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8 영웅은 때로는 굴욕을 감내한다.
<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해 스킬 등급이 향상됩니다. >
< 고미류 기공술 – 곰기 A -> S >
- 진정한 곰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제 당신의 곰기는 위대한 곰의 그것에 더욱 가까워집니다.
등급이 향상된 스킬은, 바로 곰기였다.
‘나이스.’
A급을 S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스킬 포인트가 두 개나 필요하다.
그런데 때마침 고미의 조언으로 S급이 되었으니, 그만큼의 포인트를 아낄 수 있었다.
- 화르륵!
곰기가 S급에 이르렀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검붉은 화염 사이로 새하얀 불씨가 점점이 섞이기 시작했다.
‘괴, 굉장해.’
이어서 사방으로 어지럽게 날뛰던 화염이 갈무리되며 한점으로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화력.
[ 오, 오오! 수하! 이제야 흑염대웅신검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구나! ]
으음……. 마치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발언이군.
정말일까?
고미는 거짓말을 못하는 녀석이니, 내 실력이 부족해서 S급 아이템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지.
‘다른 스킬은 뭐지?’
하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 비웅참 (飛熊斬) (A / A ~ Gomi) >
- 진정한 곰의 발톱은 천하제일의 명검이나 다름이 없으며, 곰기를 활용해 멀리 떨어진 적에게도 강력한 일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곰의 제자인 당신 역시 곰기를 활용해 멀리 떨어진 적에게 검격을 날릴 수 있습니다.
비고 : 스킬 사용시 웅혼한 기상을 담아 ‘비웅참’을 외쳐야 합니다. 스킬명을 외치지 않을 경우, 스킬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
지금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나더러 ‘비웅참!’을 하라고?
내 사망신고서에 사인을 ‘수치사’로 적어줄 셈이냐?!
[ 수하! 어서! 곰기를 날리거라! 너라면 할 수 있다! ]
그때, 잔뜩 흥분한 아기곰이 또다시 짤막한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며 나에게 전음을 보냈다.
미안해, 고미……. 이번만큼은 무리야.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초면에 비웅참은 좀 아니잖아.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맞다, 새로 생긴 스킬이 하나 더 있지?’
그래, 일단 그거나 시험해 보자.
비웅참은 나중에 숲속 친구들끼리 있을 때 쓰고.
- 크워어어!
바로 그때, 게임에서 보았던 야만전사처럼 가슴과 어깨만 대충 가린 낡은 갑옷을 입은 거인족 전사 둘이 지면을 박차고 나를 향해 날아왔다.
[ 아, 아앗! 수하! 우물쭈물거리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느냐! ]
몬스터들이 나에게 다가오자, 이내 머릿속에 잔뜩 실망한 아기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검기를 날릴 수는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비웅참!’만큼은 피하고 싶은 내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고마울 수 없는 타이밍.
“와라!”
- 캉, 캉!
나는 혹시나 이 기회가 날아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방패와 검을 두드려 녀석들을 자극했다.
거인족 전사의 손에 들린 도끼의 날은 내 몸통만큼이나 두꺼웠다.
저기에 맞는다면, 잘리는 게 아니라 그대로…….
‘으,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머릿속에 떠오른 참혹한 영상을 검열 삭제하고 있을 때,
- 부우웅!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두꺼운 도끼날이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나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S급의 곰기로 만든 흑염룡의 불꽃이라면, 절대로 A급 몬스터의 공격 따위에 밀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거대한 도끼날과 검은 불꽃에 휩싸인 쇠막대가 맞부딪히는 순간, 종이를 자르는 듯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고,
- 크, 크륵…….
도끼를 자르고 뻗어 나간 불꽃은 그대로 거인의 몸을 두동강 내 버렸다.
‘마, 말도 안돼!’
일검에 A급 몬스터의 무기는 물론이고 몸통까지 한 번에 베어버리다니…….
‘이게 내가 한 거라고?’
일격에 동족이 죽어버리자, 곁에 있던 거인족 전사의 눈이 공포와 분노로 뒤범벅이 되었다.
‘처음 봐.’
A급 몬스터가 공포를 느끼다니, 정말로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
고미에게 겁을 먹는 걸 몇 번 보긴 했지만,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되다니.
- 크, 크어엉!
하지만 분노가 공포를 압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분노가 뇌를 지배하자, 녀석은 곧장 손에 들린 거대한 망치를 붕붕 휘두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긴 리치, 압도적인 힘, 넓은 공격 범위. 육체의 사이즈에 걸맞은 방어력과 맷집.
확실히 A급에 걸맞은 강력한 몬스터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그 빈틈을 파고들 충분한 속도와,
- 푹!
일격에 치명상을 남길 수 있는 무기와 힘이 있었다.
두 번의 검놀림으로 두 마리의 거인족 전사를 베어 넘기자, 뒤쪽에서 또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장난 아닌데? 저 정도면 길드장님이랑 비슷한 수준 아니야?”
“움직임도 어딘가 비슷한 것 같은데…….”
역시, 보는 눈들이 정확하네.
사실 지금 내 움직임은 고미와 이강혁 씨를 보고 배운 거니까.
고미가 큰 스승, 이강혁 씨가 작은 스승쯤은 되지.
아, 키 얘기는 아니다.
키로 따지면 당연히 고미가 작은 스승이지.
- 크, 크르륵!
너무 쉽게 둘을 처리한 탓일까, 나머지 거인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진형을 유지하며 천천히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 수하! 이제 검기를 날려 보거라! 어서! ]
잠시 틈이 생기자, 고미는 또다시 흥분한 목소리로 신기술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미안하다, 고미.’
이번만큼은 안 돼.
너무 매정한 것 같지만, 초면부터 스킬 이름을 외치는 이미지로 굳어버리면 앞으로 조정위원의 권위라는 게 서지 않을 거다.
어디까지나, 연맹의 화합과 조정위원으로서의 위엄을 생각해서…….
“덤벼!”
하지만 이대로 거리가 벌어져 있으면, 또다시 고미는 새 스킬을 사용하라고 다그치겠지.
- 캉! 캉!
[ 아앗! 수하, 무슨 짓이냐! 또다시 곰기를 날릴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
처음으로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듯한 나의 모습에, 고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약간의 분노가 묻어났다.
솔직히, 너무나 간절히 필살기를 원하는 고미의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난 착한 사람이거든.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창피해서가 아니라, 조정위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또다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왜 여기서!’
여덟 명의 거인족 전사 중 두 명이, 무려 ‘활’을 꺼내든 것이다.
‘치, 침착하자, 김수하. 지금 내 능력치라면 앞에서 달려든 놈을 먼저 베고 충분히 가까이 파고들 수 있어.’
그래, 가능하다. 지금 내 능력치에 더욱 강력해진 흑웅대웅신검이라면…….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선공을 하는 게 낫겠어.’
하지만 결심을 굳히고 삼색 영지버섯을 앞세운 채 돌진하려는 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낮은 소리와 함께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응? 이, 이게 어떻게 된…….’
갑작스러운 기현상에 저도 모르게 발이 멈춰섰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창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
< 필수 퀘스트 : 너부터 불러, 웅비어천가. >
- 위대한 곰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가족과 제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위대한 곰이 ‘수천 년 간 꿈꿔 온’ 가장 큰 소원입니다.
★ 본 퀘스트 미수행시, 능력치 및 스킬 포인트 감소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
…….
‘이, 이게 진짜!’
지금 이거 보여주려고 시간 늦춘 거냐!
이런 짓 하면 해고 당하는 거 아니었냐고!
거기다 별은 뭐야, 별은! 개입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비고 : ★ 또한, 앞으로 닥칠 재앙에서 인류를 지킬 중요한 스킬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
자, 잠깐, 뭐…….
눈앞에 스쳐 간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려던 찰나,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고미의 낭랑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야, 아직 보상은 읽지도 못 했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 수하! 지금! 지금이다! 어서 저 활을 든 놈에게 곰기를 날려라! ]
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진짜냐? 진짜 비웅참 한 번에 인류의 운명까지 걸려 있는 거야?’
인류의 운명이냐, 조정위원과 인간 김수하의 사회적 생명이냐…….
‘관리자 그 자식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아니야, 그래도 지금까지 퀘스트로 거짓말을 치지는 않았잖아.
만에 하나 내가 여기서 비웅참을 안 했다고 인류가 멸망하면…….
‘개자식! 다음에 만나면 진짜 때려준다!’
그래, 인류가 평화를 되찾고, 모두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나 하나 정도는 희생할 수 있어.
가자, 김수하. 영웅이 되는 거야.
“비, 비웅참…….”
결국 나는 있는 힘껏 응집된 검기를 내뿜으며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 비웅참을 외쳤다.
- 푸쉭.
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으니…….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검을 떠난 검붉은 화염은 비를 맞은 성냥불 같은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말았다.
‘왜! 했잖아! 왜! 뭐가 문젠데!’
[ 수하! 안 된다! 그 정도 기백으로는 비웅참을 사용할 수 없느니라! ]
“김수하! 그거 안 돼! 크게 안 하면 안 나가!”
“수하 씨! 진심을 담아 외치셔야 합니다!”
연달아 울리는 숲속 친구들의 목소리에, 머릿속에 ‘갓-고미 크래쉬!’와 ‘승웅참!’을 외치던 두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이제와서 돌아보니……. 뒷모습이 슬퍼 보였던 것도 같다.
이 둘은 이미 이 과정을 겪었던 거구나…….
몰라줘서 미안하다.
너희들의 마음! 확실히 받았다!
“비웅참!”
평생 내 본 적 없는 커다란 목소리로 스킬명을 외치며 손에 들린 검을 휘두르자,
- 화륵!
마침내 흑염대웅신검에 깃든 검붉은 불꽃이 나의 영혼에 답했다.
[ 그래! 수하!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야! 너의 목소리에서도 진정한 곰의 기운이 느껴진다! ]
이어서 맹수의 발톱 같은 형상으로 응집된 검붉은 화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 크워어엉!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활을 꺼내들던 거인 중 한 마리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 한 번 더! 수하! 아직 한 놈이 남았다! ]
그래! 어차피 한 번 한거, 두 번은 못할쏘냐!
“비웅참!”
* * *
이후 나는 멀리 떨어진 놈을 향해 몇 번이나 ‘비웅참’을 외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열 마리에 달하는 거인들이 모두 반으로 잘리거나 재가 되어 사라져 있었다.
“와아, 조정위원님! 정말 멋졌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웬 처음 보는 헌터가 조정위원이라고 들어왔나 했는데!”
“마검사이신가요?”
“아니야, 순수 검술 계통이라니까! 아까 그건 아이템 효과 맞죠?”
“능력치는 어느 정도예요?”
체험 학습에 따라온 저스티스의 길드원들은 잔뜩 흥분해 나를 둘러싼 채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반응.
조정위원으로서의 위엄은 충분히 선 것 같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이상이지.
‘그런데 왜……. 기쁘지가 않냐.’
이런 걸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하는 건가…….
“아까 그 스킬은 뭐죠? 비웅참? 직접 붙이신 이름인가요?”
비웅참이다. 비.웅.참. 날 비(飛), 곰 웅(熊), 벨 참(斬).
비웅참이라고!
아까 외치는 거 다 들었잖아!
“길드장님 외에 그렇게 강한 검기를 날릴 수 있는 분은 처음 봐요!”
“아니야, 분명 마법이라니까.”
자리에 있던 헌터들 중 몇몇이 눈을 빛내며 질문 공세를 퍼붓자, 제자의 활약에 잔뜩 기가 산 아기곰이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훗, 아까 그것은 비웅참이라고 하는 초식이니라. 위대한 이 몸이 창안한 신웅류 검법의 초식 중 하나지. 너희의 대장인 허수아비도 위대한 이 몸에게 가르침을 받고 더욱 강해졌느니라.”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사람들의 ‘진심’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정말로 스킬 이름을 외치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
나머지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혹은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끝이야…….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끝났어.’
띠링.
그때, 굴욕(?)을 감내한 대가로 또 하나의 선물이 도착했다.
‘이게 뭐야? 정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선물이.