 사무실은 이 건물의 꼭대기 층입니다.”

하지만 이강혁 씨는 나의 작은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다.

“어, 제 사무실은…….”

“곰 선생님과 같은 방입니다.”

역시,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 거냐.

아마도 사무실의 위치는 순전히 고미의 취향을 고려해 정해졌겠지.

하지만 다 큰 어른이 높은 곳은 무서우니 사무실 위치를 바꿔 달라고 투정을 하기도 민망하고, 고미도 저렇게 좋아하니, 그냥 써야지 뭐…….

“아 참, 사무실에 곰 선생님이 좋아하실만한 것들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오, 오오! 허수아비! 역시 너는 신의를 아는 녀석이구나! 또 맛있는 것을 잔뜩 준비해 둔 것이냐!?”

“먹을 것뿐만 아니라 다른 선물들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오! 좋다, 어서 저 배신자 녀석을 혼내준 뒤에 위대한 이 몸의 거처로 가보자꾸나!”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조 호구는 자신의 충심(?)을 증명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선물이라는 말에 잔뜩 신이 난 아기곰은 곧장 보석 같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군.

“알겠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사무실로 가보자.”

자신의 속을 읽은 듯한 나의 말에 고미의 동글동글한 얼굴에는 금세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오오! 좋다! 이런 일은 역시 수하 네게 맡기는 것이 최고지! 너는 최고의 모리배이니 말이다!”

흠……. 항상 느끼는 거지만, 분명히 칭찬인데, 뭔가 기분이 묘해지는 단어 선택이다.

“그럼 가볼까요?”

* * *

저스티스의 감사실 안으로 들어가자, 왠지 모르게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우리를 맞이한 것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무뚝뚝한 사내로, 전신에서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를 긴장시킨 것은, 이 사람이 뿜어내는 섬뜩한 분위기였다.

“그래. 상황은 대충 들었다. 이쪽은 곰 선생님, 이쪽은 김수하 씨, 대충 알고 있겠지?”

이강혁 씨의 말에 사내는 제꺽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신우진이라고 합니다. 신 팀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곧장 우리를 임준우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제 실력으로는 점혈을 풀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후훗,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이 몸의 독문 점혈법을 풀 수 있는 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네.”

고미의 오만한 말에, 신 팀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웃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분이 상한 것을 감추는 듯한 느낌도 아니다.

‘뭐, 뭐지, 이 사람.’

심지어 고미를 보고 귀엽다고 느끼지도 않는 것 같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말하는 슈퍼 먼치킨 아기곰을 보고도 이렇게 무반응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호오…….”

그때, 고미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 왜 그래, 고미? ]

초면부터 상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이 조금 실례라는 생각에, 나는 전음으로 고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 이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예사롭지 않구나. 이건 틀림없이 괴수가 아니라 인간을 더 많이 상대해 본 자에게서 풍기는 기운이다. ]

‘음, 감사과 헌터라 그런가.’

고미가 하는 말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지금껏 만난 헌터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그럼 점혈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고미와 내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신 팀장은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점혈을 풀어 달라고 부탁했고,

- 탓, 타탓!

고미는 곧장 자신의 기를 날려 임준우의 혈도를 짚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길드장님!”

말문이 트인 임준우는 곧바로 이강혁 씨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아, 말만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임준우, 묻는 말에나 잘 답해라.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내가 널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신 팀장의 짤막한 한마디에, 임준우는 목에 칼이 들어온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알겠네.’

감사과 팀장이라는 직책, 나 같은 초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살벌하고 음침한 분위기, 고미의 말, 거기에 공포에 질린 임준우의 반응까지.

암살계 헌터. 그것도 길드 내부의 불순분자를 숙청하는 칼.

아마도 그게 신 팀장님의 역할이겠지.

심문이 끝나면 본보기 삼아 이 사람을 어디론가 데려가 조용히 묻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할 생각이다.

물론, 벌은 주겠지만.

게다가 이 사람을 이용해서 정보 외에도 뭔가 얻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걱정 마요.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나의 말에 임준우는 안도한 듯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제 말에 솔직하게 답해주지 않으시면 점혈은 못 풀어드려요.”

그러나 점혈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말에, 또다시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이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A급이라면서요. 솔직히 살려드리는 것도 적잖이 위험한 일이에요. 그런데 협조도 안 하는 사람을 풀어드릴 수는 없죠. 이 부분은 양해 부탁드릴게요.”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비일비재한 바닥이라지만, 나는 아직 살인을 해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고.

답답하다고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 원칙만은 깨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이제 막 세상을 배워가는 슈퍼 먼치킨 아기곰에게 ‘문제가 복잡해지면 사람을 죽여서 해결할 수 있다’라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입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도, 일단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면 고미도 그걸 그대로 배울 테니까.

“저, 정말 살려주기는 하는 겁니까?”

“솔직하게 대답만 하시면요. 처음부터 스파이로 저스티스에 들어오신 건가요?”

나의 대답에 임준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처, 처음부터 정보를 팔았던 건 아닙니다…….”

“무슨 정보를, 얼마나 팔았죠?”

“시, 신입 길드원들과 관련된 정보와 길드장 님의 최근 행적, 그리고……. 저희가 소유한 던전에 관한 정보입니다. 물론 제가 아는 선에서…….”

이 자식이……. 그 정도면 다잖아.

아, 그냥 없애버리고 싶다.

참자 김수하, 참을 인(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잖아.

여기서 살인자가 될 수는 없지. 참아라.

“내 행적은 어디까지 보고했지?”

이강혁 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그냥, 최근에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밖으로 나도신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같은데, 길드 일에 거의 관심이 없으시다……. 그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아는 것도 거의 없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사람이 아는 게 생각보다 없다는 것 정도.

숲속 친구들 이야기는 이강혁 씨의 측근들만 아는 비밀이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문경준은 진즉에 우리를 찾아와 난리를 피웠겠지.

“후……. 이봐요, 임준우 씨. 이거 보여요?”

나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핸드폰을 꺼내 임준우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문경준이 나에게 전화를 건 수신내역이 남아있었다.

얼마 전 문경준에게 내 번호를 알려줄 때 남은 기록이었다.

“최근에 나는 문경준과 한가지 거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아까 길드 앞에서 제가 문경준이 찾아올 거라고 얘기했을 때 당황하신 거,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그런 거죠?”

거짓말이다. 솔직히 이 사람이 당황했는지 아닌지 보지 못 했다. 그냥 우연히 고미가 이 사람을 찾아내면서 일이 여기까지 굴러온 거니까.

하지만, 아마도 당황했겠지.

그리고 문경준은 이 사람에게 우리의 거래 내용에 대해 얘기해줬을 리가 없다.

그 일이 있고 하루 밖에 안 지난 데다가, 문경준의 성격상 아기 판다에게 두들겨 맞아서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저스티스를 방문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리가 없으니까.

“그, 어, 어떻게…….”

역시, 대충 넘겨짚은 건데 잘도 떡밥을 물어주네.

[ 우, 우웃! 수하, 저, 정말로 이 몸이 저 녀석을 찾아내기 전부터 수상한 점을 눈치챈 것이냐?! 역시 넌 대단하구나! ]

음……. 임준우를 낚으려고 던진 떡밥에 엉뚱한 게 같이 딸려온 것 같군. 이건 그냥 넘어가자.

“이제 난 당신이 이야기를 한 정보가 사실인지, 문경준과 대화를 나눠 교차검증을 해 볼 예정입니다. 문경준이 거짓말로 둘러대봤자, 나는 그걸 간파할 수 있고요. 당연히 반대도 가능하죠. 당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문경준에게 먼저 묻고, 그 다음 당신에게 확인을 할 생각입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 다 얘기하는 건,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겁니다. 모든 걸 털어놓을 기회를요.”

이것도 당연히 거짓말이다.

문경준은 진짜로 죽여도 대답을 하지 않을 위인이니까.

그런 사람보다는 겁 많은 배신자를 협박하는 편이 훨씬 일이 편해서 그러는 것 뿐이다.

이어지는 나의 말에 임준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문경준은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나와 연락을 취하고 있고, 눈앞에는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자가 심문을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한쪽에는 감사과의 팀장이 언제든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건 나뿐이니, 이제는 살기 위해 아는 건 다 불 수밖에 없겠지.

“저스티스나 연맹의 다른 길드에도 문경준에게 포섭된 스파이가 있습니까?”

이미 새 나간 정보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건 사양이다.

“저, 저스티스에는 없지만, 다른 길드에는 저같은 첩자가 몇 있습니다…….”

하아,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고만.

일단 이건 신 팀장님과 이강혁 씨에게 맡기고, 나는 다른 쪽에 집중하자.

모처럼 무신을 끌어낼 실마리를 잡은 것 같으니까.

“좋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조금 있다 신 팀장님에게 말해주세요. 어떻게 단기간에 A급이 된 거죠?”

“저, 저를 A급으로 만들어준 건 무, 문경준이 아니라 무신입니다. A급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고요.”

“방법은?”

“계약과 단약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스킬을 받았습니다…….”

여기도 예상대로군.

“그럼 문경준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겠네요?”

“그, 그렇습니다.”

“무신이 문경준을 사도로 만든 이유는 뭡니까?”

“자신이 찾는 궁극의 무의 단서를 찾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놀이공원에 결계를 친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의 실력을 확인해 보라고…….”

이어진 말에 따르면, 본래 그는 돈이나 아이템을 받고 정보를 팔아먹었다고 했다.

무신이 자신을 A급으로 만들어 준건, 고미를 찾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뒤, 그러니까 불과 몇 주 전이라고.

‘역시, 놀이공원에 쳐진 ‘흑곰덫’을 보고 고미를 찾아내라고 문경준을 사도로 임명한 게 맞나 보군. 그럼 그 결계를 만든 게 고미라는 걸 알게 되면,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확실한 방법으로 무신을 끌어내는 게 좋겠지.

지금 내 손에는 아주 잘 익은 떡밥이 하나 굴러들어왔으니까.

[ 고미, 무신을 끌어내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

나의 질문에 고미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흥, 좋다. 감히 어떤 놈이 그런 건방진 이명을 쓰는지 궁금했는데, 그놈을 만나 누가 진정한 무의 화신인지 확인시켜주마. ]

좋아, 그럼 고미에게 동의도 얻었겠다, 무신에게 선물을 보내볼까?

겸사 겸사 이 배신자에게 벌도 주고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